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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 없는 마을 - 외국인 노동자, 코시안, 원곡동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국경 없는' 이야기
박채란 글 사진, 한성원 그림 / 서해문집 / 2004년 11월
평점 :
12월, 이제 올 겨울만 지나면 큰 아이가 초등학생이 된다. 마음이 급한 이웃 엄마들 중 몇몇은 진작에 아이 방을 바꿔 주었다. 새로 산 아이용 침대와 책상, 벽면으로는 책이 가득 꽂힌 책꽂이. 파스텔 톤으로 방이 바뀐 그 집 아이는 학교에 갈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하지만 두 달 후면 학교에 간다는 압력(?)만 있을 뿐, 우리 집은 새로 산 가구가 없어서일까? 딸아이는 학교 가는 것을 전혀 즐거워하지 않는다. '이래선 안 되겠다, 나도 뭔가 아이의 방에 변화를 주어야지' 하고 산 것이 세계지도였다.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어 방 한쪽 면에 어린이용 세계 지도를 붙이고 나니, 아이보다도 내가 더 흐뭇하다. '5년 후면 둘째도 좀 클 테니까 미국에 있는 시누이 집에 가 볼 수 있겠지? 그 다음엔 프랑스에 사는 친구 집에 놀러가서 유럽 여행도 하고 싶은데, 10년 내에는 가능할까?'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내 눈길이 머무는 곳은 지도에서도 미국이나 유럽 쪽이다. '부끄러운' 고백을 하건대 방글라데시나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파키스탄 등에는 눈이 가지 않았다. 가깝지만 너무 멀었다. 같은 땅(아시아)에 사는 이웃이라고 하기엔 내 마음의 국경이 너무나 높고 견고했다.
'국경 없는 마을(박채란 글, 서해문집)'은 아기자기한 표지 그림부터 친근함이 묻어 났다. '외국인 노동자, 코시안, 원곡동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국경 없는 이야기'라는 부제는 '원곡동'이라는 단어 때문이었을까? 고등학교 때 읽었던 양귀자의 소설 '원미동 사람들'을 떠올리게 했다. 물론 원곡동은 원미동보다 훨씬 더 가난하고 위태로웠다. 하지만 그 시절 원미동 사람들처럼, 지금 원곡동 사람들도 땀과 눈물, 희망과 웃음을 모두 가진 평범한 우리의 이웃이었다. 이 책을 펼치는 순간, '불법체류자'라는 우리 사회 인권의 사각지대, 그 벼랑 끝에서도 '희망'이라는 풀뿌리를 놓지 않고 살아가는 원곡동 사람들의 목소리가 하나 둘씩 들리기 시작했다.
집을 나간 엄마(아내)를 가슴에 묻은 채 내일이면 고향 인도네시아로 떠나는 여섯 살 띠안과 그 아빠, <코시안의 집>에서 (부모가 불법체류자라는 이유로 제복을 입은 사람만 봐도 눈치를 보는) 아이들의 공부를 도와 주면서 훗날 그들의 기억 속에 따뜻한 한국이 떠오르기를 바라는 김주연선생님, 오른손이 프레스에서 으스러졌던 아픔을 겪은 친구 '초리'를 두고 혼자서만 고향 우즈베키스탄으로 떠나야 하는 '누리끼', <안산외국인노동자센터>에서 7년째 쉼터지기를 하며 쉼터 사람들에게 야박한 소리를 해야할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지만 그렇다고 쉽사리 센터를 떠나지 못하는 재호아저씨, 학교에서 아이들과 싸울 일이 생겨도 어렵게 들어온 학교를 쫓겨나게 될까봐 먼저 사과를 해야 하는 안산 최초의 몽골인 중학생 따와,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만 믿고 남편과 함께 이 곳에 왔지만 결국 '남은 것은 몸과 마음의 상처와 아직도 다 갚지 못한 200만원의 빚뿐'이라는 조선족 아주머니 김복자씨, 작업장 안에서는 정리해고 0순위가 될까봐 숨을 죽이는 외국인 노동자이지만, 퇴근 후에는 영화감독의 꿈을 키우며 돈보다는 외국생활의 경험을 더 소중히 여기는(월드컵을 보기 위해서 2달 동안 직장까지 그만 두었다는) 아름다운 청년 재키.
쉽고 간결한 구어체로 씌어졌기 때문일까? 초등학교 고학년 이상이라면, 특히 인권을 말하기 시작하는 청소년들이라면 충분히 재미있게 읽을 만하다. 7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연작 동화처럼, 각각의 이야기는 (내가 읽는 것이 아니라) 내 앞에 마주 앉은 그들이 각자의 육성으로 자신의 말을 하는 양 생생하다. 분명 표지에는 한 사람의 필자 이름이 적혀 있는데 말이다. 무엇엔가 홀린(?) 듯한, 그 신기함의 비결은 에필로그에서 밝혀졌다. '국경 없는 마을, 그 입구에서 출구까지'라는 제목의 에필로그는 8번째 단편으로 보는 것이 온당하다. 김주연 선생님이나 재호 아저씨처럼 '내국인'의 신분으로 원곡동에서 한달 넘게 그들과 같이 살았던 필자의 이야기가 내겐 그 어떤 이야기보다도 감동적이었다. 단순히 책을 쓰기 위해서 만나고 인터뷰를 한 것이 아니라, 그들과 '친구가 되고 싶다'는 간절함이 있었기에 치를 수밖에 없었던 필자의 가슴앓이는 독자에게 충분한 호소력이 있다. 필자가 거쳤던 험난한 마음 길은 독자가 이 책을 통해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선입견, 그 마음의 벽을 허물고 그들을 우리의 이웃, 내 아이의 친구로 받아들이는 과정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찬바람이 부는 원곡동을 떠나는 필자와 함께 아쉬운 마음으로 책장을 덮을 무렵이면, '원곡동 사람들도 나처럼 외롭고 슬프고 이기적인, 그러나 법적으로는 나처럼 보호받아 마땅한 인간'이라는 그녀의 깨달음에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나도 다시 우리 동네로 돌아왔다. 10년 가까이 살면서도 불편함이 없다던 한 이웃은 드디어 큰 아이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강남 입성'을 결정했다. 나처럼 초등학교 학부모가 될 엄마들 중에도 '행여나, 영구임대아파트에 사는 아이들과 내 아이가 절친한 친구가 될까' 두려워 취학통지서가 나오기 전에 서둘러 주소지를 옮긴다. 그렇게 해서 한 동네에서도 특정한 학교에 아이들이 모이다 보니 내 아이가 다닐 학교의 학급당 인원수가 (인근 다른 학교보다) 10명 이상 많아졌다고, 나 또한 그들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그렇다. 우리도 이렇게 순간 순간 남보다 더 나은 조건과 기회를 원한다. '코리안 드림'은 외국인 노동자(불법 체류자)만 가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가 '꿈'을 가지고 산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기대하는 사람, 나보다는 더 나은 자식의 미래를 희망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들의 꿈 꿀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 나아가 그 꿈을 위해 우리를 이웃이라고 믿고 여기까지 찾아 온 그들에게 우리는 친구가 되어 줄 '의무'가 있다.
학교를 들어가는 순간, 아이는 세상을 향해 첫발을 내딛는다. '돈이나 외모로 사람의 우열을 가리지 않는 것, 피부색이나 언어의 '다름'을 차별의 이유로 삼지 않는 것, 내가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도 배려하고 존중하는 것, 친구를 사귀기 위해서는 기꺼이 내가 먼저 마음을 열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 '국경 없는 마을(원곡동) 사람들'을 만나고 나니 아이에게 가르칠 것은 분명해졌다. 벽에 붙은 세계지도를 보면서 언젠가는 내 아이와 친구가 될 지도 모르는 원곡동 아이들, 그 아이들의 고향도 짚어보게 해야겠다. 아이는 분명히 학교라는 곳을 기대하게 되리라. 그 곳에서 만날 많은 친구들과 무엇을 하고 놀까, 벌써부터 고민하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