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진언니와 나는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위헌 또는 합헌에 대한 결정이 내려지기 전에 이에 대한 언론의 방향에 영향을 주고 여성의 인권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는 책을 펴내고 있습니다. 이 쪽 분야에서 오랜 기간 활동해왔던 희진언니의 영향으로 참여를 하긴 했지만 난 이 집필진들의 의견에 대해 조금은 다른 우려가 있기도 합니다. 집필진에서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분위기와 사뭇 한 쪽으로 편향되면서 눈을 가리고 있는 것도 보이지만 언니의 위치로 인해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와중에 동생 해수는 임신을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나는 조금 더 그 우려심이 강해지며 결국 집필진 모임에서 하나의 의견을 피력합니다. 비록 잘못된 의견은 아니지만 다른 의견이었으며 이는 도덕적 우위를 잃지 않기 위해 눈 감아야 했던 희진언니에게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낙태죄에 대한 결론은 이미 과거의 결론이므로 우리는 모두 그 결과를 알고 있지만 그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집필진들의 말과 행동, 자세, 대화에서 하나의 이슈를 다루는 집합체에서 발생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습니다. 이는 단지 낙태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에 팽배한 다양한 이슈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조한흠은 어릴적 품에 끼고 다니던 만화책 라이파이를 좋아했었습니다. 어릴적 통행금지가 한창이던 눈 앞에서 한 행인이 경찰에게 맞고 쓰러지는 장면을 적나라하게 본 그는 라이파이를 품에 숨긴채 마음도 눈도 숨겼습니다. 시간이 흘러 조한흠은 나이가 들어 집을 떠나 아들 영우의 집으로 찾아가고, 영우는 머쓱하지만 아버지 조한흠과 함께 지내게 됩니다. 그런데 조한흠은 루이소체 치매라는 알츠하이머 병을 진단받게 되고, 원래부터 이상하고 괴팍하던 성격은 환각과 환시까지 찾아오게 됩니다. 불현듯 갑자기 가고싶어서 찾아간 내몽골 여행지, 그곳에서 조한흠의 증세는 더 심해지고 아들 영우의 눈에는 아버지가 곧 라이파이가 되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내몽골에서 조한흠은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라이파이가 되는데, 그 과정을 통해 생각할 꺼리를 많이 던져줍니다.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세상에는 라이파이의 돌려차기가 필요한 게 아닌가, 나도 그런 라이파이를 기다리는 어른이가 아닌가 싶습니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고 솔직하게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