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지론 - 아우구스티누스의
아우구스티누스 지음, 박일민 옮김 / 야웨의말씀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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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와 2부로 나누어진 책이다. 1부는" 자유의지에 관하여" 저술하였고 그와 관련하여 2부는 "자유의지와 은혜에 관하여 "저술하였다.

1부에서는 저술의 목적이 담겨 있는데 내용을 잠깐 살펴보자면 (옮긴이의 해설)

마니교를 반박하기 위해, 그러나 단순히 부정적인 논박에서만 머물지 않는다. 이 글은 악이 어디에서부터 왔는가 하는 문제를 영지주의자들의 경우처럼 절대적인 이원론을 방편으로 하여 해결하려 했는데 마니 교도들의 궁금증을 상대로 합리적인 답변을 시도한다. 따라서 사실상 주제는 악의 본질과 그 기원을 밝히려는데 있다. 그러나 이성적 피조물의 자유 의지 안에서 있는 것이므로 "자유 의지에 관하여"라는 제목이 붙여지게 되었다. - (p. 11 )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적 무기를 폭넓게 사용하여 마니교를 논박하면서 펠라기우스주의에도 측면 공격을 가하고 있다. -( p.12 )

 이 글을 쓰는 당시에는 펠라기우스주의가 아직 나타나기 전이라고 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마니교의 오류를 피할  있게 해주고 또 자유 의지를 온전히 하나님의 선물로 여길 수 있도록 해주는 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도우심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고 적고 있다.-(p.13 )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선한 것들 즉,  선, 중간 선, 작은 선, 모든 선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음을 말하면서 자유 의지를 중간 선에 속한다고 서술한다. 사람은 이것을 선하게 사용할 수도 있고 악하게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자유의지 자체는 선하다. 고 말한다. 왜냐하면 자유 의지가 없으면 정의롭게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덕"  이 덕은 아무도 악한데 사용하지 않기에 우월한 선에 속하며 모든 선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고 정의하고 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의 생각에 따라 즉 자유 의지에 따라 죄를 범할 수 있으나, 그것을 자기 스스로 회복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 한 것이다. 

위의 내용은 아우구스티누스의" 회고록"에 서술한 내용이다. 또 구약성경의 원죄를 기록한 말씀을 인정하지 않는 마니교도들을 반박한다.

그러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들은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멀리하는 신구약 성경에 기록된 모든 내용들을 다 지켜야 한다. 신구약의 말씀들은 모두가 성경 말씀이기 때문이다.]- (p.16 ) 


 1권은 에보디우스라는 인물과 토론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으며 악의 기원, 하나님이 왜 악이 조성자가 아님을 토론한다. 이런한 내용으로 자유 의지에 대한 내용들이 들어 있다. 신학 서적을 읽을 때마다 나의 한계를 안다. 왜냐 하며 한국어임에도 불구하고 읽는 것이  얼마만큼 어렵다는 것을 느낀다. 이 책 1부는 플라톤적인 철학적 사조와 헬라 문화적인(Helleism) 영향이었는지 난해하다.


 2부에서는 발레티누스와 아드루메툼 수도사들에게 보내는 글로서 [은혜를 강조하기 위해 자유의지를 부정하거나, 자유의지를 강조하기 위해 은혜를 부정하는 것에대한 경고를 하며 사람들에게 의지의 자유로운 선택이 있음과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어떠한 선도 행할 수 없음을 증명한다. 또 펠라기우스 주의자들에 맞서 은혜는 우리의 공로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증명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혜란 율법이나 본성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며, 단순히 죄의 용서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님을 설명한다. 그리고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쓸데없이 내세우는 "은혜가 비록 선행에 대한 대가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믿거나 기도하는 사람에게서 예상되는 선의지에 대한 대가로 주어진다".고 하는 주장을 무너뜨린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친히 주시는 것을 왜 명령하고 계시는지에 대한 문제와 함께, 하나님께서 과연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명령하셨는지에 대한 문제를 의도적으로 취급한다.(중간 생략) 은혜가 우리의 공로에 대가가 아니라 값없이 거저 주어진 것임에 대한 분명한 증거를 제시한다.]- P215.216 기독교 변증과 도 같으며 강설로 구성되어 있어 누구라도 읽어 본다면 그리스도의 향기가 느껴진다.


그만큼 성경을 보는 관점과 그의 지식 수준이 보통이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닌가? 성경 연구를 얼마만큼 하였는지 그의 노고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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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 그리스도인 - 거의 그리스도인이 될 뻔한 사람 잉글랜드 P&R 5
매튜 미드 지음, 장호익 옮김 / 지평서원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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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신자의 근본은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그러나 순종에도 그 마음의 정직함에서 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를 모른다면 외식하는 자와 같다고 한다. 즉 "경건의 모양은 있어나 실상은 죽은 자(딤 3:5)" 이 순종에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며 마음가짐과 실천하는 행동도 같이 조화를 이루며 행하여 질 때 참 성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매튜 미드 목사님의 이 책은 11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읽어가면 갈수록, 마음 한편으로는 송곳으로 찌르는듯하여 여간 불편함이 가시질 않는다는 것이다. 나에게 적용하여 읽는다면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감을 하는 내용들이다.


 과연 나는 참 그리스도인 인가? 거대한 신앙고백을 하고도 거의 그리스도인이 될뻔한 사람이 아닌지, 우리는 매일매일 점검하며 검증 또한 해야 한다.

 

 다음과 같이 나 자신에게 질문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복음적인 입장에서 그리스도와 침밀합니까?

 여러분은 은혜가 여러분 행위의 으뜸 되는 원인입니까?

 여러분은 의무의 주제뿐만 아니라 의무의 양식도 살핍니까?

 여러분은 순전합니까?

 여러분의 내부에는 외부의 율법에 상응하는 것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의무를 행하되 의무 이상으로 행합니까?

 여러분은 모든 계명에 순종합니까?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모든 것의 목적입니까?


이 같은 질문의 시금석으로 자신을 검증해 보십시오.

 

 

 많은 사람이 복음의 특권은 사랑하지만 복음의 의무는 사랑하지 않습니다. -(p 218)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분의 죽음의 공로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삶의 양식까지 따릅니다. 그분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사랑합니다 .-중략-  그분을 자신 의의로 생각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지혜도 사랑합니다. 또한 자신의 구속으로뿐만 아니라 자신의 거룩으로도 생각합니다. - (p218) 의무를 다 행한다고 그리스도인은 아니라고 하며  그 의무를 행함에도 신실함이 없으면 유사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매튜 미드 목사님은 이 글의 쓴 목적의 의도로 성경적 근거를 제시해줌으로서 "잠자고 있는 형식적인 신앙 고백자들을 깨우는 것과 위선자들을 분별하는 것"이며 이 일을 함에 있어"상한 갈때를 꺾거나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기" 위함이라고 밝힌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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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진정한 신앙감정(참된 신앙 감정) 이란 참된 영성 혹은 진정한 신앙은 "영혼이 가진 의지와 성향이 역동적이고 생기 있게 움직이는 마음의 열렬한 활동" 곧 감정이라고 에드위즈는 정의한다.

신앙 감정이 없는 사람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요, 그 마음에 하나님의 성령의 구원하시고 살리시는 실제가 없는 사람이다 - p69

위의 말을 요약해 본다면 이렇다. 기도와 찬양과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성도는 감정으로의 감화가 오며(되며),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표현으로 나타낸다는 것이 에드워즈의 말이다(신앙 체험). 1740-1742 1차 대각성운동으로 알려진 때 조지 휘필드의 설교와 에즈워드가 살고 있든(노샘프턴)의 사정과 사건(성도들의 신앙 체험) 들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서 신앙 감정론이라는 이 책의 배경과 에즈위즈의 신앙고백의 글도 함께 있어 접근하기가 조금은 쉽게 여겨진다. 그런데 어렵게 느끼는 부분이 있다면 같은 명제를 사용하면서도 한 가지 답이 아닌 이중적인 명제의 답으로 서술하는 것이 특이하면서도 이해를 못 하는 부분도 있어

 어렵다고 느낀다. 몇 번이고 더 읽어 봐야 하는 부분인듯하다.(더 읽어 봐도 모르겠음 정말.... ) 감정의 표현을 성경에 근거로 제시하고 있어 마음은 그런 거구나 하고 안도의 숨을 쉬지만 사실 에드워즈의 설명은 이해가 되질 않는 부분이 더러 있다. 어려운 것이 다른 것이 아닌 사람의 감정을 두고 사건, 체험 종교적 현상과 같이 부정적인 표지들을 제시하면서도 이러 표지들로 성령의 사역이 아니다. 결론 내려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일들은 성령 역사의 결과일 수도 있지만, 또한 인간의 연약함이나 감정의 불안정에서 비롯되었거나 부흥사들의 조작의 산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라고 그의 서문에서 볼 수 있다. 또 성경은 이런 일들에 대한 판단의 준거로 삼을 수 있는 명백한 기준을 제시하지 않는다.라고 적고 있다.


이 책의 저자인 신학자 샘 스톰즈의 해설이 우리 신앙인의 바른 감정의 자세를 제시해 준다

우리 교회와 부흥

회에서 참된 회심의 증거로 자주 여겨지는 것들은, 외적인 종교적 의무를 행하는 데서 오는 자의적인 기쁨이거나 영혼에 있는 영적인 불안함을 잠재우려는 일종의 심리적 진정제일 뿐이라는 것. - p 217


사람의 감정은 어떠한 사물이나 어떠한 말에 귀 기울일 때 그 감정이 표현으로 행할 때가 많다 가령 행복하고 칭찬의 말을 들을 때, 아름다운 사진이나 그림을 보았을 때 즐거운 노래를 부른다든지, 노래와 함께 춤을 춘다든지 등으로 표현하는 것들이 인간의 감정 표현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령의 내주하심 일 때에는 믿음에 대한 순종(감정의 표현)이 난타 나야 한다는 것, 표현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씀하신다. 더욱이 베드로 전서 1:8에 언급한 "기쁨"에서 나타나는 신앙인의 감정을 말하고 있다. 에드워즈 목사님은 성경의 근거한 여러 가지 사람의 여러 가지 반응(표현, 행동) 감정들을 잘 정리하여 이 시대에 올바른 신앙의 감정이 무엇인가에 답하고 있으며 또 진정한 감정과 그 감정이 성령님의 내주함심,(성령의 사역)에서 나타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감정들을 대조적으로 잘 설명해 줌으로써 우리들에게 분별하게 해주는 참 좋은 길잡이의 책이다. 그렇지만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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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믿을 것인가 - 시대의 지성 김형석 교수가 전하는 올바른 신앙의 길
김형석 지음 / 이와우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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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에 우려와 염려가 가득 담긴 이야기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과 모든 종교인들에게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준다. 특히 기독교에 관련하여 잘못된 신앙관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준 교훈과는 사뭇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도 이야기한다. 자신에 평생을 살면서 겪은 일들을 통하여 고치고 바라는 바를 잘 지적해 주어 한편으로는 기독교의 따가운 시선이 집중될까 하는 염려 서러움까지 느껴진다. 교회 목회자도 아니며 그렇다고 신학자도 아닌 평범한 학자의 눈에 비친 오늘날의 교회에 대한 진심 어린 충고와 함께,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과의 공동체적 화합하며 살아가는 교회의 역할 그리고 기독교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 및 자질, 그리스도인이 실천하여야 할 사회참여, 봉사 등 ( 말하자면 이웃에게 대한 봉사 참여, 실천하는 그리스도인 ) 다만 조금 아쉬운 건 지나칠 정도로 인문주의(humanism)에 대한 애찬을 담고 있어 기독교의 본년의 이념을 망각하게 하는 착각의 글로도 보일 수 있다고 여긴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우선 전제되는 것이 이 글에는 빠져있어 아쉽게 생각한다.

신앙과 교회를 정치의 수단으로 여겨선 안되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흔히 선거철 때면 정치인들이 종교계의 지도자들과 만남을 TV를 통해서 접하기고 한다. 정치인들이 종교계의 지도자들과의 만남을 어떠한 의미로써는 좋게 보지 않는 시각도 더러 있다.

기독교의 상하관계란 있을 수 없다. 장로나 목사나 역할의 차이일 뿐 신분적 차이는 아닌 것이다. 성도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다 평등하다. 성도들은 목회자들이 하는 말을 따르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지 사람의 말을 따르지 않는 성도들의 인식도 높아져야 할 것이다. "맹신"은 "믿음"보다도 더 위험하다. 이 글의 저자는 폐쇄적인 교회주의를 걱정하면서. 너무 많은 시간을 교회당(예배당)에서 소비하는 것을 염려한다.

"교회생활의 행사가 지나쳐 사회 일을 소홀히 한다든지 인간적인 성장에 지장을 준다면 교회는 더 좋은 방법을 알려주며 그들이 유능한 하늘나라의 일꾼이 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인간적 성정과 사회적인 기여를 덜 해도 좋다는 사고는 삼가야 한다" - P 74. 그렇다고 해서 성경 말씀을 소홀히 하거나 기도 시간을 줄이라는 것은 아니라고 덧붙인다.

"목사가 목회에 관한 관심과 열정보다도 정치를 통해 사회나 국가에 이바지하려는 의지와 신념이 강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교회의 임무를 떠나 정치활동을 하는 편이 본인과 교회를 위해 도움이 될 것이다" - P 87

이분의 따끔한 지적은 "정신적 지도자가 되고 종교적 가치를 전해주어야 할 목회의 지도자들이 명예욕에 너무 심하게 사로 잡히면 학위나 직책이 더 높은 인격과 학식을 만들어준다고 착각할 수 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옛날의 교훈이 아쉬워진다." - p 99

교회는 재산을 소유하거나 재산 관리를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바치는 곳이 되어선 안된다며 헌금을 갖고 교인들의 기복 신앙으로 이끌어 가서는 안되며, 올바를 경제적 가치관을 모범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한다. 나 역시 저자의 말에 크기 공감한다. 부자는 부자의 나름대로의 경재적 이익을 사회와 소외된 계층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 의미가 남다르지 않겠는가 생각해 본다. 이렇게도 생각해 볼일이다. 헌상이 모여 재정적으로 여유가 생긴다면 가난한 이웃들에게 쓰임은 당연한 것이다. 그 규모가 비록 나라에서 하는 복지정책에는 아주 보잘것없지만 말이다. 그러하기에 국가에 대한 세금도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세금 내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기독교를 일부에서는 너무 배타적이라고들 한다. 맞는 말이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는 다른 구원관이 있기 때문이이다라고 말해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즉 성경의 권위와 창조주 하나님이 진리 이기 때문이다.여기에 대해서 저자는 조금 소홀히 다루는듯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여러 가지 한국교회에 대한 우려함에 대한 그의 수고와 고뇌가 엿보인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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