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4.1 쓴 글이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었을 때 느꼈던 감동에 비하여 무의미의 축제는 솔직히 뭐가 좋은지 잘 모르겠더라구요.

하지만 그래서 더 알고 싶어서 계속 머릿속에 남아서 책은 이미 다 덮었지만 마음속으로는 계속 이 책을 읽고 있는 기분이랄까 아직 다 못 읽은 찝찝한 기분 탓에 무언가를 적어야겠고, 그런 다음에야 잠시나마 이 책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소설이 저널리즘과 다른 이유가 소설을 읽고 나면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충동이랄까 동기부여를 주기 때문이라 합니다. 그래서 좋은 소설과 나쁜 소설은 독자에게 감동을 통하여 뭔가를 던져주는지로 갈라지.

쿤데라의 무의미의 축제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는 무엇일까요?

 

등장인물 중 알랭을 따라가 보면 엄마와 자신을 연결해주는 배꼽이 나옵니다. 이 배꼽이 있고 없고가 인간과 천사의 구별표시이며, 신에 의해 창조된 최초의 여자 하와와 그 뒤의 여자를 구별시킵니다. 작가는 이러한 구분, 경계에 대해 깊이 생각한 듯합니다. 신의 의도로 만들어진 하와에게는 배꼽은 없지만, 존재 자체심히 보기 좋았더라는 말처럼 유의미했습니다. 애초에 누구의 어머니도 아니었고 자연과 신의 질서 속에서 하나의 모습으로 있었다면 그 후의 여자들은 물론 다릅니다.

 

작중에서 알랭의 어머니는 임신을 원치 않은 상황에서 알랭을 가지게 되고 태내의 알랭을 품은 상태로 물속에 들어가 자살을 하려 합니다. 하지만 구해 주려고 물속으로 뛰어든 젊은 남자를 죽이고 대신 그녀와 태 속의 아이는 물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이 부분은 오디세우스의 이야기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세상에 나온 아들 대신에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사람을 죽이고 대신 물 밖으로 나온 인간의 원형을 상상하게 됩니다. 그래서 배꼽으로부터 떨어지기도 전에 살해한 알랭은 원초적인 죄의식을 안고 있습니다.

누군가와 부딪쳤을 때 미안합니다라며 먼저 사과할 수밖에 없는 사과쟁이인 것이죠.

 

이 세상에서 더는 의미나 신의 질서를 구할 수 없게 되었고 여자들이 배꼽을 드러내놓고 이를 예쁘게 전시하는 시대, 더 이상 생명존중이나 신의 질서를 기대할 수 없다는 현실 인식을 드러냅니다. 단지 흔적처럼 남은 알랭의 배꼽, 젊은 여자의 배꼽을 통해 사과쟁이들의 세상을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혼잣말로 읊조릴 뿐입니다.

 

또 다른 작중인물로 스탈린과 오줌을 참지 못하는 칼리닌의 관계 역시 머릿속에서 계속 남아있습니다. 작가는 이런 환유로 어떤 의미를 만들고 싶은 걸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게요. 이 소설이 저를 고양시켰냐구요?

인생이란 출생도 죽음도 무의미한 순간입니다. 그 속에 스탈린과 칼리닌처럼 독재자와 그의 충실한 관료도 우스꽝스럽습니다.

언어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인 경계를 허물 수 없음을 깨달은 두 연극배우는 그들만의 언어 허구의 파키스탄어로 연극을 합니다. 차라리 사람들의 언어를 못 알아듣는 체해야지 다른 사람들이 안심하고 경계를 풀고 그들을 인간적으로 품을 수 있을 테니깐요. 이처럼 쿤데라의 소설은 등장인물의 상황묘사, 인물 설,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큰 주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단지 직접적인 언어가 아닌 간결한 문체에 담긴 소설적 양식을 통해서요.

 

어떤 소설적 양식이냐구요? 첫째는 환유, 은유를 통해 사실을 농담처럼 드러내고 두 번째는 깊은 사색의 통찰을 아포리아로 얘기한다면 그러한 아포리아를 소설적 구조 속에 벽돌처럼 잘 끼워 넣어서 집을 지었다고 얘기할 수 있겠네요.

 

시간이 지나서 이 책을 다시 읽게 된다면 또 다른 인물을 통해서 다른 색깔로 칠해진 다른 벽돌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하며 이제는 이 책을 덮으려 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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