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균형 우리문고 10
우오즈미 나오코 지음, 이경옥 옮김 / 우리교육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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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내 기억으로는 아마도 2002년 월드컵으로 온 나라에 붉은 물결이 출렁거릴 때가 아닌가 싶다. 태극전사 중의 패기만만한 선수 한 명이 일약 스타로 떠오르면서, 그에 대한 수식어로 따라다녔던 '쿨'하다는 말. 이제는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어쩌면 칭찬(?)처럼 쓰이게 된 그 단어를 자신의 생활철학으로 삼는 아이가 있다. 나 또한 평소에 '쿨'하게 살고 싶으나, 번번이 '쿨'하지 못한 자신에게 연민의 정을 느껴야 했으므로, 처음부터 난 그 아이의 '쿨'함에 매력을 느꼈다.

중학교 2학년인 주인공 여자아이는 초등학교 5,6학년 시절 같은 반 아이들(유카리 일당)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의 기분을 잘 맞추고, 주위사람들을 웃기기 위해서 신경을 쓰던' 이 아이는 그 때의 끔찍한 경험에서 벗어나고자, 중학교에 들어오면서 두 가지 원칙을 정한다. '첫째, 쿨하게 살아간다. 둘째, 친구를 사귀지 않는다', 즉 자신은 이제 '당하는 쪽이 아니라 (친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친구를 만들지 않는' 쪽을 택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 또한 만만치는 않다. 꼭 필요한 말 이외에는 입을 열지 않으려는 아이도 학교 생활에서는 역시 '튀는' 아이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는 별로 불편하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주인공에게 중학교 2학년인 현재는 단지 물리적인 시간일 뿐, 정신적으로는 늘 2,3년 전의 과거 그 악몽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연히 만난 서른 살의 '사라'를 (소원을 말하면 들어준다는 소문 속의) '초록아줌마'로 착각하게 되고, 위기의 상황에서 전화를 한 것이 계기가 되어 둘은 친해진다.

주인공은 (비록 또래가 아닌 어른이지만) 사라와 친해지고 같이 즐거운 시간을 보냄으로써 학교 생활에서도 '자기 페이스'를 잃지 않고 '신선처럼' 지낼 수 있게 된다. 그런 모습은 현재 같은 반에서 또 다른 따돌림의 피해자가 되어 자살까지 기도한 '미즈에'에게 호감을 갖게 만들어, 둘은 조심스레 진정한 친구로 발전한다. 그런데 주인공이 따돌림의 기억에서 점차 벗어나고 마즈에와 친구가 되어갈 무렵 새롭게 알게 것은, 사라 역시 직장 내에서 '디자이너'로서 인정받지 못해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나름대로 회사를 향해 복수(?)도 하고 있던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3년 전 자신을 괴롭혔던 유리카에게 가끔씩 장난전화를 걸어 복수를 하던 주인공은 이런 사라에게 자신의 경험을 솔직하게 털어놓음으로써 (물론, 이후에 속시원한 반격이라는 직접적인 행동을 통해서) 불행했던 과거를 일단락 짓게 된다. 이제 주인공은 어느 날 우연히 '진짜 초록아줌마'를 만난다고 해도 그 어떤 소원도 말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것이라는 자신감을 얻는 것이다.

간결한 문체에 탁월한 심리묘사로 술술 읽히지만, 빠른 걸음으로 걷다가도 문득 문득 멈추어 서게 하듯 생각할 것이 많은 소설이었다. '집단 따돌림의 상처와 회복'이라는 무거운 주제지만 다양한 갈등과 현실감 있는 묘사 덕분에, 한 아이(개인)의 내면, 한 시대의 단면이 깊이 있고 정확하게 짚어진다. 어쩌면 제목(불균형)이 상징하듯 획일적인 사회의 집단 생활 속에서 개인이 건강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며 자신의 균형감각을 잃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관심을 가지고 읽었건만 주인공의 이름은 끝내 알 수가 없었다. 아마도 작가는 익명성을 보호받고 싶어하는, 눈에 띄지 않고 살고 싶어하는 (어른이건, 아이건 간에) 현대인들의 소망을 간접적으로 나타낸 것이 아닌가 싶다. 주인공은 이제 15살이다. 세상을 단정하기에 아직은 어린 나이다. 하지만 사라에게서 '겨울잠을, 죽을 때까지 쭉 겨울잠만 자고 싶다'는 말을 듣고 아이는 자신의 미래를 생각한다. '이대로 가면 어른이 되어도 별다른 미래가 펼쳐지지 않을 것이란 걸' 이미 알고 있는 자신을 새삼 확인하면서. 또 '사라와는 산뜻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 그게 즐겁다.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는 걸 한 번 털어놓으면 끝도 없이 질척질척해질까 봐 두렵다' 고 망설이는 주인공은 도저히 열다섯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열다섯이면 어떻고, 서른이면 어때야 한다는 것도 나의 선입견에 지나지 않았다. 상처를 가진 사람은, 아니 아직도 자신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사람은 끊임없이 '쿨'하게 살기를 소원한다. '쿨'하게 사는 사람만이,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조차 두려운 아픔을 가진 사람만이 또 다시 '쿨'하기를 시도하는 옆 사람을 알아본다. 그렇게 '쿨'한 인생들이 서로를 알아보면 그 때 비로소 '쿨'함의 미덕은 철저하게 무너진다. 15살 소녀의 '쿨'함에 산뜻하게 끌렸지만 결국은 내 안에도 누군가를 '질척하게' 만나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음을 확인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눈 마주보며 이야기를 꺼내면 당황스러워하지만, 채팅(메일)으로는 거칠 것이 없는 요즘 아이들, 서른이나 다를 바 없는 열다섯 그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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