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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들 주세요 ㅣ 사계절 중학년문고 2
앤드루 클레먼츠 지음, 양혜원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사계절 / 2001년 12월
평점 :
책장을 덮으면서 행복하다는 느낌으로 가득찼다. "아, 이런 거구나.....책을 읽으면서 .재미와 감동이 모두 있다는 게 바로 이런 거구나" 싶었다. 어쩌면 이런 이야기가 있을 수가, 내가 진작에 꼭 읽었어야 할 이야기를 이제야 발견한 것이 아쉽게만 느껴졌다.(원본은 1996년에 씌여졌고 번역본은 2001년판이다, 물론 아직도 이 책을 모르는 많은 학생과 교사들이 있다) 아무래도 제목이 너무 약했다, '프린들 주세요'라니. 알아듣지도 못할 제목에 호기심을 느끼고 찾아 읽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 책은 출간하는 즉시 전국의, 아니 전세계의 국어교사 필독서라고 일간지마다 대문짝만하게 광고를 했어야 했다. 국어를 별 재미없이, 의무감만으로 배워왔던 초등학교 고학년들이나 중학생들에게 필독서임은 물론이요, 국어교사라면 이 책을 읽은 즉시 국어교과서의 보조교재-'언어의 사회성'과 '문학의 효용성'을 동시에 가르칠 수 있는 훌륭한 교재-로 선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학생이든 선생이든 책장을 덮고 나면, 마지막엔 모두 나처럼 말하게 것이다. "이제부터 내가 가장 존경하는 국어선생님은 바로 그레인저 선생님이라고."
작가 '앤드루 클레먼츠'의 약력을 보니 아니나 다를까 공립학교에서 7년간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러면 그렇지, 교사가 아니고서는 이렇게 실감나게 교실(수업) 상황을 그릴 수는 없다 싶었다. 아이들과 선생의 줄다리기는 아마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교까지 모두 같은 양상일 것이다. '어떻게 하면 수업을 안 하고(혹은 조금이라도 덜 하고) 놀아 볼까,'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아이들과 그런 아이들의 본능적 욕구와 유혹에도 흔들림 없이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분량의 진도를 나가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무장된 교사의 팽팽한 줄다리기 말이다. 물론 내 경우에는 항상 아이들과의 싸움에서 역부족이었다. 준비된 작전으로 교묘하게 내 수업의 틈새를 파고드는 한 녀석이든, 날을 잡아서 날씨 탓 분위기 탓 감정 탓 등을 하면서 떼거리로 억지를 쓰는 녀석들이건 간에 난 아이들의 집요함을 단박에 잘라낼 수 있는 '칼'이 없었다. 따라서 이미 본인에게 '칼있스마'(?)가 있는 선생님이라면 나처럼 이렇게 단숨에 그레인저 선생님의 추종자가 되지는 않을런지도 모른다. 또 하나 내가 존경하는 점, 그레인저 선생님은 철저한 '프로'였다. 아마추어와 프로의 세계는 다르다. 난 늘 프로의식을 가진 교사가 되기를 소원한다. 하지만 결과는 항상 아마추어 수준에 그치고 말았다. 주변에서도 연륜이 쌓인 훌륭한 선생님들은 (자신의 인간적인 감정을 절제하고) 매 순간 아이들 입장에서 정말 필요한 말과 행동이 무엇인지를 안다. 그리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다. 배우가 작품에 따라 각기 다른 배역을 할 수 있듯이, 교사도 상황에 따라, 또 아이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얼굴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니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난 '아이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든 나의 진심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그럴 듯한 이유로 결정적인 순간에도 나의 인간적인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배역이 달라져도 늘 내 표정과 말투는 동일했고, 그건 결국 아이들에게 (나는 너희를 이해하고 지도할 역량이 부족하니) 차라리 '너희가 미숙한 선생을 이해하라'는 숙제를 남기는 것이었다. 되새기고 비교해 볼수록 아이들 앞에서 교사로서의 내 처신은 부끄럽기만 하다.
하지만 그레인저 선생님은 달랐다. 자신만의 확고한 신념이 있고 지혜와 열정이 있었기에 교사로서 진정한 프로였다. 고리타분한 교실에서 세상으로 '언어'를 들고 나온 제자들의, 그 도발적인 실험과 모험에 생기를 불어넣고자 자신은 기꺼이 악역을 맡는다. 만약 그레인저 선생님의 악역이 없었다면 아마도 링컨초등학교의 아이들은 그렇게도 그 일(볼펜을 프린들로 바꾸어 부르는 일)에 열광하지 않았을 것이다.(물론 그 이후에 사태가 커진 것에는 매스컴의 영향이 크지만, 사건 초반의 원동력은 닉과 그레인저 선생님 사이의 팽팽한 긴장과 대립이다.) 금지된 것에 더 매력을 느끼고 동조하게 되는 아이들의 심리를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그레인저 선생님이었기에 이러한 배후조종이 가능했던 것이다. 닉의 승리, 아니 언어의 사회성을 철저히 깨뜨리고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낸 발칙한 아이들의 승리에 박수를 보내고 싶어질 때쯤 일어나는 반전은 감동, 그 자체다. 단순히 소설 구성상의 반전을 넘어 이 작품의 주제가 은은히 빛을 발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실제 삶 속에서 주체적으로, 창의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노교사의 혜안이, 제자들에 대한 진한 사랑이 가슴을 울린다. 그리고 닉과 그레인저 선생님 두 사람의 마음에 다리가 놓아지는 순간이다. 아니, 이미 10년 전에 놓아졌던 다리에 소박하지만 성대한 준공식(?)이 거행되는 순간인 것이다.
아, 지금 이 글을 쓰다 말고 나는 영어사전에서 프린들(frindle)을 찾아보았다. 동화 속 이야기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왠지 정말 그 단어가 있을 것 같은(이 이야기가 실제 이야기일 것 같은) 착각이 생겨, 내 손으로 사전을 찾고 내 눈으로 확인을 해 본 것이다. 그리고나니, 왜 이렇게 허전한 것일까? '프린들'이 혹시 내 사전에만 빠진 것이 아닐까 불안하기까지 하다. '포스트잇'으로라도 '프린들'을 써서 사전에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만들어 주고 싶다. 이 사회의 관습과 권위에 도전하는 '닉'과 같은 아이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는 기성세대에겐 골칫거리로 떠오르는 그 아이들이 결국은 뭔가를 변화시키고 만들어 낼 것임을 확신한다. 이 확신이 나의 고단한 일상사와 교사라는 체제유지적인 속성으로 말미암아 흐려지려고 할 때, 나는 내 영어사전의 '프린들'이라는 글씨를, 내 손으로 써 넣은 글씨를 확인하고 싶다. '프린들'은 더 이상 볼펜이 아니다. 책 속에서 폴짝 뛰어나와 내게 곤혹스런 질문을 할 것 같은 똑똑한 개구쟁이 '닉'의 다른 이름이요, 내가 교단을 떠나는 날까지 기억하고 따라야 할 '그레인저 선생님'의 다른 이름이다. 교육에 희망을 걸어야 하는 이유, 교사와 학생의 관계가 아름다운 이유 '프린들'을 나만의 사전에 꾹꾹 눌러 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