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경사 바틀비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허먼 멜빌 지음, 공진호 옮김, 하비에르 사발라 그림 / 문학동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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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

월스트리트,
세계에서 가장 민감하고 빠른 곳, 거대한 숫자들이 움직이고, 숫자에 따라 더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는 곳. 매력적인 고전소설의 무대라 치기엔 너무 현대적이고 바쁘고 비인간적인 곳이 아닐까. 이런 곳에선 어떤 인간적인 드라마도 있을 것 같지 않은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왠지 여기서 나올만한 드라마는 어떤 걸까 하는 생각에 책을 펼치게 되었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처음엔 재미있는 캐릭터라고 생각했다. 변호사 사무실에 필경사로 취직한 바틀비, 하지만 그는 점점 그에게 주어진 일을 하지 않으려 한다. 피고용인의 입장에서 주어진 일을 하지 않는다는 건 피고용인의 입장을 포기하겠다는 게 아닌가? 파업이라면 이유나 원하는 결과가 있을텐데, 바틀비는 그런것 또한 요구하지 않는다. 이 사람이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또 바틀비의 이러한 소극적 저항이 의미하는 건 뭘까?

중간중간에 나오는 스페인 화가?의 삽화들은 쓸쓸한 내용과 너무도 잘 맞는다. 소극적 저항으로 일관하다 결국 감옥에서 쓸쓸하게 죽게 되는 바틀비. 그림으로 그려진 그의 검은 눈과 마른 체격은 무표정한 얼굴로 '안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하는 바틀비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바쁘고 빠른 월스트리트 한가운데에서 소외된 모습의 바틀비, 어찌 보면 세계에서 가장 바쁜 도시 서울 사람들의 한 단면이 아닐까? 거대한 흐름에 쫒기며 아무것도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하고 도태되어 가는 사람들. 한 사람으로서의 그들과 나의 모습을 바틀비를 통해서 본다.

거대하고 바쁘게 흘러가는 조류 속에서 서있는 바틀비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건네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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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스!
햐쿠타 나오키 지음, 권일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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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너리즘에 빠질 때가 있다.
이것도 저것도 시들할 때, 그럴 땐 어느 하나에 맹목적으로 매달려 그 하나로 밀고 나가는 청춘들의 이야기를 꺼내들곤 한다. 내겐 만화책 <슬램덩크>가 그랬고, <BECK>이 그랬다. 좋아하는 것 하나로 무식하리만치 밀고나갈 수 있는 청춘, 십대 때의 나부터, 지금의 나까지, 그런 시절이 있었던가 싶다. 그래서 조금은 현실성 없이 하나에 매달릴 수 있는 그들이 부러운건지도 모르겠다. 그런 이야기를 읽고는 한참을 그들의 열정에 휩싸여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나로 재충전되는 것도, 청춘의 이야기를 읽는 하나의 이유다.

좋아하는 것 하나로 밀고나간다는 건, 그만큼 다른 것들을 포기할 수 있는 용기가 있다는 말이다. 아니, 그것이 포기인지 뭔지도 모른 채 앞만 보고 달려나간다는 거다. <복스!>의 주인공들은 묵묵히 복싱에 청춘을 바치는 이들이다. 그들에게 이기고 지는 건 상관 없다. 그저 진다면 자신의 실력이 부족함을 알고 더욱 매진할 뿐이다.

복싱이라니, 서로 싸우는 스포츠가 아닌가. 조금 야만적이고, 못볼 스포츠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무한도전에서 우리나라 소녀와 일본의 소녀가 싸우는 복싱 특집을 보고는 그야말로 정직한 스포츠임을 알았다. 최근에 화제가 된 아마추어 권투선수 이시영 또한 이런 매력에 빠진 것일 거다. 서로의 강함을 대결하고,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는, 무엇보다 룰에 따라 강함을 겨루는 정직한 운동. 시합 땐 원시적인 공격성이 보이지만, 결과에는 어느 누구도 불복하지 않는다는 단순명료한 진리. 텔레비전에서 보고, 또 책으로 보니 참 멋진 스포츠라고 생각이 바뀐다.

아, 이런 스포츠 소설에서 꼭 나오는 구도가 있다. 천재와 노력가. <복스!>에서 또한 복싱에 타고난 재능을 보이는 소년과 묵묵히 한걸음 한걸음씩 자신의 실력을 닦아 강해지고자 하는 소년이 있다. 그들은 둘도 없는 친구이기 때문에, 때론 서로에게 좋은 자극제이며 때론 둘도 없는 같은 편이다. 처음에, 이 둘은 모두 어리다. 타고난 소년은 세상 무서운 줄을 모르고, 노력가 소년은 복싱이라곤 해본 적도 없는 모범생일 뿐이다. 그들이 같은 학교의, 같은 복싱부가 되어 하나하나의 시합을 거쳐가면서, 자신보다 강한 이들, 자신을 위해 진심으로 응원해주는 이들과 만난다. 하나의 만남은, 그것이 무엇이든 그들에게는 성장 촉진제이다. 스스로 자라나는 청춘들. 이름만으로도 반짝반짝 빛난다.

길고 긴 소설을 그들과 함께 했다. 웃기도 웃고, 울기도 울면서, 새삼 하나에 이렇게 매진할 수 있는 용기와 정신력이 부럽기도, 나 자신을 돌아보기도 한다. 그리고 다시 리프레싱되는 나 자신을 본다. 순수한 정신력이란 그 자체로 얼마나 기쁜지. 고루한 어른처럼 이것 저것 재는 것 따위 일시에 그만 두게 된다. 청춘소설의 매력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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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펜스 기숙학교의 마녀들
리바 브레이 지음, 이원경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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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펜스 기숙학교의 마녀들
 
음울하고도 아름답고 우아한 분위기의 고딕 양식은 특유의 매력때문에 자꾸 손이 가게 되는 소재중의 하나다. 물론 대다수의 이야기들은 이 분위기만을 사용해 겉만 번지르르한 이야기들이었지만, 자꾸자꾸 '이번엔 괜찮겠지?' 하고 사게 되는 것이다.
이 책 <스펜스 기숙학교의 마녀들> 또한 그런 약간의 의구심을 가진 채 또 한번 집어든 책이다. 어둡고 반짝거리는 표지에 달 문양과 나뭇가지 모양의 책표지. 거기다 빅토리아 시대와 고딕 양식이라니. 또 한번 상상속으로 떠날 준비가 된 것이다.
 
읽고나니 든 생각 하나.
아아. 이건 내가 해리포터 속으로 빠져들었던, 바로 그 루트다!
 
주인공 제머는 어머니의 의문의 자살때문에 괴로워한다. 그 뒤로 보이는 환상들은 그녀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영국의 스펜스 기숙학교로 들어간 뒤, 그녀 특유의 씩씩함은 그녀 주위로 친구들을 몰려들게 하고, 그녀가 겪는 묘한 환상과 환상 속에서 튀어나온 '일기장'은 음울하고도 우아한 신부수업학교, 스펜스 기숙학교에서 아름다운 소녀들의 클럽이 공유하는 하나의 위험한 비밀이 된다.
 
단순히 재미로만 쳐도 이 책은 충분히 성공적이다.
엄마의 자살 이유와 그 의문을 풀어가는 과정, 여자 친구들 사이의 보이지 않는 질투와 우정, 이계세계라는 신비함과 우아하고 아름답지만 그로테스크한 학교의 풍경까지. 끊을 데에서 끊고 펼칠 데에서 펼치는 이야기 자체의 재미가 굉장하고, 소녀들의 클럽과 이계세계로의 연결이 개연성있고 왠지 있을법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순수한 이야기적 재미 말고도 이 책에는 주목할 만한 점이 하나 더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소녀들의 '성장기제'라는 것이다. 소녀들은 친구의 상실과 그 결과로 한단계 더 성장하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인생에서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 즉 수동적으로 좋은 남편을 만나기 위해 프랑스어를 배우고, 독서를 하고, 예법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 독서를 하고 친구를 사귀는 법을 알게 된다.
 
그것이 좋지 않은 마법의 세계일지 몰라도, 그녀들 스스로에게는 분명 성장기제의 하나일 것이다. 성장의 과정이 어찌 밝을까. 이리저리 방황하고 부딪치고, 깨지고, 울어가며 겨우 손톱만큼 자라는 것이 바로 성장 아닐까. 우리나라의 여중, 여고나 영국의 스펜스 기숙학교나 여학생들의 정서는 비슷한 것 같다. 치고 박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그리고 나중엔 후회하며 한줌씩 성장하는 것 말이다.
 
내겐, 재미와 의미를 같이 주는 책 한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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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5
이반 투르게네프 지음, 이항재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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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차이, 그 고루하고도 신선한 흐름 <아버지와 아들>  

 

러시아문학은 문학 수업시간에만 주구장창 들었을 뿐 사실 읽기가 쉽지 않았다. 톨스토이, 도스토 예프스키, 목로주점, 나나, 이 낯설고도 친숙한 이름들이란 기실 읽어봐야지 하고 책을 집었다가도 외우기 결코 쉽지 않은 길고 어려운 이름들에 금방 놓아버리게 했던 것이다.

자, 이번엔 큰 마음을 먹었다. 지인이 '이 책 정말 재밌어.' 후회 안할걸? 하고 건네준 책 <아버지와 아들>. '어려워보여!' 하고 밀어놓다가 슬금, 집어들었다. '이번에야말로'하는 오기. 거기다 이 책이 19세기의 가장 훌륭한 소설이라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추천사까지!

어려우면 그만 둘테다. 하는 처음의 생각과는 다르게 책장을 술술 넘어갔다. 어라, 하는 사이에 100페이지가 지나버리고, 재밌는데.. 하는 사이에 책장이 덮였다. 이게 바로 러시아문학의 매력?

'너희 젊은 것들은...' '요즘 어린 아이들은..' 이라는 말을 안 듣고 자란 세대가 있을까?
이 책에는 보수와 진보로 나뉘는 두 세대가 등장한다. 혁명이라는 말이 낯선 귀족계급의 아버지세대와 혁명에 열광하는 젊은 아들세대이다. 그들은 니힐리즘을 내세우며 모든 것들은 허무하고 의미 없는 것이라 치부한다. 반면에 아버지세대는 원칙과 관습을 내세우며 이것들 없이 사람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느냐고 말한다. 이들의 접점은 없어보인다. 모든 것을 부정하는 세대는 어떤 세대와도 양립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특히나 원칙과 전통을 중시하는 아버지세대들과는 더욱 양립할 수 없다.

그러나 단 한가지, '젊은 날의 열정적인 사랑'은 예외다. 귀족주의에 빠져 탁상공론만 일삼는 아르카디의 큰아버지 파벨과 아르카디의 친구 바자로프는 가장 극심한 대립을 보이지만, 파벨의 젊은 시절 사랑 이야기는 이후 펼쳐진 바자로프의 사랑과 묘하게 겹치며 미소를 짓게 한다. 사랑이라는 것이 원체 '~주의'같은 이성으로는 통제되지 않는 것이다보니, 본인을 니힐리스트라 칭하며 모든 것을 부정하는 바자로프에게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통제되지 않는 감정은 너무나 당황스러운 것이다.

7~80년대 대학생이었던, 우리 아버지 세대를 생각해 본다. 군사정권에 대한 반항과 혁명의 세대. 그러나 내가 자랄 때 싸우고 반항했던 그 아버지 세대는 '보수주의'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그들도 그 이전 세대에 격하게 반항했던 세대였다는 건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아버지 시절의 '음악'을 생각해 본다. 지난 설의 <쎄시봉 콘서트>는 특히 내게 감동이었다. 아버지들의 정서와 젊은 세대의 정서는 다르지 않은 것이다. 같은 음악을 듣고 같은 감성으로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감성은 이념에 우선한다. 그리고 이것이 극명하게 다름에도 같은 정서로 아버지와 아들들을 이어주는 그 매개체인 것이다.

소설 <아버지와 아들>은 만고불변의 진리인 그 세대차이와 세대를 뛰어 넘는 보편의 매커니즘을 흥미로운 이야기로 풀어낸다. 친숙하지 않은 나라, 러시아의 이야기임에도 페이지마다 웃음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까닭은 <아버지와 아들>이 바로 지금 나와 아버지의 모습,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모습이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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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5
이반 투르게네프 지음, 이항재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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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차이, 그 고루하고도 신선한 흐름 <아버지와 아들> 

 

러시아문학은 문학 수업시간에만 주구장창 들었을 뿐 사실 읽기가 쉽지 않았다. 톨스토이, 도스토 예프스키, 목로주점, 나나, 이 낯설고도 친숙한 이름들이란 기실 읽어봐야지 하고 책을 집었다가도 외우기 결코 쉽지 않은 길고 어려운 이름들에 금방 놓아버리게 했던 것이다.

자, 이번엔 큰 마음을 먹었다. 지인이 '이 책 정말 재밌어.' 후회 안할걸? 하고 건네준 책 <아버지와 아들>. '어려워보여!' 하고 밀어놓다가 슬금, 집어들었다. '이번에야말로'하는 오기. 거기다 이 책이 19세기의 가장 훌륭한 소설이라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추천사까지!

어려우면 그만 둘테다. 하는 처음의 생각과는 다르게 책장을 술술 넘어갔다. 어라, 하는 사이에 100페이지가 지나버리고, 재밌는데.. 하는 사이에 책장이 덮였다. 이게 바로 러시아문학의 매력?

'너희 젊은 것들은...' '요즘 어린 아이들은..' 이라는 말을 안 듣고 자란 세대가 있을까?
이 책에는 보수와 진보로 나뉘는 두 세대가 등장한다. 혁명이라는 말이 낯선 귀족계급의 아버지세대와 혁명에 열광하는 젊은 아들세대이다. 그들은 니힐리즘을 내세우며 모든 것들은 허무하고 의미 없는 것이라 치부한다. 반면에 아버지세대는 원칙과 관습을 내세우며 이것들 없이 사람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느냐고 말한다. 이들의 접점은 없어보인다. 모든 것을 부정하는 세대는 어떤 세대와도 양립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특히나 원칙과 전통을 중시하는 아버지세대들과는 더욱 양립할 수 없다.

그러나 단 한가지, '젊은 날의 열정적인 사랑'은 예외다. 귀족주의에 빠져 탁상공론만 일삼는 아르카디의 큰아버지 파벨과 아르카디의 친구 바자로프는 가장 극심한 대립을 보이지만, 파벨의 젊은 시절 사랑 이야기는 이후 펼쳐진 바자로프의 사랑과 묘하게 겹치며 미소를 짓게 한다. 사랑이라는 것이 원체 '~주의'같은 이성으로는 통제되지 않는 것이다보니, 본인을 니힐리스트라 칭하며 모든 것을 부정하는 바자로프에게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통제되지 않는 감정은 너무나 당황스러운 것이다.

7~80년대 대학생이었던, 우리 아버지 세대를 생각해 본다. 군사정권에 대한 반항과 혁명의 세대. 그러나 내가 자랄 때 싸우고 반항했던 그 아버지 세대는 '보수주의'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그들도 그 이전 세대에 격하게 반항했던 세대였다는 건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아버지 시절의 '음악'을 생각해 본다. 지난 설의 <쎄시봉 콘서트>는 특히 내게 감동이었다. 아버지들의 정서와 젊은 세대의 정서는 다르지 않은 것이다. 같은 음악을 듣고 같은 감성으로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감성은 이념에 우선한다. 그리고 이것이 극명하게 다름에도 같은 정서로 아버지와 아들들을 이어주는 그 매개체인 것이다.

소설 <아버지와 아들>은 만고불변의 진리인 그 세대차이와 세대를 뛰어 넘는 보편의 매커니즘을 흥미로운 이야기로 풀어낸다. 친숙하지 않은 나라, 러시아의 이야기임에도 페이지마다 웃음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까닭은 <아버지와 아들>이 바로 지금 나와 아버지의 모습,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모습이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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