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 기억의 파괴 - 흙먼지가 되어 사라진 세계 건축 유산의 운명을 추적한다
로버트 베번 지음, 나현영 옮김 / 알마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거대한 조각인 동시에 공학이 고려되어야 하고 더 나아가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을 지배하기까지 하는 그 특수함이 매력적으로


느껴져서 개인적으로 건축분야에도 관심이 많다(건축에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 하는 코사인이니 탄젠트이니 인장력이니 하는 것들에는


전혀 흥미가 없는 나이롱, 수박겉핥기식 건축애호가다)


 집단을 향한 탄압은 문화말살 정책이나 제노사이드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얘기는 많이 알려졌고 그만큼 그에 대한 연구도 활발한데 


이 책은 건축물 파괴를 통한 탄압이라는 새로운 시각이 신선했고, 살짝 들춰본 바로는 건축물은 일종의 토템이며 그것을 파괴함으로써 


문화청소를 노린다는 얘기가 설득력이 있어 읽어보고 싶었다. 


 다소 피장적인 제목에 숨겨진 대강의 내용을 파악하여 건축물의 파괴와 관련된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내 머릿속에 떠오른 건 얼마전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에 의해 폭파된 바미안 석불이었다. 뉴스에 나오기 전엔 알지도 못했던 문화재고 그게 있으나 없으나 내 생활에는


전혀 관련이 없으나 광신에 의해 인류의 보물이 무참히 사라져버렸다는 생각에 굉장히 안타까웠던 기억이 난다. 


 사실 건축물의 파괴는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책에 의해 기억 속에서 되살린 911의 기억도 명백한 그것이며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우리 고궁들의 굴욕, 그리고 그에 대한 복수로서 이뤄진 조선총독부 폭파도 그것이다. 지금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어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선 지금도 이스라엘 탱크와 불도저들이 아랍인들의 집을 밀고 있다. 미처 자각하지는 못했지만 은밀히 이뤄지는 일련의


파괴행위는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건축 유산은 일종의 기억총체다. 개인적 기억의 집합은 개인마다 다른 기억의 의미 때문에 결집력이 약한 데다 금방 사라지고 말지만


건축 유산은 그 건축을 공유하는 사회적 집단의 공유된 기억이며 그들의 가치, 더 나아가 그들 자체를 상징한다. 흔히 인명피해에 비해


과소평가되지만 우리는 건축물이 무너질 때 인간 하나가 무너질 때보다 더 큰 절망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는 안 되지만 우리는 인간의 


죽음에 무감각해지고 있다. 한 인간의 죽음은 사망 x명이라는 숫자 혹은 글자에 의해 인지될 뿐이며 60억이 넘는 수많은 인구 중 단 하나


(좀더 많을 때도 많지만)가 사라지는 것은 어차피 유한한 인간의 존재를 생각할 때 그 충격은 한정적이다(전혀 상관없는 타인일 경우).


 건축 유산은 언제나 거기 서 있을 것이라는 일종의 영원성에 대한 믿음을 대변하고 한 개인이 아닌 사회와 대응하는 상징물이기에 


그 파괴의 충격은 분명 한 인간의 죽음보다 강렬하다. 911의 이미지는 그로 인해 죽은 시신들의 이미지가 아니라 무너져내리는 쌍둥이


빌딩이며 그 상징성은 911을 계획한 집단이 의도적으로 계획한 것이다. 


 건축유산을 파괴하는 행위는 책에 의해 몇 갈래로 분류된다. 문화 말살, 테러, 정복, 세력다툼. 각각의 갈래가 명확히 분류되는 것은 


아닌데 그 속에 담긴 인간의 투쟁적 갈등이 언젠가 해소되어야함은 명확하다. 힘 센 놈, 약한 놈 할 것 없이 만인이 만인을 향해 투쟁한다.


'오늘날 누가 아르메니아인을 기억하는가'라는 히틀러의 말은 충격적이다. 아르메니아인 학살은 오스만 투르크 시절 터키가 저질렀던


과오다. 터키는 공식적으로 학살을 부정하는 가운데, 터키 땅에 거주하던 아르메니아인들은 지도에서 지워지다시피했다. 워낙 깨끗하게


밀어버린 탓인지 아직도 오리발을 내미는 터키에 국제사회가 비난을 퍼붓기도 하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다. 히틀러는 이 비극에서 힌트를


얻었는지 유대인에게 비슷한 저주를 내린다. 크리스탈나흐트와 이어진 일련의 탄압은 특히 유대 공동체를 상징하는 시나고그 집회소에


집중되어 유대인 공동체 자체를 와해시키는데 집중되었다. 


 지금 인류의 악마 정도의 위치에 있는 히틀러를 보러갈 것까지도 없다. 문명화된 정의의 사도 영국군도 독일의 유서깊은 도시를 파괴해


심리적 타격을 입힐 목적으로 민간인이 있든 없든 비군사적시설과 시가지에 폭격을 퍼붓는 것을 묵인 내지 권장했고 미군은 각종 전쟁에서


문화재를 일부러 타격하거나 보호 밖에 두었다. 


 민족적, 종교적 특질을 상징하는 건축 유산은 고래로 유사시 특히 수난의 대상이었다. 중동의 다툼, 아일랜드에서의 영국귀족가옥에 


대한 테러 등이 여실히 보여준다.


 분쟁을 바라보는 시선을 건축물에까지 닿게 해 준 책이어서 읽은 보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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