뚱보, 내 인생 반올림 2
미카엘 올리비에 지음, 송영미 그림, 조현실 옮김 / 바람의아이들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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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음식을 남기지 않고 만든 사람의 정성에 감사하며 맛있게 먹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은 매사에 긍정적이고 삶에 의욕이 넘치는 사람일 것이고, 때가 되었으니 먹기는 먹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덤덤한 얼굴로 께적거리며 먹는 사람을 보면 매사에 냉소적이거나 부정적일 것이다. 전자를 보면 나는 후식으로 과일이라도 깎고 싶어지고 후자를 보면 화가 치밀어서 그만 먹으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어진다. 먹는 것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습성은 나의 선입견인지는 몰라도, 최소한 내가 그동안 만나본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유효했던 것 같다. 하지만 삶에 대한 의욕이 없거나 냉소적이지 않아도 음식을 맛있게 실컷 먹을 수 없게 만드는 적이 있으니, 바로 '비만에 대한 공포감'이다. 남성보다 여성, 나이가 든 사람보다 젊은 사람일수록 이것에서 자유롭기는 힘든 사회적분위기가 이미 형성되어 있다. 비만은 물론 건강에 적신호일 수 있다. 하지만 의학적인 과체중의 척도와는 별도로 '살이 찐 사람'이라는 매우 상대적이며 시각적인(?) 기준은 사회적으로 차별을 받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미카엘 올리비에의 '뚱보. 내 인생'은 처음에 별로 내 관심을 끌지 못했다. 사실 난 먹어도 별로 살이 찌지 않는 체질이라서 '뚱보'라는 단어에 호기심 일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이 책이 사춘기 아이들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는 걸 알게 되어 (내가 쓰고 싶은 동화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읽게 되었다. 마침내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어찌나 재미있던지, 어느새 동화 속 벵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실실 웃고 있는 정신없는(?) 나를 볼 수 있었다. 167.5센티에 90킬로가 넘는 열 여섯 살 벵자멩 쁘와렝은 자신의 뚱뚱한 외모에 경각심이 없다.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요리사)도 있고 학교 생활에서는 '중간이 편하다' 나름대로의 처세술(?)을 가지고 잘 지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클레르라는 여자친구를 좋아하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다이어트를 결심하고 실행에 옮기고 조심스럽게 클레르에게 다가설 수 있는 기회가 생기고...... 그렇다고 다이어트에 성공해서 여자친구의 마음을 사는 뻔한 결말이 아니다. 뚱뚱하다는 이유로 남들이 모를 고충을 겪어야 하는 체력검사를 받는 일, 바지를 사는 일, 수영장에서의 일 등은 독자를 주인공 곁으로, 마치 주인공의 숨소리까지 들리게 만들 정도로 한층 더 빠짝 다가서게 만든다. 벵의 미래를 예견이라도 하듯 뚱보 일가를 이룬 삼촌, 이혼한 아버지와 같이 사는 소피아줌마는 벵의 내면을 더욱 솔직하고, 깊이 있게 풀어가게 함으로써 빛나는 조연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결국 이 이야기가 한 뚱보 소년의 다이어트 성공/실패담이 아니요, 그렇다고 사춘기 아이들의 이성에 대한 미묘한 심리에만 초점을 맞춘 연애이야기가 아닌 아이들의 삶이, 그들의 눈물과 행복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성장소설로의 감동을 느낄 수 있다는 데 매력이 있다.

어른들은 지금 청소년들이 겪는 어려움을- 그것이 입시에 대한 스트레스든, 이성친구와의 문제든, 본인의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든 나중에 언젠가는 다 추억이 될 날이 올 거라는 막연한 희망의 메시지로 대충 위로하려 든다. 하지만 열 여섯의 그 아이들에게는 오직 지금 당면한 그 문제가 인생의 전부이다. 그 문제를 어른의 시각으로 그냥 얼버무리고 덮어둔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직접 부딪혀서 충분히 아프고, 힘겹더라도 다시 털고 일어나야 하는 것은 오직 아이들 그 당사자인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처음으로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고 그것을 나름대로 좋은 관계로 발전시키고자 그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남자아이들과 여자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이성친구를 사귀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이 다를 뿐 아니라, 어느 한 쪽의 강한 의지나 힘만으로는 밀어 부칠 수 없는 각각의 '마음'의 문제이고 둘이라는 '관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짝사랑이나마 어느 누군가가 내 마음에 자리를 잡는다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경험이라는 것을 벵의 이야기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벵은 처음엔 여자아이들이 원하는 이성친구로서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 몸의 요구에 반하는 다이어트를 실행한다. 하지만 클레르와의 돈독한 우정을 기반으로 새로운(벵이 그토록 원하던!) 사랑의 가능성이 펼쳐지는 결말 무렵에서는 이제 더 이상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자신을 확인한다.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닌 자발적이고도 자연스러운 제2의 다이어트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벵은 이미 심리치료사와의 상담 이후 사랑으로 인한 아픔이 자신의 성장에 주는 의미를 깨달았고, 또 소피아줌마의 조언을 통해 한층 더 여유있는 마음으로 클레르를 만나게 되었으므로 (결말이후에나 확인될) 다이어트의 성패는 이미 중요하지 않다. 결국 '사랑'을 통해 성숙할 수 있으려면 자신을 누군가에게 멋진 존재로 보이고 싶게 만드는 간절한 희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인생은 자신만이 책임지고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는 주체적인 자각이 그 어느 것에도 무게가 더 실리지 않은 채 팽팽한 긴장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학창시절을 돌아보아도 그러한 긴장을 가장 치열하고 진지하게 할 수 있는 때가 바로 벵과 클레르 같은 열여섯, 그 시절이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의사들은 정말 아무 것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을 빼는 유일한 비결은 바로 사랑을 하는 건데......' 이제 거의 득도(?)한 듯한 벵의 말 속에서 (체질 때문에 살이 찐다기 보다는) 습관적인 폭식의 뒷면에 존재하는 현대인들의 고독과 소외를 말하고 싶은 작가의 목소리가 느껴진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아니 그 이전에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콤플렉스는 극복된다. 우리나라에도 소아비만의 심각성이 점점 부각되고 있기 때문인지, 등장인물과 음식들의 이름이 아니었다면 프랑스의 소설이라는 것을 깜빡 잊을 정도로 이 소설은 우리 정서에도 거칠 것이 없다. 아마도 먹는 것에 대한 욕구와 이성에 대한 본능적인 호기심, 또 그 둘이 주는 인생에서의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의미가 동서양을 떠나 인간 모두에게(청소년이든, 어른이든)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이리라. 텔레비전과 영화 시나리오 작가, 다큐멘터리 작가라는 경력 때문일까? 작가는 마치 한 편의 드라마를 보여주듯이 경쾌한 대사와 치밀한 심리묘사로 생생한 이미지를 전달한다.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에 이어 '바람의 아이들'에서 펴낸 두 번째 청소년책, 브렌드에 열광(?)하는 청소년들에게 '바람의 아이들'은 확실한 바람을 일으키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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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균형 우리문고 10
우오즈미 나오코 지음, 이경옥 옮김 / 우리교육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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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으로는 아마도 2002년 월드컵으로 온 나라에 붉은 물결이 출렁거릴 때가 아닌가 싶다. 태극전사 중의 패기만만한 선수 한 명이 일약 스타로 떠오르면서, 그에 대한 수식어로 따라다녔던 '쿨'하다는 말. 이제는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어쩌면 칭찬(?)처럼 쓰이게 된 그 단어를 자신의 생활철학으로 삼는 아이가 있다. 나 또한 평소에 '쿨'하게 살고 싶으나, 번번이 '쿨'하지 못한 자신에게 연민의 정을 느껴야 했으므로, 처음부터 난 그 아이의 '쿨'함에 매력을 느꼈다.

중학교 2학년인 주인공 여자아이는 초등학교 5,6학년 시절 같은 반 아이들(유카리 일당)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의 기분을 잘 맞추고, 주위사람들을 웃기기 위해서 신경을 쓰던' 이 아이는 그 때의 끔찍한 경험에서 벗어나고자, 중학교에 들어오면서 두 가지 원칙을 정한다. '첫째, 쿨하게 살아간다. 둘째, 친구를 사귀지 않는다', 즉 자신은 이제 '당하는 쪽이 아니라 (친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친구를 만들지 않는' 쪽을 택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 또한 만만치는 않다. 꼭 필요한 말 이외에는 입을 열지 않으려는 아이도 학교 생활에서는 역시 '튀는' 아이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는 별로 불편하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주인공에게 중학교 2학년인 현재는 단지 물리적인 시간일 뿐, 정신적으로는 늘 2,3년 전의 과거 그 악몽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연히 만난 서른 살의 '사라'를 (소원을 말하면 들어준다는 소문 속의) '초록아줌마'로 착각하게 되고, 위기의 상황에서 전화를 한 것이 계기가 되어 둘은 친해진다.

주인공은 (비록 또래가 아닌 어른이지만) 사라와 친해지고 같이 즐거운 시간을 보냄으로써 학교 생활에서도 '자기 페이스'를 잃지 않고 '신선처럼' 지낼 수 있게 된다. 그런 모습은 현재 같은 반에서 또 다른 따돌림의 피해자가 되어 자살까지 기도한 '미즈에'에게 호감을 갖게 만들어, 둘은 조심스레 진정한 친구로 발전한다. 그런데 주인공이 따돌림의 기억에서 점차 벗어나고 마즈에와 친구가 되어갈 무렵 새롭게 알게 것은, 사라 역시 직장 내에서 '디자이너'로서 인정받지 못해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나름대로 회사를 향해 복수(?)도 하고 있던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3년 전 자신을 괴롭혔던 유리카에게 가끔씩 장난전화를 걸어 복수를 하던 주인공은 이런 사라에게 자신의 경험을 솔직하게 털어놓음으로써 (물론, 이후에 속시원한 반격이라는 직접적인 행동을 통해서) 불행했던 과거를 일단락 짓게 된다. 이제 주인공은 어느 날 우연히 '진짜 초록아줌마'를 만난다고 해도 그 어떤 소원도 말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것이라는 자신감을 얻는 것이다.

간결한 문체에 탁월한 심리묘사로 술술 읽히지만, 빠른 걸음으로 걷다가도 문득 문득 멈추어 서게 하듯 생각할 것이 많은 소설이었다. '집단 따돌림의 상처와 회복'이라는 무거운 주제지만 다양한 갈등과 현실감 있는 묘사 덕분에, 한 아이(개인)의 내면, 한 시대의 단면이 깊이 있고 정확하게 짚어진다. 어쩌면 제목(불균형)이 상징하듯 획일적인 사회의 집단 생활 속에서 개인이 건강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며 자신의 균형감각을 잃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관심을 가지고 읽었건만 주인공의 이름은 끝내 알 수가 없었다. 아마도 작가는 익명성을 보호받고 싶어하는, 눈에 띄지 않고 살고 싶어하는 (어른이건, 아이건 간에) 현대인들의 소망을 간접적으로 나타낸 것이 아닌가 싶다. 주인공은 이제 15살이다. 세상을 단정하기에 아직은 어린 나이다. 하지만 사라에게서 '겨울잠을, 죽을 때까지 쭉 겨울잠만 자고 싶다'는 말을 듣고 아이는 자신의 미래를 생각한다. '이대로 가면 어른이 되어도 별다른 미래가 펼쳐지지 않을 것이란 걸' 이미 알고 있는 자신을 새삼 확인하면서. 또 '사라와는 산뜻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 그게 즐겁다.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는 걸 한 번 털어놓으면 끝도 없이 질척질척해질까 봐 두렵다' 고 망설이는 주인공은 도저히 열다섯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열다섯이면 어떻고, 서른이면 어때야 한다는 것도 나의 선입견에 지나지 않았다. 상처를 가진 사람은, 아니 아직도 자신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사람은 끊임없이 '쿨'하게 살기를 소원한다. '쿨'하게 사는 사람만이,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조차 두려운 아픔을 가진 사람만이 또 다시 '쿨'하기를 시도하는 옆 사람을 알아본다. 그렇게 '쿨'한 인생들이 서로를 알아보면 그 때 비로소 '쿨'함의 미덕은 철저하게 무너진다. 15살 소녀의 '쿨'함에 산뜻하게 끌렸지만 결국은 내 안에도 누군가를 '질척하게' 만나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음을 확인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눈 마주보며 이야기를 꺼내면 당황스러워하지만, 채팅(메일)으로는 거칠 것이 없는 요즘 아이들, 서른이나 다를 바 없는 열다섯 그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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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 (반양장) 반올림 1
이경혜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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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마음 속에 품고 잊지 않으면 그 사람은 죽은 게 아니라고, 우리 마음 속에 살아 있는 거라고......웃기는 소리다. 마음을 달래느라 만들어 낸 수많은 거짓 위로 중에서도 가장 짜증나는 말이다. 차라리 재준이가 완벽하게 사라졌다는 사실을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 나 또한 언젠가는 그렇게 씻은 듯이 사라질 거라는 사실을......"

그렇다. 우리는 자신없는 대목에서 둘러대기 바쁘다. 그것이 위로든, 질책이든, 교훈이든...아이들에게 뭔가 의미있는 말을 남기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것이(꼭 '죽음'에 대한 것이 아니더라도) 얼마나 부질없고도 부끄러운 노릇인가가 이 책에서는 잘 드러난다. 열 여섯의 두 아이가 있다. 친엄마, 새아빠, 성(姓)이 다른 어린 동생과 함께 살기에 누가 봐도 문제가 있을 법한 '반항아' 유미, 그리고 엄격한 아빠와 몸이 약한 엄마, 남동생과 함께 누가 봐도 별 문제 없는 가정을 가진 '모범생' 재준이. 그러나 어느 날 오토바이 사고를 당해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은 재준이고, 이로인해 큰 충격과 혼란에 빠진 것은 유미다. 그러한 유미에게 재준의 엄마는 재준이가 남긴 일기장을 건네주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처음에는 머뭇거리며 그 일기장을 펼치기조차 힘들어하던 유미가 결국 그 일기장을 한 장 한 장 읽어 가면서 재준이의 죽음을 인정하고, 둘 사이의 우정을 확인하면서 온전히 떠나보내는 것으로 이야기는 맺는다.

어쩌면 단순할수도 있는 줄거리지만 이 속에는 가정, 학교, 학원이라는 일상 속에서 빚어지는 사춘기 아이들의 갈등과 감성이 매우 섬세하게 그려져있다. 가장 사랑하는 친구의 죽음이라는 극적인 사건을 되새기는 과정에서 유미의 닫혔던 마음은 세상과 화해하게 된다. 처음엔 (소희라는, 재준이가 짝사랑하는 여학생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재준이 오토바이를 배운 것이기에) 소희를 원망하고, 그 죽음의 시간에 겉멋에 들린 문자나 날렸던 자신을 괴로워하지만, 일기장을 덮을 때는 '재준의 짧은 생에 그처럼 어여쁜 사랑'을 느낄 수 있게 해 준 소희가 고맙고, 자신도 문자의 마지막에 (물론 그 때는 작별인사일 줄 몰랐지만) '잘자'를 썼다는 것을 생각해내서 안도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재준이 '그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의 마음 속에 도저히 파낼 수 없는 무거운 사랑을 남기고 떠났다는 것'을 깨달아 눈물을 흘리며 작별의 인사를 고하는 마지막 부분은 '삐딱이' 유미의 마음이 이제 얼마나 따뜻하고 깊어졌는지를 느끼게 해 준다.

 어린 나이에 어이없이 사라져 간 소년들에게 글 속에서나마 아늑하고 평화로운 시간을 누리게 해 주고 싶었다던 작가의 말처럼 이 소설은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무겁지 않고 어둡지 않다. 첫사랑에 실패해서 늘 멍하니 정신을 딴데 두고 다니는 담임선생님이나 유미가 부르는 '새아빠'라는 호칭이 합리적이라며 칭찬해 주는 새아빠처럼 개성있는 인물들과 아이들의 입말을 살린 편안한 문체가 읽는 재미을 더한다. 솔직히 그동안 중학교 아이들에게 권할 만한 우리나라 소설이 별로 없다고 느꼈다. 동화는 아이들이 표지만 보고는 시시하다고 느끼고, 기성작가의 성장소설은 세대차이 때문일까? 사실 요즘 아이들이 공감하기는 어려운 작가 개인의 정서와 과거사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서야 비로서 아이들이 물어볼 때, 아니 물어보기 전에라도 나는 이 소설을 꼭 읽어 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나도 한 번 권하고 싶다. "얘들아, 너희도 재준이처럼 시체놀이 한 번 해 보지 않을래? 지금처럼 사는 게 재미없고 시시하다고 느껴질 때는 말이야...그리고나서 오늘 일기장에 한 번 써 보는 거야.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 내 죽음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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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구스 크루 사계절 1318 문고 41
신여랑 지음 / 사계절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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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99%의 노력과 1%의 영감으로 만들어 진다’는 말이 있다. 그 말에 동의하는가? 만약 동의한다면 당신은 진짜 천재를 아직 못 만났기 때문이다. 혹은 자신이 천재가 될 수도 있다는 산뜻한 희망을 가진 당신, 아직까지 진정한 절망을 맛보지 않았기에 행복하다.

반대로 천재는 99%의 영감과 1%의 노력, 아니 99%까지는 아니더라도 85%이상은 타고난 재능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생각으로 좌절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천재를 만난 적이 있다. 그것도 아주 가깝게. 그 천재 때문에 자신의 천재성에 대해 품었던 실낱같은 희망이 산산이 부서져 그를 시기하고, 증오하고, 신을 원망해 본 당신, 난 그 이에게 이 책에 권하고 싶다.


신여랑의 ‘몽구스 크루’, 비보이를 소재로 했기에 참신하다고, 요즘 아이들의 문화와 입맛을 잘 맞춘 청소년 소설이라고 주목 받는다. 하지만 비보이는 소재일 뿐. 작가도 서문에서 이야기 했듯이, 나는 이 소설을 철저하게 열등감에 대한 이야기로 읽었다. 책을 읽는 내내 작가 자신이 이제까지 몽구로 살아왔음을, 그리고 지금 역시 몽구처럼 수줍고 조심스럽게 우리 앞에 서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진구는 춤을 잘 춘다, 몽구스 크루의 다른 멤버가 아무리 춤을 잘 춰도 진구를 따라 갈 수는 없다. 그런 진구가 되기까지 얼마나 열심히 연습을 했느냐 안 했느냐는 알 수 없다. 아니 어쩌면 그 과정은 중요하지 않다. 진구는 천재니까. 진구는 무대에만 나서면 카리스마를 내뿜는다. 유연하면서도 강한 동작으로 비트와 하나 되어 청중의 눈길과 호흡을 사로잡는다. 춤의 달인이다.

그런 진구를 형으로 둔 동생 몽구, 몽구는 형을 형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다른 이들이 자신을 ‘비보이 나인’의 동생으로 부르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형을 감시하라는 엄마의 부탁으로 ‘몽구스 크루’에 들어갔지만 춤을 추면서, 진구 춤의 진가를 보게 되면서 형이 밉다. 춤만으로도 충분히 밉고, 볼 때마다 괴로운데 거기에 한 술 더 떠 사랑마저도 진구의 몫이다. 진내인, 몽구스 크루에 들어온 비걸, 도발적이면서도 어딘가 여린 구석이 있어서 몽구의 마음을 온통 휘저어 버린 그 애가 진구를 사랑한다. 진구가 그녀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선 것도 아닌데, 그녀가 진구를 사랑한다. 그럼 그렇지, 가진 놈은 다 갖고 없는 놈은 마지막으로 남겨 두고픈 하나까지도 끝내 빼앗겨 버리는 것이 비극의 전형 아닌가!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결말은 해피엔딩이다. 진구가 다른 비보이 클럽에 들어갔다가 불화가 생겨 이탈하면서 괴로워하자 몽구는 진구를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진구의 인간적인 나약함에 연민을 느끼게 된 몽구는 ‘몽구스 크루’의 자존심을 만회할 대회를 준비하면서 뼈가 으스러지게 연습한다. 그리고 몽구는 결국 해낸다. 작은 대회긴 하지만, 다른 이들은 ‘허접한 상’이라고 비웃을지 몰라도 자신의 갈고 닦은 실력을 인정받는 계기이기에 더 없이 소중하고 뿌듯한 상을 받게 된다. 비로소 진구와 내인의 사랑도 축하해 줄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다. 내인을 향한 짝사랑의 온기가 아직은 몽구의 마음을 덥게 하지만 말이다.


책을 읽는 내내 몽구를 이해하고 공감하면 할수록, 내 안에 숨겨 둔 열등감을 확인하기에 마음이 불편하다. 열등감을 가진 이들끼리 연대감을 느끼는 것은 내 상처도 버거운데, 타인의 상처를 만나는 것이기에 반갑지만도 않다. 작가는 열등감을 가진 이들을 위로하고 싶어서 이 글을 썼고, 바로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이 글을 썼을 것이다.

그렇다면 몽구는 진구에게 품었던 열등감에서 해방되었을까? 작가가 첫 책을 세상에 내어 놓으면서 느끼는 불안함과 두려움처럼 몽구도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느낄 것이다. 춤도 시작이고, 글도 시작이고, 어쩌면 몽구와 작가는 더 큰 열등감의 세계로 첫발을 내딛었는지 모른다. 그 전보다 겨뤄야할 사람이 더 많아지고, 넘어서려면 더욱 고통스런 노력이 필요한 ‘진짜’들이 모인 세계로.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작가와 몽구에게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 몸부림치게 만든 열등감, 그 작은 씨앗은 지금 열매를 맺어 다른 이에게 또 다른 열등감의 씨앗을 품게 한다는 것을.

사는 게 다 그만 그만해 보이고, 무슨 일이 제일 재미있는지, 내가 뭘 가장 잘 할 수 있는지 몰라서 답답하기만 한 당신, 혹시 열등감을 느낀 적이 있는가? 나는 해도 안 되는데 그토록 샘이 나는 누군가에게는 ‘무엇’이 있음을 본 적이 있는가? 거기에서 출발하라. 그를 더욱 시기하라, 질투가 힘이 되게 하라. 간절한 구함, 그 곡진함이 기적처럼 1%의 영감을 주는 날, 그대는 99%의 노력을 미친 듯이 쏟아 내리라. 기필코 당신 이름으로, 누군가의 가슴에 열등감의 씨앗 하나 품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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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 없는 마을 - 외국인 노동자, 코시안, 원곡동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국경 없는' 이야기
박채란 글 사진, 한성원 그림 / 서해문집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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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이제 올 겨울만 지나면 큰 아이가 초등학생이 된다. 마음이 급한 이웃 엄마들 중 몇몇은 진작에 아이 방을 바꿔 주었다. 새로 산 아이용 침대와 책상, 벽면으로는 책이 가득 꽂힌 책꽂이. 파스텔 톤으로 방이 바뀐 그 집 아이는 학교에 갈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하지만  두 달 후면 학교에 간다는 압력(?)만 있을 뿐, 우리 집은 새로 산 가구가 없어서일까? 딸아이는 학교 가는 것을 전혀 즐거워하지 않는다. '이래선 안 되겠다, 나도 뭔가 아이의 방에 변화를 주어야지' 하고 산 것이 세계지도였다.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어 방 한쪽 면에 어린이용 세계 지도를 붙이고 나니, 아이보다도 내가 더 흐뭇하다. '5년 후면 둘째도 좀 클 테니까 미국에 있는 시누이 집에 가 볼 수 있겠지? 그 다음엔 프랑스에 사는 친구 집에 놀러가서 유럽 여행도 하고 싶은데, 10년 내에는 가능할까?'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내 눈길이 머무는 곳은 지도에서도 미국이나 유럽 쪽이다. '부끄러운' 고백을 하건대 방글라데시나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파키스탄 등에는 눈이 가지 않았다. 가깝지만 너무 멀었다. 같은 땅(아시아)에 사는 이웃이라고 하기엔 내 마음의 국경이 너무나 높고 견고했다.

 '국경 없는 마을(박채란 글, 서해문집)'은 아기자기한 표지 그림부터 친근함이 묻어 났다. '외국인 노동자, 코시안, 원곡동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국경 없는 이야기'라는 부제는 '원곡동'이라는 단어 때문이었을까? 고등학교 때 읽었던 양귀자의 소설 '원미동 사람들'을 떠올리게 했다. 물론 원곡동은 원미동보다 훨씬 더 가난하고 위태로웠다. 하지만 그 시절 원미동 사람들처럼, 지금 원곡동 사람들도 땀과 눈물, 희망과 웃음을 모두 가진 평범한 우리의 이웃이었다. 이 책을 펼치는 순간, '불법체류자'라는 우리 사회 인권의 사각지대, 그 벼랑 끝에서도 '희망'이라는 풀뿌리를 놓지 않고 살아가는 원곡동 사람들의 목소리가 하나 둘씩 들리기 시작했다.

  집을 나간 엄마(아내)를 가슴에 묻은 채 내일이면 고향 인도네시아로 떠나는 여섯 살 띠안과 그 아빠, <코시안의 집>에서 (부모가 불법체류자라는 이유로 제복을 입은 사람만 봐도 눈치를 보는) 아이들의 공부를 도와 주면서 훗날 그들의 기억 속에 따뜻한 한국이 떠오르기를 바라는 김주연선생님, 오른손이 프레스에서 으스러졌던 아픔을 겪은 친구 '초리'를 두고 혼자서만 고향 우즈베키스탄으로 떠나야 하는 '누리끼', <안산외국인노동자센터>에서 7년째 쉼터지기를 하며 쉼터 사람들에게 야박한 소리를 해야할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지만 그렇다고 쉽사리 센터를 떠나지 못하는 재호아저씨, 학교에서 아이들과 싸울 일이 생겨도 어렵게 들어온 학교를 쫓겨나게 될까봐 먼저 사과를 해야 하는 안산 최초의 몽골인 중학생 따와,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만 믿고 남편과 함께 이 곳에 왔지만 결국 '남은 것은 몸과 마음의 상처와 아직도 다 갚지 못한 200만원의 빚뿐'이라는 조선족 아주머니 김복자씨, 작업장 안에서는 정리해고 0순위가 될까봐 숨을 죽이는 외국인 노동자이지만, 퇴근 후에는 영화감독의 꿈을 키우며 돈보다는 외국생활의 경험을 더 소중히 여기는(월드컵을 보기 위해서 2달 동안 직장까지 그만 두었다는) 아름다운 청년 재키.
 
  쉽고 간결한 구어체로 씌어졌기 때문일까? 초등학교 고학년 이상이라면, 특히 인권을 말하기 시작하는 청소년들이라면 충분히 재미있게 읽을 만하다. 7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연작 동화처럼, 각각의 이야기는 (내가 읽는 것이 아니라) 내 앞에 마주 앉은 그들이 각자의 육성으로 자신의 말을 하는 양 생생하다. 분명 표지에는 한 사람의 필자 이름이 적혀 있는데 말이다. 무엇엔가 홀린(?) 듯한, 그 신기함의 비결은 에필로그에서 밝혀졌다. '국경 없는 마을, 그 입구에서 출구까지'라는 제목의 에필로그는 8번째 단편으로 보는 것이 온당하다. 김주연 선생님이나 재호 아저씨처럼 '내국인'의 신분으로 원곡동에서 한달 넘게 그들과 같이 살았던 필자의 이야기가 내겐 그 어떤 이야기보다도 감동적이었다. 단순히 책을 쓰기 위해서 만나고 인터뷰를 한 것이 아니라, 그들과 '친구가 되고 싶다'는 간절함이 있었기에 치를 수밖에 없었던 필자의 가슴앓이는 독자에게 충분한 호소력이 있다. 필자가 거쳤던 험난한 마음 길은 독자가 이 책을 통해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선입견, 그 마음의 벽을 허물고 그들을 우리의 이웃, 내 아이의 친구로 받아들이는 과정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찬바람이 부는 원곡동을 떠나는 필자와 함께 아쉬운 마음으로 책장을 덮을 무렵이면, '원곡동 사람들도 나처럼 외롭고 슬프고 이기적인, 그러나 법적으로는 나처럼 보호받아 마땅한 인간'이라는 그녀의 깨달음에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나도 다시 우리 동네로 돌아왔다. 10년 가까이 살면서도 불편함이 없다던 한 이웃은 드디어 큰 아이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강남 입성'을 결정했다. 나처럼 초등학교 학부모가 될 엄마들 중에도 '행여나, 영구임대아파트에 사는 아이들과 내 아이가 절친한 친구가 될까' 두려워 취학통지서가 나오기 전에 서둘러 주소지를 옮긴다. 그렇게 해서 한 동네에서도 특정한 학교에 아이들이 모이다 보니 내 아이가 다닐 학교의 학급당 인원수가 (인근 다른 학교보다) 10명 이상 많아졌다고, 나 또한 그들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그렇다. 우리도 이렇게 순간 순간 남보다 더 나은 조건과 기회를 원한다. '코리안 드림'은 외국인 노동자(불법 체류자)만 가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가 '꿈'을 가지고 산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기대하는 사람, 나보다는 더 나은 자식의 미래를 희망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들의 꿈 꿀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 나아가 그 꿈을 위해 우리를 이웃이라고 믿고 여기까지 찾아 온 그들에게 우리는 친구가 되어 줄 '의무'가 있다.

  학교를 들어가는 순간, 아이는 세상을 향해 첫발을 내딛는다. '돈이나 외모로 사람의 우열을 가리지 않는 것, 피부색이나 언어의 '다름'을 차별의 이유로 삼지 않는 것, 내가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도 배려하고 존중하는 것, 친구를 사귀기 위해서는 기꺼이 내가 먼저 마음을 열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 '국경 없는 마을(원곡동) 사람들'을 만나고 나니 아이에게 가르칠 것은 분명해졌다. 벽에 붙은 세계지도를 보면서 언젠가는 내 아이와 친구가 될 지도 모르는 원곡동 아이들, 그 아이들의 고향도 짚어보게 해야겠다. 아이는 분명히 학교라는 곳을 기대하게 되리라. 그 곳에서 만날 많은 친구들과 무엇을 하고 놀까, 벌써부터 고민하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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