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리주의 현대지성 클래식 31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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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주의>가 탈고된 해는 1963년입니다. 나이가 60세가 가까워오던 시간에 쓰여졌습니다. 벤담의 양적공리주의도 비판하고 공리주의에 대한 다양한 비판과 질문에 대한 답변을위해 쓴 책입니다. 두꺼운 책은 아닙니다만 철학적 함의가 많아서 그렇게 쉽지 만은 않을겁니다. 저자가 처한 19세기 중반을 생각하면서 행복, 만족, 이기심,윤리 등에 담겨진 의미를 생각해 볼만하죠. '공리주의'는 행복,효용을 추구하고 이것이 옳은것이라 합니다. 이는 사회적인 이슈로 연결되고, '공리주의'는 사회적인 문제속에 질적으로 행복이라는 면을 끌어올리려 노력한 논리라 보면 될겁니다. 이 책을 통해 공리를 통한 사회적 진보 정의까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저자 존스트어트 밀(1806~1871)는 스코틀랜드에서 태어서 저명한 학자인 아버지로부터 영재교육을 받으며 천재로 성장했습니다. 1923년 동인도회사에 입사해서 1858년까지 재직합니다. 그는 아담스미스의 <국부론>을 비판하면서 제한적인 정부의 시장개입을 옹호했습니다. 그는 1865~7년에는 대학학장으로도 일하고 1866년 자유당소속 하원의원으로 여성참정권을 주장했습니다. 노동조합과 협동조합을 지지한걸로 봐서는 오늘날의 사회민주주의계열로 봐도 되지 않을까합니다.

저자는 쾌락은 모두 같은 쾌락이 아니라 그 질이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만족하는 돼지보다 불만족인 인간이 낫다라고 하고 만족하는 바보보다 불만족인 소프라테스도 언급을 합니다. 이렇게 양보다는 질이라고 저자도 주장은 했지만 여성참정권도 주장하고 공리가 공평과 유사해지는것은 배고픈 돼지보다는 배부른 돼지가 우선이란 생각을 한건 아닌가합니다. 물론 이는 낮은 행복과 높은 행복을 나눠서 추진한것으로 볼수는 있습니다. 19세기에는 불평등이 심했을겁니다. 그 당시 불평등이란 생명을 위협받는 불편등이라면 21세기 불평등은 생존은 보장된 상황에서 확대된 부가 소수에게 몰려서 온 불평등입니다. 19세기와 21세기의 행복의 차이가 질적 행복의 차이가 아니라 이기심을 근원을 한 차이로 보는 것이 더 맞겠죠.

행복이 윤리적인 기준이 되면 사회적 감정의 토대가 됩니다. 이는 문화같은 것으로 그 구성원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겁니다. 이는 행복의 평등과 연결이 됩니다. 문화와 윤리 그리고 사회적 감정은 같은 기준을 설정하는 겁니다. 이는 평등과 유사한 분류가 됩니다. 구성원간에 상호작용이 일어나고 싸움은 극소화시켜서 불평등을 극복하고 정치적 진보를 이루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자는 그것을 하원의원이 되어 실천하고자 했습니다. 물론 짧은 시간이었습니다만, 이러한 과정중에 사람과 사회의 일체화가 이뤄져서 밴덤이 이야기가한 공리주의의 최대 과제를 이뤄가면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의 문을 열게 됩니다.

공리주의의 이러한 개념이 사회적 동의를 얻으면, 법과 제도로 뒷받침해서 좀더 개념이 시너지가 나고 진보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리고 개인도 자신의 이익과 사회의 이익사이에 긍정적인과 부정적인 것들이 끊을수없게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공리주의에서 행복이 가장 중요한덕목입니다. 이 덕목은 사회적 상호주의가 매우 중요하다 합니다. 그러기에 도덕윤리를 중시해야 한다고 합니다. 여론이 형성되고 문화가 형성되는 논리를 보는 듯합니다.

저자는 정의와 불의를 구분하는 5가지 사례를 들었는데, 1.법적권리를 존중하면 정의이고, 침해는 불의 2.도덕적권리의 박탈과 유보, 3.자신의 공로에 따른 좋고 나쁨 4.신의를 지키고 지키지 않음 5.편파적인 거의 옳고 그름 등에 대한 논의를 합니다. 대세는 큰 문제가 없을지라도 소수의 논쟁은 항상있을수밖에 없어보입니다.

자본주의에는 파이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회주의는 작은 파이를 공평하게 나눠 갖는 것이고 자본주의는 파이를 크게 키워서 공평하지는 않지만 풍족하게 나눠먹자는 거죠. 어떤 쪽이 행복하냐에 다라 좌와 우가 나눠질 겁니다. 저자는 노동당계열이지만 공산주의쪽은 아닐겁니다. ^^ 어느 한쪽이 정말 우수하다면 논쟁도 싸움도 전쟁도 없을거지만 두쪽 모두 공리주의를 추구하는 건 맞을 겁니다. 물론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의 기본전제는 부정하기 힘들겠죠. 공리의 기초가 되는 옳고 그름이 다르다보니 우리는 논쟁이 있습니다. 더우기 우리는 이것의 타협이 되질 않아서 사회가 깨질듯 시끄럽습니다. 공리는 양도 중요하지만 질적으로 느끼는 바가 다른 것이 인간이고 그것의 합의는 쉽지 않습니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방법 모두가 다른 것이 인간이고 이것을 합의를 보아가는것이 우리 사회일겁니다. 특정 기준을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다면 초소한 행복한 사람은 많아 지지 않을까하는 단순한 생각이 들긴합니다. 존 스튜어드 밀이 다시 살아나서 듣는 다면 동의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철학적 논의가 꾸준히 이어져서 머리를 쉬지 못하게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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