세상의 절반 여성이야기 우리 청소년 교양 나ⓔ太 2
우리교육 출판부 엮음 / 우리교육 / 2003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여성에 대한 차별적인 인식을 담고 있는 말들을 살펴보자. ‘여자와 소인은 가까이 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어떤 여자인지와는 무관하게 모든 여자는 소인과 같은 존재라는 얘기다. 소인이란 도량이 좁고 간사한 사람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고, 나이 어린 아이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같은 맥락에서 ‘아녀자’라는 말이 있다. 아녀자는 아이와 여자를 함께 지칭하는 말이다. 결국 여자는 아이와 같은 존재라는 얘기다. 여자는 아이와 같이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이므로, 어려서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시집가서는 남편의 뜻을 따르고 늙어서는 아들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삼종지도(三從之道)이다.




‘여자 나이 삼십이면 눈먼 새도 돌아보지 않고, 여자 나이 사십이면 장승도 돌아보지 않는다.’ 이 말은 여자의 가치는 전적으로 젊음과 외모로 평가된다는 얘기다. 여성에 대한 이런 편견은 옛날 우리 나라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파니 핑크>라는 독일 영화가 있었다. 이 영화의 첫 대사는 이렇다. “여자가 나이 서른에 남자를 만나는 것은 원자폭탄을 맞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다.” 어떤 일을 하는지, 성격이 어떤지 등과는 전혀 무관하게 그저 나이와 외모로만 여성의 가치를 매기려는 일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일인가 보다. 반대로 남자들의 경우에는 나이 드는 것이 남자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매력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평가된다. 중년 남자에게는 원숙함, 노련함, 중후함 등의 새로운 가치가 매겨진다. 텔레비전을 통해 매일 보게 되는 뉴스의 앵커들을 생각해보라. 젊고 예쁜 여자와 나이 많은 남자가 파트너가 되고 있지 않은가.




다들 세상 좋아졌다고 하는데 아직도 우리 생활 곳곳에는 여성과 남성을 차별하는 시선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가 알지 못한 채 지나치는 성차별에 대해 아주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게 만들어주는 책이 있다. 『세상의 절반, 여성이야기』는 여성문제 전문가, 교사 등이 현장에서 직접 겪은 일들을 바탕으로 쓰여진 책이다. 이 책에는 중학생이나 고등학생들이 자신의 경험을 직접 쓴 예화들이 많이 있어서 그 내용에 쉽게 공감할 수 있다. 1부는 가정과 학교, 사회 속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길들여지고 있는가에 대해서, 2부는 문학과 대중매체에서 여성들의 모습은 어떻게 그려지는가에 대해서, 3부는 건전한 사랑에 대해서 쓰여졌다. 4부는 꽁트나 촌극 쓰기, 동화 새로 쓰기 등의 활동을 통해서 바람직한 여성관을 표현해보는 활동자료들이 제시되어 있다.




이 책에는 제주도 선분대 할망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여자들의 지위가 어떠했는지를 설명해준다. 그중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옛날 양반집 여자들은 외출할 때 반드시 하인과 동행해야 했으며, 얼굴은 반드시 가리고 다녀야 했다. 그런데 이런 규제가 얼마나 엄격했던지, 집에 불이 났는데도 하인이 옆에 없다는 이유로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타죽은 여자가 열녀전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단다. 지금 들으면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난감한 사건이다. 이뿐 아니라 선조 때는 과부인 어머니가 종과 간음했다고 하여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어머니를 살해한 자식에 대한 기록이 있으며, 과부가 음행했다는 풍문을 듣고 그 친형을 비롯한 친척들이 합세하여 그 여자를 돌과 함께 묶어 강물에 던지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옛날 여자들은 남자들의 가문에 들어가 어머니 노릇, 아내 노릇을 충실히 할 때에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으며, 가문을 더럽혔다고 판단이 될 경우, 얼마든지 남자들의 손에 죽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런 사건이 옛날에나 있었던 보기 드문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지금도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명예살인’이라는 것이 있다. 이유를 불문하고 여자가 재혼을 한다든가 집안의 허락 없이 남자를 만난다든가 하면 남자형제들은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해서 여자들을 죽이는 일이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있다.




최소한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이제 그런 극단적인 일은 없는 것 같으니 일각의 우려대로 여자들이 살만한 세상이 된 것도 같다. 하지만 『세상의 절반, 여성이야기』는 우리가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 일상 속의 성차별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게 해준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아들과 딸의 차별에서부터, 아주 어릴 적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차별을 차별이라고 인식하기가 쉽지 않다. 흔한 예로 지금까지도 여자 아이 옷은 분홍색, 남자 아이 옷은 파란색 일색이다. 물론 그런 색깔 구분에서 벗어나고자 노랑색이나 초록색 등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아직도 대세는 ‘분홍 딸과 파랑 아들’ 식의 구분이다. 뿐만 아니라 서점이나 큰 슈퍼에 가보면, 여성-아동 코너 혹은 여성-생활용품 코너라는 구분이 아직도 남아있다. 즉 위에서 말한 대로 여자와 아이가 하나의 범주로 묶일 수 있고, 살림살이는 여자가 도맡아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그대로 반영된 분류법인 셈이다. 또, 같은 상황에서도 남자와 여자에 대한 표현은 달라진다. 앞장서서 일을 도맡아 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 그가 남자이면 ‘리더십이 있다. 적극적이다’라고 하는 반면 그가 여자이면 ‘너무 나선다, 극성스럽다’ 등의 평가가 먼저 나오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태어날 때부터 남자는 적극적이고 리더십 있게 태어나는 것인가.




사람들은 흔히 남자를 하늘, 여자는 땅이라는 표현을 쓴다. 하지만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때로는 하늘이 땅 밑에 있을 수도 있다. 결국 모든 것은 관점의 차이일 뿐이라는 얘기다. 여자와 남자에게 부여된 특성들이 원래부터 타고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 책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장끼의 깃은 매우 아름다워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만 까투리의 깃은 칙칙하여 숲속의 낙엽과 잘 구분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까투리가 적의 눈에 발견되지 않고 알을 낳아 무사히 새끼를 기를 수 있도록 진화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즉 까투리의 깃털이 처음부터 칙칙했기 때문에 알 낳고 새끼 기르는 임무를 떠맡게 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여자의 천성이 내향적이고 온순했기 때문에 육아의 임무가 맡겨진 게 아니라 여성에게 주로 주어져 온 일이 살림과 아이 기르기와 남편 뒷바라지였기에 그에 맞게 점점 변화된 것이고, 그런 특징들이 마치 여성의 미덕인 양 칭송되어 왔을 뿐입니다.




자기 주변을 정돈하는 습관이나 예의바른 말씨를 쓰는 것은 여자나 남자 모두에게 필요한 미덕인데도, 남자가 왜 그렇게 지저분하냐, 사내가 말버릇이 그 모양이니 어디 장가라도 가겠느냐는 말은 하지는 않는다. 오직 여자애가 그렇게 지저분해서 어디에 쓰겠냐, 그래서 시집이나 가겠냐라는 말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아들에게는 인생의 갖가지 목표를 암시하는 이름을 지어주고 딸들에게는 그저 착하고 예쁘고 순하기만을 바라는 이름을 지어주는 것도 이미 여자와 남자의 특성, 여자와 남자의 할 일이 다르다는 차별적인 가치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현모양처(賢母良妻)라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현명한 어머니와 선한 아내라는 것은 아주 좋은 말이다. 문제는 현부양부(賢父良夫)라는 말은 남자들의 미덕으로 강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현명한 아버지와 선한 남편 역시 훌륭한 미덕이지만, 남자들에게는 그런 것보다는 집 밖에서의 성취가 더 중요한 것으로 가르쳐져 왔다. 그리고 여자들에게는 모든 관심을 가정 안으로만 묶어놓고, 사회에 대한 참여 의식을 갖지 못하게 하며 집 안에서의 역할만을 강요해온 것이다.




어찌 보면 예전의 여성들보다 현대의 여성들이 더 힘든 삶을 사는지도 모른다. 현대의 여성들은 남자들과 동등하게 사회활동을 하면서도 집안 일은 여전히 여성들의 몫으로만 남아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일하고 들어오시면 쉬시지만 어머니는 퇴근하고 오셔서도 잠시도 앉아있지 못하고 집안일을 하신다. 그러니 여자들은 남자들에 비해 늦게 출근하고 일찍 퇴근하므로 직업의식이 없다고 비난하는 것은 부당한 일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여자들이 아이를 낳게 되면, 아이를 기르는 몫은 전적으로 여자들의 책임이 되기 때문에 누군가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는 경우 여자들은 직장을 그만 둘 수밖에 없다. 출산 휴가는 물론이고 마음 놓고 아이를 맡길 시설도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아이를 낳은 여자들이 직장을 포기하게 되는 일이 많아지는 것이다. 더군다나 여성들이 임신을 하면 은근히 퇴직하라는 압력을 넣는 기업주들이 아직도 많은 상황에서, 여자들은 언제 직장을 그만 둘지 모르고 책임감이 부족하므로 중요한 일을 맡길 수 없다고 비난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실제적인 상황과 사회적 구조를 무시한 채 모든 잘못의 원인과 책임을 여자들에게 돌리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성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극명하게 드러난다. 『세상의 절반, 여성이야기』에서도 다양한 사례들을 들고 있는데, 특히 여자들이 성적인 위협을 당하는 경우 피해를 당한 여성이 어떻게 모든 책임을 지게 되는지 보여주고 있다. ‘여자가 먼저 꼬리를 치니까 그렇지, 옷차림이 야해서 그렇지, 밤늦게 돌아다니니 그렇지’ 등의 말이 성폭행을 당하거나 당할 뻔한 여성들이 가장 먼저 듣게 되는 말이다. 그러면서 남자는 ‘원래’ 충동적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니 여자들이 미리미리 알아서 피하고 조심해야 한다고 우리 사회는 여자들에게 가르쳐왔다. 이런 논리는 집안에 도둑이 들어 물건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도둑 잡아줄 생각은 안하고, 왜 그렇게 잘 살아서 도둑이 들게끔 만드느냐고 도둑맞은 사람을 비난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가해자는 쏙 빼놓고 피해자에게 모든 책임을 지우는 격이다. 이 책은 이런 논리가 가능할 수 있는 것이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받아온 차별적인 성교육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여성은 성에 대해 관심도 없어야 하는 반면, 남성은 강한 성욕을 표현하는 것이 용인되며, 또 그렇게 해야 남자답다는 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성욕과 성 본능에 있어서 여자와 남자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차이를 가진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온 것이다.




지난 여름, 크게 인기를 끌었던 <내 이름은 김삼순>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많은 여자들에게 크게 공감을 불러일으켰던 삼순이라는 주인공에 대한 재미있는 설문 조사가 있었다. ‘김삼순’이라는 주인공에 대해서 기업의 인사담당자들은 ‘별로’라는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다. 채용하고 싶지 않은 이유를 묻는 질문에는, ‘눈치가 없고 성격이 직무에 맞지 않을 것 같아서’라는 대답이 다수를 차지했다고 한다. 누구에게나 할 말은 하는 거침없고 솔직한 성격은 ‘눈치 없는’ 행동으로 여겨지고, 그런 성격의 ‘여직원’은 적당히 상사의 기분을 맞춰주거나 회사의 부당한 일에도 참을 수 있는 인내심도 없을 것 같다는 얘기이다. 시청자들이 삼순이에 열광했던 것은 일에 대한 자신감과 프로근성, 당당함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업에서 여자 직원에게 원하는 조건은 그런 것이 아니다. 삼순이가 순종적이고 부당한 일을 당해도 맞서 대거리를 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면 기업의 인사담당자들의 평가가 조금은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이제는 여성과 남성의 차별은 모두 없어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잘 보지 않으면 보지 못하는 차별들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사회는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제 사회의 기준으로 볼 때 한국 여성의 지위는 아직도 최하위권에 속한다고 한다. 유엔 개발계획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여성권한척도는 68위로 나타났으며 세계경제포럼 보고에서도 양성평등지수가 58개국 중 54위에 그치고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직 너무 많다. 겉으로는 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도 여성과 남성을 차별하는 사회에서 여성과 남성이 함께 행복해질 수 있으려면 말이다. 여성과 남성이 서로 차이가 있음을 인정해야 하지만 그것이 차별로 작동해서는 여성과 남성 모두 행복해 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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