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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속의 검은 잎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80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평점 :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기형도, 「엄마 걱정」,『입 속의 검은 잎』中.
<내가 읽은 기형도의 시 한 편>
열무 삼십 단을 머리에 지는 것은 삶을 책임져야 하는 우리네 억척스런 어머니의 삶의 표상이다. 시적 화자가 밤 늦도록 기다리는 어머니의 모습은 시장판에서 마지막 손님이 혹여나 올까 남은 열무 몇 단을 털고 일어서지 못하는 애탐에 있다.
독자가 읽는 눈에 보이는 어린 화자의 안타까운 기다림과 집에 어린아이를 혼자 남겨두고 장판에 나와 목청을 돋우시는 어머니의 지친 얼굴이 한 화면을 이룬다. 기다림에 지쳐가는 화자의 한 마디 '안 오시네'란 말에 어머니를 기다리는 어린 시적 화자의 외로움이 묻어난다. '안 오시네', '안 오시네', '안 들리네'하는 말에 홀로 남겨진 어린 아이의 외롭고 쓸쓸한 마음이 점점 짙어지는 듯하다.
해는 왜 시든 것일까? 시간이 가면 자연히 지는 해를 화자는 어째서 '시들었다'는 말로 표현했을까? 그것은 바로 위 시구에 있는 시장때문일 것이다. 어머니 아니 엄마를 애타게 기다리는 화자의 시간안에 어머니의 열무단이 오후내내 내리쬐는 햇볕에 시들어 저물녁 장판에 늘어진 모습처럼 그렇게 화자 또한 어머니를 온 종일 기다리다 지쳐 아직도 오지 않는 어머니를 그리는 시간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화자가 위치한 곳은 찬밥처럼 담긴 방안이다. 여기서 잠깐 농사를 업으로 여기며 살던 옛 시골의 풍경 속 가족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보자. 해가 저너머 산마루를 내려갈 때쯤이면 밥 짓는 연기가 굴뚝을 연신 오르고 마실(마을) 나갔던 꼬맹이들도 잰걸음을 달린다. 왠종일 꼬꿀시고(굽혀) 들일에 지친 끌고 아부지(아버지)는 삽자루를 뒷짐에 움켜지고 논두렁, 밭두렁에 발자국을 찍는다. 아낙들은 두어 시간 앞서 밥때를 챙기느라 분주하다. 그런 일상적인 농촌가족의 온화한 풍경 속 밥상은 이 시의 어디에도 없다. 어린 화자가 놓인 공간이 농촌과는 너무나 이질적인 잿빛 도시였기에 혼자만의 시간이 밥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인 것이다. 때가 되어도 아무도 오지 않는 집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화자는 따뜻한 밥보다 찬밥 한 술이라도 말 한 마디라도 건내고픈 가족의 온정이 더 간절하다. 따뜻한 밥의 온기보다 더 포근한 어머니의 젖가슴이 더 절실한 아이다. 하지만 도시의 날품팔이 삶은 그런 그늘이 어린 땀의 삶인 것을 어쩌겠는가? 마치 땀이 말라 소금기를 머금은 그 찌든 냄새마냥 그런 찌들림의 일상인 것이다.
다시 시구로 눈을 돌려보자. 누구나 '찬밥'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필자의 집 가장은 도시의 건설현장에서 막노동을 한다. 조선시대 예학문화속 가부장적 질서때문이지 농촌생활의 어른모심에서 비롯된 예의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필자의 집에서는 가장이 들어오기 전에는 밥술을 함부로 들지 않는다. 밥상에 둘러 앉았더라도 가장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기 일쑤다. 기다리다보면 때를 놓쳐 밥때를 한참이나 지나 끼니를 하기도 하는데 그 기다림의 시간만큼 따뜻했던 밥은 온기를 잃어간다. 그런 기다림의 시간에는 혹여 무슨 일이나 있지 않을까하는 걱정과 두려움이 서리기도 한다. 뭇 가정의 어머니들의 마음은 찬밥에 애간장이 녹는 걱정이 내린다. 이런 기다림과 같은 성격이 이 시의 일면에 드러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서정의 맛은 일상의 기다림의 맛과는 사뭇 다르다. 이 시의 화자는 어린 소년같다. 아니 그래야만 더 아귀가 맞을 것 같다. 어린 시절부터 더 빨리 성숙하는 여성들보다는 남성의 어린 아이가 더 시에 적합한 화자인 것 같다. 조금은 어리숙할 것 같은 우직함이나 순박함이랄까? 여튼 이때의 찬밥은 어머니가 장판에 나가기 전 어둑해져서야 늦게 집에 도착하는 것이 뻔한 생활 속에서 집에 혼자 있을 어린 아이를 생각하며 아침 일찍 바쁘게 설쳐 퍼담은 따뜻한 모정의 밥숟갈의 무덤인 것이다. 어머니의 시간에는 절대 초저녁 밥상을 어린 자식과 함께 할 수 없는 삶의 무게가 버티고 있다. 매일이 그런 반복적인 일상일테지만 어린 화자는 그런 일상에서도 기다림을 멈추지 않는다. 그런 어린 화자에게 따뜻한 밥이 그 기운을 잃을수록 기다림의 시간은 증폭되고 그 기다림 속에서의 외로움과 두려움 또한 점점 커져만 간다.
어린 화자는 그런 익숙해질 법도 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숙제를 한다. 동네 친구들과 어둠이 땅을 길 때까지 미친 듯이 뛰어노는 것도 아닌 화자는 혼자 방에 엎드려 숙제를 하며 어머니를 기다린다. 독자에게는 그런 어린 화자의 모습이 애처롭게 그려진다. 내용을 잘 몰라 못하는 숙제도 아닌 자신이 의도적으로 숙제를 하는 속도를 늦추면서까지 어머니를 기다리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배추잎같은 타박타박 나는 어머니의 발소리는 귓전에 들려오지 않는다. 어린 화자
혼자 있는 빈방에 들리는 소리라고는 금이 간 유리창 너머로 오는 빗소리일 뿐이다.
이 모든 기다림의 시간 표현은 '아주 먼 옛날'이란 말 속에서 하나로 산다. 그것은 이제 기다리다 커 버린 어른이 된 화자의 기억에 묻힌 유년의 시간이 된다.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아주 먼 옛날의 그 시절은 화자에게 어떤 시절인가? 그저 혼자 빈방에서 엄마가 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며 외로움과 쓸쓸함에 훌쩍이는 시간이기만 했을까? 그 시간 안에 말 못하는 가족의 아픔이 서려 있는 것은 아닐까? 화자와 함께 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빈집의 외딴방, 덩그러니 홀로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을 기다림과 함께 해야만 하는 그때의 화자는 어쩌면 '가난'이라는 질곡의 삶의 늪에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화자만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지금은 커 버린 우리의 형, 누나, 엄마, 아빠의 삶이 거기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찬밥'처럼 커 버린 어른 화자의 기억속 유년은 따뜻한 아랫목을 내주고 윗목을 가졌다. 그날의 삶에 충실해야 하는 삶의 무게에 화자의 유년의 가족은 아랫목을 잃었는지 모른다. 열무 삼십 단의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시장으로 향한 엄마가 장판에서 맞딱뜨린 빗줄기, 그날의 기다림의 저녁은 그런 힘겨움을 혼자 견뎌내며 어린 화자를 키웠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운 기다림속에 영원한 기억으로 숨쉴 것이다. 엄마가 걱정하는 얼니 화자도 어린 화자가 걱정하는 엄마도 그렇게 서로의 마음속에 기다림의 그리움을 간직하면서 삶을 키워가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시이다.
기다림 속에 숨겨진 진실된 삶의 사랑의 미학이 바로 기형도가 우리시대에 울부짓는 가르침이다. 잃어버린 그 삶의 여백을 찾아서 입 속의 검은 잎으로 발길을 내딛어보자.
<맛깔스런 시구>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이 시를 통해 이 시집 전체를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시를 통해 기형도의 삶에 '시적인 것'이 무엇이었나를 짐작해볼 수 있다. 그가 본 세상을 내 눈으로 다시 한번 그려보고 싶은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시집을 꼭 한번 펼쳐보기 바란다. 세상을 보는 눈은 천 가지 만 가지의 눈이다. 내 얼굴에 달린 눈은 하나일지라도 다른 사람의 눈을 내 눈에 비추고 그것이 마주하면 끊이지 않는 거울에 거울을 낳는다. 그것이 시를 읽고 세상을 배우는 즐거움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