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의 사회 이반 일리치 전집
이반 일리치 외 지음, 신수열 옮김 / 사월의책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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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의 사회」

원제: DISABLING PROFESSIONS

이반 일리치의 주장이 지금 다시 논의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20세기 중반 이미 시민들을 불능으로 만드는 전문가들의 시대를 예견하고 이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총 176p의 짧은 책이라 분량으로서는 아쉽지만 이반 일리치의 외

①<의료만능사회>

②<서비스 사회의 정치학>

③<변호사와 사법 독점>

④<베이비시터가 된 장인들>등 세 부분에서 각기 다른 저자들이 큰 주제인 ‘전문가들의 사회’가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분명히 주제를 표현해주고 있어서 좋았다.

 

특히 <베이비시터가 된 장인들> 주제단락에서는 기술공으로 오래 근무한 저자가 자신의 관심분야에 대한 학문을 주체적이고 쉽게 끌고 나간 힘 있는 글쓰기의 매력을 유감없이 과시한다. 빛나는 글이다. 아마도 실제 노동자가 자신의 삶의 문제를 사회문제로 파고 들어가면서 가지게 된 아우라에서 분출되는 힘일 것이다.

 

대략적으로 소개하자면 이반 일리치는 20C를 인간을 불구화하는 전문가시대라고 명명한다.

정치가 시들어버린 시대, 유권자들이 교수들의 충고에 따라 자신의 요구를 법제화할 힘을 전문관료들에게 위임해버린 시대로 정의하며 따라서 기술전체주의(techno-fascism)를 경고한다.

전문가들은 마치 중세의 사제들처럼 더 상위의 엘리트집단에게 이익을 챙겨주는 대가로 그들의 양해를 받아 권력을 보유한다. 그리고 의료, 법률, 교육,기술 분야에서 활동하던 자유전문직들은 지배적 전문직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리고 사용가치의 해체, 시스템이 역생산성을 낳은 문제점 등을 힘주어 지적한다.

 

먼저 시스템의 역생산성문제란 무엇인가?

자원이든 비용이든 그 수치가 증가되어도 일정 수준에 이르면 그 효용이나 만족도가 체감하는 그래프를 상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이는 소비의 증가가 일정 한계를 넘으면 삶의 질 측면에서 저하를 의미한다.

 

좀 더 구체화해보자. 현대사회는 서비스사회이다.

서비스는 돌봄(care)=사랑을 필요로 한다.

필요는 결핍을 낳고 필요는 산업경제 속에서 적절한 수입을 쫓아서 움직인다. 따라서 필요한 것, 무엇이 결핍인지가 재정의되고 과다생산(풍성히 논의)될수록 적절한 수입은 올라간다.

여기서 많은 교육문제, 의료문제, 법률문제, 노동자의 취업문제등은 아무리 자원을 쏟아 부어도 해결되지 않는 제로섬게임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현대의료는 의원병으로 의사들이 병을 만든다.

예전에는 병이 아니었던 대머리, 당뇨, 혈압상승등 많은 부분에서 병으로 분류되고 이름 붙여져서 의사들의 치료와 관리대상으로 들어가게 되며, 그것도 부족하여 이제는 건강의 개념까지 확대되어 건강이라는 큰 틀에서 소비자들이 지불해야 되는 관리-비용은 나날이 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문제제기와 물음들이 적절한지조차 일반 소비자들은 제기할 수 없다. 즉 무엇이 적절한 물음인지 정의할 권리가 서비스제공자들이 쥐고 있기 때문이며 그래서 이들은 필요를 결정하는 권한까지 가진다.

 

교육은 교육전문가들이 모여서 카르텔을 만들고 그들이 만든 체계를 확산-승인시켜서 제도권 내 교육이 아니면 인정을 받지 못하므로 배움은 사라지고 교육서비스라는 상품을 구입해야하는 소비자의 막중한 부담은 나날이 늘어간다.

 

의료만능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학교에서 선생님의 말씀을 잘 따르고 듣는 학생이 우수하고 높은 승인을 받는 것처럼 환자들은 의사의 지시에 학생처럼 순종적인 태도를 취한다.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하거나 좀 더 심한 경우에는 어떤 제지를 당할지 모른다.

 

<변호사와 사법 독점>에서는 어떻게 해서 독점이 수립되는가를 알아낼 수 있다.

독점을 수립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비전문가가 이해할 수 없는 언어와 절차를 고안하는 것이다.

이러한 독점으로 20C후반은 전문가들이 숭배를 받은 시대, 전문가들의 조언이 값비싼 상품이 된 시대였다.

 

이제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비형사사건의 경우에도 변호사의 조력을 받으려고 하고 그들의 전문지식이 자신의 문제를 보다 더 잘 이해하고 해결해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과연 그럴까?

 

왜 입법을 하는 기관에서는 모호하고 어려운 법률적 언어를 사용하여 일반시민이 법률적 지식에 다가가기 계속 힘들게 만드는가?

사실 판사들은 해당사건에서 무엇이 공정한지 결론을 내릴 때 눈앞에 있는 증거로부터 결론을 끌어내지, 법조항이나 판례로부터 추론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들의 문제를 시간이 늘 부족한 변호사에게 제대로 이해시키는데 어려움을 겪으며 또 그들에게 값비싼 수임료를 지불해야하는 상황으로 더욱 몰리고 있다.

 

이제 “경제문제나 사회문제에 대한 법원의 판결은 판사들의 경제철학과 사회철학에 의존”하게 되었고 사회가 나아가려는 방향의 맥박과 그것의 분출이 일어나면 언제나 그것은 법의 심문에 붙여진다. 이것은 법적으로 정당한가?!

 

나는 여기서 기술전체주의를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전문가들로 구성된, 전문가들이 결정한, 전문가들에 의해서 관리되는 사회말이다.

 

마지막으로 <베이비시터가 된 장인들>에서는 과학적 관리가 얼마나 비인간적 개념인지 설명해준다.

매니지(manage)라는 영어단어는 ‘말을 길들이다’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maneggiare'(마네기아레)에서 왔다. 즉 말에는 채찍과 당근이 필요하며 노동자를 말을 길들이듯이 다루는 기술이 manage(매니지)이다.

즉 “모든 가능한 형태의 두뇌노동을 작업장에서 제거하여 기획 또는 설계부서에 집중시킬 것”을 과학적 관리자의 아버지인 프레드릭 테일러는 주장했다.

 

노동자가 숙련노동기술을 가지면 독립성↑- 노동비용↑-권한↑-그러면 임금↑

따라서 독립성↓-저급기술로 대량생산을 유도하면 임금↓이므로 노동의 질을 떨어뜨리는 것이 효율적이고 이윤에 적합하다.

노동자=일손(손만 필요하다: 머리와 몸은 따라 오는 것)

 

“노동자의 노동시간이 무의미하고 지겨운 파편화된 일로 바뀌면 여가 또한 소비를 위한 산업이 된다.” 이때 다시 전문가들이 등장한다.

피트니스 전문가, 여행전문가, 심신안정 전문가, 의료전문가,...

그들이 우리에게 휴식을 위한 더 효과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럼 어쩌자는 것인가?

무엇을, 언제,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만들지 노동자가 결정해야 한다. ‘대량생산체제에서 시스템이 역생산성을 낳는다’는 것을 기억했다면 지금 이 체제를 계속 지지하는 것에 잠시 천천히 물음을 던져봐야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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