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 안도현의 시작법詩作法
안도현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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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원임용고시(국어)를 준비하면서 '시'를 접하는 것은 어쩌면 고충일지도 모른다. 고전시가를 재쳐 두고도 여전히 진행형인 현대시의 창작자들의 목소리가 한스러울 때도 있다. 그렇지만 안도현 시인의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를 읽으면서 시험때문에 억지로라도 시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란 것을 깨달았다. 

  안도현 시인의 시 창작 노트를 보는 것은 시를 공부하는 자에게는 엄청난 행운이다. 대학 강단에서 '시창작론'이나 '시교육론'같은 강의를 듣는 것 이상의 공부가 되었다. 이 책에는 시하면 떠올리는 일상적인 시험폭탄의 파편들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아니 똑같은 것을 말하고 있지만 전혀 다르게 말하는 시인에게 고마움을 느낄 뿐이다. 

  시라고 하면 의례 떠올리는 것이 '서정', '상징', '비유', '주제', '화자', '운율' 등의 교과서적인 내용일 것이다. 시를 나만의 방식으로 읽고 느끼고 하는 것보다 시험문제에 맞게 읽어내는 요령을 위한 시읽기만을 생각하기 일쑤다. 학교를 떠난 사회인들에게 얼마나 시가 읽혀지는가? 어쩌면 학교에서의 시 교육이 시를 멀리하게 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아닐까?  

  이숭원 교수의『교과서 시 정본해설』처럼 그런 시교육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시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책이 아닐까 싶다. 시인이 만난 '서정적 순간'을 나의 이야기를 다시 풀어헤쳐보는 일, 그것이 바로 시읽기이다. 그런 시읽기를 두고 해석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이런 시해석이 타당성을 가지면 뭇사람들에게 그럴 듯한 시비평으로 자리하게 된다. 이런 해석학적 순환(시를 두고 하는 대화)이 일상에서 자유롭게 일어난다면 우리 사회는 정말 시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한 고향같은 곳이 될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안도현 시인의 이 책에는 시를 쓰기 위해 생각해 볼 거리 26가지와 그 26가지를 풀어헤쳐 놓은 두어 가지의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이야기속에는 거기에 걸맞는 시들이 놓여져 있다. 교과서에서 가르쳤던 시이론을 설명하기에 적절한 시들이 이론과 맞물려 잘 짜여져 있다. 가르칠 필요도 없고 배울 필요도 없고 그저 시적인 순간과 마주하기만 하면 가슴으로 손끝으로 시를 낚아챌 수 있는 그런 책이다. 

  "당신의 이름을 지우고 보더라도 분명히 당신의 시임을 알게 하는 게 최선임을 잊지 말라"란 이 책을 닫는 말처럼 그렇게 시인의 손끝을 떠난 시를 우리의 가슴에서 다시 피워내보는 것은 어떨까? 

  '시를 살아라'는 말의 뜻이 무엇일까? 시로만 할 수 있는 말이 과연 무엇일까? 우리 시대에 남아 있는 '시적인 순간'들을 건져 올려내는 일의 의미는 무엇일까? 등 숱한 질문들이 이 책을 통해 살아난다. 시를 잘 읽기 위해서 잘 가르치기 위해서 꼭 읽어야 할 책인 것 같다. 물론 그런 효용보다 시인들의 세상 읽는 눈을 통해 대상을 다르게 보는 방법과 그 대상과 하나될 수 있는 마음을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 책을 통해 나와 동시대에 시공간을 함께 하는 사람들의 눈에 들어 온 우리의 시대는 어떤 모습인가와 우리의 삶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봤으면 한다. 

  시로 만난 이 세상은 참 따뜻한 젖가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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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 시인선 80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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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기형도, 「엄마 걱정」,『입 속의 검은 잎』中.

 

 

<내가 읽은 기형도의 시 한 편>

 

  열무 삼십 단을 머리에 지는 것은 삶을 책임져야 하는 우리네 억척스런 어머니의 삶의 표상이다. 시적 화자가 밤 늦도록 기다리는 어머니의 모습은 시장판에서 마지막 손님이 혹여나 올까 남은 열무 몇 단을 털고 일어서지 못하는 애탐에 있다.
  독자가 읽는 눈에 보이는 어린 화자의 안타까운 기다림과 집에 어린아이를 혼자 남겨두고 장판에 나와 목청을 돋우시는 어머니의 지친 얼굴이 한 화면을 이룬다. 기다림에 지쳐가는 화자의 한 마디 '안 오시네'란 말에 어머니를 기다리는 어린 시적 화자의 외로움이 묻어난다. '안 오시네', '안 오시네', '안 들리네'하는 말에 홀로 남겨진 어린 아이의 외롭고 쓸쓸한 마음이 점점 짙어지는 듯하다.
  해는 왜 시든 것일까? 시간이 가면 자연히 지는 해를 화자는 어째서 '시들었다'는 말로 표현했을까? 그것은 바로 위 시구에 있는 시장때문일 것이다. 어머니 아니 엄마를 애타게 기다리는 화자의 시간안에 어머니의 열무단이 오후내내 내리쬐는 햇볕에 시들어 저물녁 장판에 늘어진 모습처럼 그렇게 화자 또한 어머니를 온 종일 기다리다 지쳐 아직도 오지 않는 어머니를 그리는 시간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화자가 위치한 곳은 찬밥처럼 담긴 방안이다. 여기서 잠깐 농사를 업으로 여기며 살던 옛 시골의 풍경 속 가족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보자. 해가 저너머 산마루를 내려갈 때쯤이면 밥 짓는 연기가 굴뚝을 연신 오르고 마실(마을) 나갔던 꼬맹이들도 잰걸음을 달린다. 왠종일 꼬꿀시고(굽혀) 들일에 지친 끌고 아부지(아버지)는 삽자루를 뒷짐에 움켜지고 논두렁, 밭두렁에 발자국을 찍는다. 아낙들은 두어 시간 앞서 밥때를 챙기느라 분주하다. 그런 일상적인 농촌가족의 온화한 풍경 속 밥상은 이 시의 어디에도 없다. 어린 화자가 놓인 공간이 농촌과는 너무나 이질적인 잿빛 도시였기에 혼자만의 시간이 밥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인 것이다. 때가 되어도 아무도 오지 않는 집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화자는 따뜻한 밥보다 찬밥 한 술이라도 말 한 마디라도 건내고픈 가족의 온정이 더 간절하다. 따뜻한 밥의 온기보다 더 포근한 어머니의 젖가슴이 더 절실한 아이다. 하지만 도시의 날품팔이 삶은 그런 그늘이 어린 땀의 삶인 것을 어쩌겠는가? 마치 땀이 말라 소금기를 머금은 그 찌든 냄새마냥 그런 찌들림의 일상인 것이다.
  다시 시구로 눈을 돌려보자. 누구나 '찬밥'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필자의 집 가장은 도시의 건설현장에서 막노동을 한다. 조선시대 예학문화속 가부장적 질서때문이지 농촌생활의 어른모심에서 비롯된 예의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필자의 집에서는 가장이 들어오기 전에는 밥술을 함부로 들지 않는다. 밥상에 둘러 앉았더라도 가장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기 일쑤다. 기다리다보면 때를 놓쳐 밥때를 한참이나 지나 끼니를 하기도 하는데 그 기다림의 시간만큼 따뜻했던 밥은 온기를 잃어간다. 그런 기다림의 시간에는 혹여 무슨 일이나 있지 않을까하는 걱정과 두려움이 서리기도 한다. 뭇 가정의 어머니들의 마음은 찬밥에 애간장이 녹는 걱정이 내린다. 이런 기다림과 같은 성격이 이 시의 일면에 드러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서정의 맛은 일상의 기다림의 맛과는 사뭇 다르다. 이 시의 화자는 어린 소년같다. 아니 그래야만 더 아귀가 맞을 것 같다. 어린 시절부터 더 빨리 성숙하는 여성들보다는 남성의 어린 아이가 더 시에 적합한 화자인 것 같다. 조금은 어리숙할 것 같은 우직함이나 순박함이랄까? 여튼 이때의 찬밥은 어머니가 장판에 나가기 전 어둑해져서야 늦게 집에 도착하는 것이 뻔한 생활 속에서 집에 혼자 있을 어린 아이를 생각하며 아침 일찍 바쁘게 설쳐 퍼담은 따뜻한 모정의 밥숟갈의 무덤인 것이다. 어머니의 시간에는 절대 초저녁 밥상을 어린 자식과 함께 할 수 없는 삶의 무게가 버티고 있다. 매일이 그런 반복적인 일상일테지만 어린 화자는 그런 일상에서도 기다림을 멈추지 않는다. 그런 어린 화자에게 따뜻한 밥이 그 기운을 잃을수록 기다림의 시간은 증폭되고 그 기다림 속에서의 외로움과 두려움 또한 점점 커져만 간다.
  어린 화자는 그런 익숙해질 법도 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숙제를 한다. 동네 친구들과 어둠이 땅을 길 때까지 미친 듯이 뛰어노는 것도 아닌 화자는 혼자 방에 엎드려 숙제를 하며 어머니를 기다린다. 독자에게는 그런 어린 화자의 모습이 애처롭게 그려진다. 내용을 잘 몰라 못하는 숙제도 아닌 자신이 의도적으로 숙제를 하는 속도를 늦추면서까지 어머니를 기다리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배추잎같은 타박타박 나는 어머니의 발소리는 귓전에 들려오지 않는다. 어린 화자
혼자 있는 빈방에 들리는 소리라고는 금이 간 유리창 너머로 오는 빗소리일 뿐이다.
  이 모든 기다림의 시간 표현은 '아주 먼 옛날'이란 말 속에서 하나로 산다. 그것은 이제 기다리다 커 버린 어른이 된 화자의 기억에 묻힌 유년의 시간이 된다.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아주 먼 옛날의 그 시절은 화자에게 어떤 시절인가? 그저 혼자 빈방에서 엄마가 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며 외로움과 쓸쓸함에 훌쩍이는 시간이기만 했을까? 그 시간 안에 말 못하는 가족의 아픔이 서려 있는 것은 아닐까? 화자와 함께 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빈집의 외딴방, 덩그러니 홀로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을 기다림과 함께 해야만 하는 그때의 화자는 어쩌면 '가난'이라는 질곡의 삶의 늪에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화자만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지금은 커 버린 우리의 형, 누나, 엄마, 아빠의 삶이 거기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찬밥'처럼 커 버린 어른 화자의 기억속 유년은 따뜻한 아랫목을 내주고 윗목을 가졌다. 그날의 삶에 충실해야 하는 삶의 무게에 화자의 유년의 가족은 아랫목을 잃었는지 모른다. 열무 삼십 단의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시장으로 향한 엄마가 장판에서 맞딱뜨린 빗줄기, 그날의 기다림의 저녁은 그런 힘겨움을 혼자 견뎌내며 어린 화자를 키웠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운 기다림속에 영원한 기억으로 숨쉴 것이다. 엄마가 걱정하는 얼니 화자도 어린 화자가 걱정하는 엄마도 그렇게 서로의 마음속에 기다림의 그리움을 간직하면서 삶을 키워가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시이다.
  기다림 속에 숨겨진 진실된 삶의 사랑의 미학이 바로 기형도가 우리시대에 울부짓는 가르침이다. 잃어버린 그 삶의 여백을 찾아서 입 속의 검은 잎으로 발길을 내딛어보자.
 
 

<맛깔스런 시구>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이 시를 통해 이 시집 전체를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시를 통해 기형도의 삶에 '시적인 것'이 무엇이었나를 짐작해볼 수 있다. 그가 본 세상을 내 눈으로 다시 한번 그려보고 싶은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시집을 꼭 한번 펼쳐보기 바란다. 세상을 보는 눈은 천 가지 만 가지의 눈이다. 내 얼굴에 달린 눈은 하나일지라도 다른 사람의 눈을 내 눈에 비추고 그것이 마주하면 끊이지 않는 거울에 거울을 낳는다. 그것이 시를 읽고 세상을 배우는 즐거움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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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올레 여행 - 놀멍 쉬멍 걸으멍
서명숙 지음 / 북하우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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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란 시집(시)으로 유명한 부끄러운 순결의 시인 윤동주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그의 시의 젖줄이 된 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그리워할 것이다. 그 그리움 속에는 나 자신을 드려다 보는 무수한 눈과 거울과 우물이 존재하리라 생각한다.  

  현대인들은 속도의 시대에 살고 있다. 컴퓨터를 켜기 무섭게 바른손은 더블클릭을 하기 바쁘고 화면이 느리면 금방 짜증을 낸다.  책읽기도 속독을 강조하며 조사 하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세밀한 의미는 큰 틀에서의 의미 파악에 잠식되기 일쑤다. 거리를 지날 때면 횡단보도를 걷고 있는 사람에게도 신호가 바뀌기 무섭게 경적을 울려대는 무쏘의 뿔을 자랑하는 차를 본다. 이밖에도 헤아릴 수 없는 속도의 일상이 현대인의 피부 밑에서 숨쉬고 있다. 이런 속도전의 시대는 경쟁이라는 삶의 방식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 삶의 방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외딴 방에 살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생물종의 도태로 말해지는 살아있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그런 속도에 파묻혀 살아갈 수밖에 없는 딱한 존재가 오늘을 사는 바로 우리다. 

  일중독자로 살던 어떤 중년의 여인이 떠난 산티아고길에서 만난 영국 여자의 말 한 마디가 제주올레의 첫 시작을 알리는 정신이었다. 그리고 그 올레길을 만들기 위해 연결된 인적 네트워크가 아날로그 길을 만들었다. 디지털의 시대에 가장 아날로그적인 길을 만든 사람들은 의외로 가장 빠른 속도전을 치르던 사라이었다. 이것이 삶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간세다리'-간세:게으름을 피운다-란 말이 제주올레를 위한 여행자의 수칙이란 생각이든다. 자동차의 네 바퀴는 제주의 젖줄을 완전히 느끼기를 거부한다. 차창 너머로 펼쳐지는 풍경은 자동차의 속도로는 인간의 동체시각이 따라갈 수 없다. 차창 너머의 풍경은 마치 어린아이의 장난감 스냅사진의 풍경이 넘어가는 그런 빠른 찰나의 흐릿함이다. 그래서 그런지 제주도를 여행하다보면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은 자동차로 느낀 원경의 제주를 더 가까이 자기 앞에 두고 싶어하는 멋을 아는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 책의 서명숙이 만든 제주올레를 걷는 일은 그 멋을 아는 걸 넘어 느끼는 일이다.   

  인간이 걸었기에 그 걷기의 자국이 길을 낸 것이다. 그 길이 넓어지고 편히해지면서 인간은 그 길을 낼 때의 걸음을 잃어 버렸다. 그 걸음을 잃음과 동시에 명상과 사유의 시간도 같이 잃었다. 그것을 잃으면서 자연을 보는 눈도 멀어 버렸다. 길 읾음이 생각의 읾음이요 생각의 잃음이 자기 삶을 잃게 만들었다. 수동적인 인간기계로 변신한 인간의 도시에서 떠나 새로운 삶과 자기를 보는 제주올레로 발을 옮겨 보자.  

  '제주올레'에는 당신만의 길이 있다. 나만의 의미 부여로 이루어진 나의 길을 가진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제주올레를 걸으며 그런 길에 대한 명상을 해보는 것은 어떤가? 이 책을 읽으면 길에 대한 명상에 사로 잡힐 수 있다. 인간의 걷기의 역사에 대해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환상섬 제주의 속살을 벗기는 재미가 있다. 책 중간 중간에 소개되는 제주의 풍경을 걷기로 마음에 배경을 남기고 싶은 생각이 샘솟는다. 그 사이사이에 제주어(토박이말)의 아름다움이 곳곳에 함께 한다. 송강 정철의 기행가사 관동별곡처럼 나만의 제주여행기를 한번 써보고 싶은 충동을 불러 일으키는 길 탐방, 걷기 여행을 꿈꿔 보게 된다. 

  제주를 가본 사람은 많지만 제주의 속살을 사랑해 본 사람은 드물거라 생각한다. 무형의 바람을 느끼는건 내 몸의 실오라기의 흔들림이다. 내 피부에 송글송글 맺히는 땀방울이 햇볕의 따가움을 가르쳐 준다. 어둠이 깊어질수록 달빛의 밝음과 별의 얼굴들은 더욱 선명해진다. 제주는 언제나 제주지만 사람들에 따라 제주가 자연일 수도 인공일 수도 있다. 자동차보다는 자전거를 자전거보다는 걷기를 통해 제주의 하늘과 바랑과 바람과 그 속을 걷는 자신을 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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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말 가르치기
김수업 지음 / 나라말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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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에는 봄이 아직도 오지 않았는 데 봄은 벌서 온 세상을 뒤덮었네."

봄꽃의 향기와 따스한 바람과 햇살과 어우러져 흩날리는 꽃잎들, 연녹의 새순이 뿜어 내는 생명력, 봄나물의 상큼함, 이 모든 것들이 한 데 겹쳐 봄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어는 것 하나 제대로 느끼지 못하면 봄을 온전히 알 수 없다. 봄은 있는 데 내게 봄이 없는 것처럼 슬픈 일도 없다. 삶은 그렇게 바로 내 곁에 있는 작고 사소한 것에서부터 느끼고 생각하고 알아갈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봄처럼 배달말 또한 항상 내 곁에 머무르고 오고 감을 계속 하고 있었지만 그저 일상에 숨겨진 숨은 그림이나 다름 없었다. 내가 제대로 알아 보기 전에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알 수 없 듯 배달말 또한 그러했다.  

이 책을 "말의 봉우리에 움을 틔웠다."란 말로 이 책을 드러내고 싶다. 또 한 마디를 덧 붙인다면 "이 책을 색으로 표현한다면 나는 순백의 빛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다. 그만큼 이 책은 겨레의 말, 배달말을 혼탁해진 말의 뻘에서 건져내 진주로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 책을 읽을수록 대밭에 불어오는 바람을 맞는 것처럼 시원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임용시험을 준비하면서 나는 왜 국어교사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목적의식이 그렇게 뚜렷하지 않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배달말을 가르치는 사람의 신념을 배울 수 있어 더 확고한 교사로서의 마음을 다질 수 있었다. 

무엇보다 전공 공부를 하면서 이론서를 볼 때면 외국서적을 번역하는 과정에서의 투박한 번역문을 읽어야 하는 힘겨움을 이 책은 덜어 준다. 사전을 책을 필요도 없고 그저 읽어 가면서 입말처럼 이해가 되니 딱딱한 들온말을 읽는 힘겨움을 덜 수 있어서 좋았다. 전공 이론서를 좀 읽은 사람이라면 이 책이 얼마나 배달말을 길어 쓰기 위해 노력한 책인지를 금방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 책 덕분에 전문용어를 쓰지 않고 배달말로만도 충분히 학문을 할 수 있고 명확한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 책을 읽으면서 부끄러운 것이 배달말에 아직 익숙지 않아 애써 배달말로 적은 글을 다시 번역어(전문용어)로 바꾸어 쓰는 나를 마주한 일이다. 우리말과 우리글 살이를 제대로 못 하면서 배달말을 가르치겠다고 생각했던 나를 반성하게 계기를 마련해 준 고마운 책이다.  

배달말을 가르치고 있는 사람이나 가르치려고 하는 사람이나 배달말로 입말, 글말, 전자말 살이를 하는 모든 이들이 배달말 살이에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우리의 삶의 텃밭에서 우리말의 씨앗을 뿌리고 키워내는 농사를 우리는 이제 우리 힘으로 애살있게 해야 한다. 『배달말 가르치기』를 읽으며 그 첫 씨앗을 뿌려봄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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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스펜서 존슨 지음, 형선호 옮김 / 청림출판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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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처럼 간단한 선택을 하고 싶은 사람들은 이 책을 읽으며 심사숙고하는 선택을 하기 바란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첫의 겉표지에 나오는 문구다. 책 제목 다음으로 내가 읽은 첫 글귀다. 이 글을 읽는 순간 드는 질문은 "누가 그걸 모르는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였다. 

내 기억 속에서 자의적인 선택을 시작했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선택을 하지 않았던 순간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일상은 무수한 선택의 연속이었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자동화된 선택에 대해서는 이제 무감각해져 버렸다. 하지만 아직도 인생을 두고 고민해야 할 선택의 순간이 내게는 몇 가지 더 남아 있다. 그 하나는 직업이고, 다른 하나는 배우자다. 이 두 가지가 20대에 가장 고민하는 선택이 아닐까? 어쩌면 모든 이들이 인생에서 가장 고민하는 선택의 순간이 20대의 이 두 가지 선택이 아닐까? 시간이 지나면 대학 진학을 위한 선택에서 고민하던 그때처럼 지나간 아련한 추억이 될진 모르지만 지금은 내게 가장 중요한 선택의 문제이다. 

30대가 되면 또 다른 선택이 나를 기다릴테고 그 이후에는 또 다른 인생의 선택이 나를 부르겠지. 그리고 그 다음에는 또 그런 다음에는 어떤 선택들이 나를 기다릴까? 앞으로 얼마나 있을지 모를 인생의 크고 작은 선택의 순간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시간이 지난 후에 잘 선택했다라는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그 선택이 Yes든 No든 간에 선택에는 기회비용이 따르기 마련이다. 어떤 선택을 하는 사람이든 선택에 따르는 기회비용을 최소화하려는 결정을 내리려 고민한다. 그런 고민 끝에 내린 선택의 결과가 항상 최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의외의 변수들로 인해 예상밖의 결과를 낳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최선의 의사 결정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스펜서 존슨은 의사 결정의 순간에 고민을 하는 우리들을 위해『선택』을 내놓았다. 사물을 꽤뚫어 볼 수 있는 능력만 있다면 우리는 선택을 고민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초능력을 신은 사람에게 선물하지 않았다. 대신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노력하도록 만들었다. 그 능력을 기르기 위해 노력해야 할 일들이 이 책에 제시되어 있다.  

더 나은 결정을 하기 위해 떠나는 여행에서 젊은이는 길잡이로부터 하나의 배움을 얻고 산행을 하면서 그 배움을 더욱 구체화하며 성장한 뒤 새로운 길잡이가 된다. 교육은 바로 이런 멘토(mentor)들의 장이 되어야 한다. 학교와 교과서 그리고 선생님을 떠난 배움의 공간이 바로 이런 책이다.  

1장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인생 산행길-금요일 아침 

새로운 만남-금요일 점심 

2장 해답을 찾아야 할 실제적인 질문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금요일 오후 

우리 앞에 놓인 여러 가지 선택-금요일 저녁 

미리 충분히 생각하기-금요일 밤 

3장 더 나은 결정을 위한 두 번째 질문 

이성과 직관을 넘나들다-토요일 이른 아침 

4장 내 마음에 묻다 

나는 나를 속이고 있지 않은가-토요일 아침 

내가 느끼는 기분-토요일 오후 

나는 더 좋은 것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일요일 해뜰 무렵 

5장 산행을 마치고 나서 

다시 되돌아 보기-일요일 아침 하산 

6장 더 나은 결정을 하는 법 

모두가 함께하는 선택의 원칙-4개월 후 

내 삶의 길잡이-2년 후 

글쓰기 교육의 기능 중에 하나가 의사 결정 과정임을 아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선택이란 말의 다른 말이 의사 결정 능력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책을 읽는 것은 좋은 글을 쓰기 위한 방편이 되기도 한다. 그보다 더 이 책을 읽어 가다보면 좋은 선택을 하기 위한 산행에 매료될 수 있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어 편안해 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목차를 소개한 것은 이 책을 선택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목차를 보며 한번 선택의 문제에 대해 글의 내용을 예측해보기를 바라는 뜻에서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옮겼다. 

도움은 절실히 요구하는 사람에게 줄 때 가장 값진 도움이 될 것이며 내가 넘쳐 주고 싶을 때는 다른 사람이 그 도움을 필요로 하게 만들 수 있을 만큼 내가 주고자 하는 것에 유용성-효용가치-을 크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저의 이 길잡이 글이 이 책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으면 하는 바람과 이 책을 선택한 사람들이 인생에서 더 나은 선택을 하기를 바랍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이 더 많이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행복한 선택의 시간 가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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