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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벳의 악마
존 딕슨 카 지음, 유소영 옮김, 장경현 감수 / 고려원북스 / 2009년 4월
평점 :
사극을 크게 세 종류로 나누면, 첫째는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극으로서 실제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여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극적인 재미를 곁들여 구성한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장금>이나 <허준>은 그들에 대한 사료가 극히 적고, 특히 ’장금’은 실제 사료에 몇 번 언급된 사실만으로 구성된 작품이므로 사실과 극의 비중은 작가의 재량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요.
두 번째는 박경리의 <토지>, 츄바이크의 <베르사유의 장미>와 같은 작품으로서 주인공 및 주요 등장인물은 가상 인물인데 극중에 실제 인물도 다수 등장하고 실제 역사적인 배경을 다루되,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있었음직한 일에 대한 극입니다.
세 번째는 송지나의 <대망>, 얼마 전 KBS에서 했던 <쾌도 홍길동>처럼 배경만 막연한 옛날이고 완전히 꾸며낸 이야기입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벨벳의 악마>는 두 번째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두 번째 유형을 가장 좋아하지요, 그리고 사극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라면 저는 개인적으로 재미와 고증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작품은 두 가지를 모두 제대로 만족시키고 있습니다.
우선 설정부터 대단합니다. 악마와 계약하여 17세기로 돌아가 자신이 닉 경이 되어 그의 몸을 지배해 역사를 바꾸려 하는 펜튼 교수, 하지만 분노로 이성을 잃으면 원래의 닉 경이 다시 몸을 찾게 된다는 설정이 정말 흥미진진하고요.
질투에 사로잡힌 닉 경의 여인들과, 펜튼이 닉 경의 몸을 갖게 된 후 그의 태도 변화에 혼란해하면서도 그를 따르게 되는 하인들에 대한 묘사도 생생하고, 상당히 두꺼운 책이라 자칫 늘어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군더더기 하나 없는 깔끔하고 탄탄한 진행, 박진감 넘치는 검술 장면 등은 읽는 이에게 감탄만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시대 언어와 사람들 습관 등에까지 신경을 쓴 상세한 고증은 진정한 사극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렇게 훌륭한 작품이 왜 이제야 나왔을지 모를 정도입니다.
옥의 티가 있다면, 펜튼 교수가 살았던 시대는 1925년, 돌아간 연도는 1675년, 즉 250년 전인데 표지에는 240년이라고 되어 있더군요, 그리고 막판에 펜튼 교수의 마음이 그렇게 쉽게 변하는 이유가 조금 납득이 되지 않았고 메리 그렌빌과 메그 요크의 관계에 대한 설명은 솔직히 부족했습니다. 그리고 추리소설로서의 트릭(독살 방법)이나 반전은..., 요즘 시대에는 조금 식상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몇 년 전에만 나왔어도 크게 놀랐을 텐데, 그 점이 아쉽군요. 하지만, ’재미’만은 확실합니다.
이렇게 좋은 작품을 보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