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선엽을 말한다
유광종 지음 / 책밭(늘품플러스)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6.25의 영웅 백선엽, 그는 1920년생으로 올해 101세십니다. 건강이 정정하지는 않으시고 건강이 안좋다고 하면서 정치권에서는 현충원안장에 대한 논란이 있다고 합니다. 경력상으로 현충원안장은 너무도 당연한 건데, 여당에서 그의 현충원 안장을 반대하는 이유는 일제대 독립군 토벌을 한 만주군 간도특설대 장교로 근무했던 이력때문입니다.- 책에는 이 시기에 대한 백선엽 시각의 기술이 있습니다. - 올해가 625 70주년이라고 합니다. 남북상쟁의 비극인 민족끼리 골육간의 비극을 낳은지 70주년이 되는겁니다. 그 당시 낙동강전투의 영웅으로 33세의 나이로 육군대장에 오른 그를, 정치색을 떠나서 <백선엽을 말한다>로 돌아보는 것도 의미가 클 겁니다.

저자 유광종은 중앙일보에 2001년 입사를 해서 논설위원으로 퇴직을 하신 분이십니다. 기자시절에는 문화부, 사회부, 국제부, 중국권 특파원등을 거쳤습니다. 현재는 중국인문경영연구소 소장을 맡고 계신 중국전문가이기도 합니다. 백선엽장군의 책은 2009년 장군을 인터뷰하기시작하면서 10년간 이어지면서 <백선엽장군의 6.25 징비록> 을 완간했습니다. 이 정도면 박선엽장군 전문가라고 해도 될 듯합니다.

이 책은 백선엽이 태어나기전 그의 부친의 이야기부터 시작을 합니다. 거의 110년전의 이야기가 되겠네요. 현재는 가볼수없는 땅 평양인근이야기가 시작입니다. 똑똑했던 백선엽은 평양사범학교에 진학을 합니다. 지금의 중고등학교를 합쳐논 학교로 5년제로 이곳을 졸업하면 초등학교 교사가 되는 양성학교입니다. 지금은 초등학교 교사가 되려면 각 지역의 4년제 교육대학을 나와야 하지만 그 전에는 교육대학이 2년제였고 일제시대에는 5년제 중고등학교였습니다. 박정희가 대구사범으로 군관학교를 나왔던 점이 두분의 공통점이네요. 그는 보통학교 교사(지금의 초등학교)로 가야하는데 가지않고 일본의 문물을 배우기위해 만주국 군관학교에 입교를하게 됩니다. 여당에서 간도특설단 경력은 그 당시 독립군의 활동은 미미해서 주로 중국군 군벌들과 싸웠던 것으로 피해갔고 백선엽의 싸움상대는 중공군에서 45년 소련군으로 변화됩니다. 그리고 해방이 곧 닥칩니다. 그후 평양에서 독립운동가 고당 조만식선생의 비서가 됩니다. 북한에서 김일성의 권력이 굳건해지자 백선엽은 서울로 탈출을 감행했고, 미 군정치하에서 군사영어학교다닌후 부산에 위관급 장교로 부임을 합니다. 그는 연대장까지 순조롭게 승진을 합니다. 제주4.3때 제주도에 있었는데 바로 서울로 발령을 받아서 제주진압과는 관련이 없다고 합니다. 그를 서울로 이끌어준것은 미군이었다고 저자는 추측합니다.

그는 박정희전대통령을 사형수에서 구해준 이력이 있네요. 한국군 소령이었지만 그는 남로당군사책이었던 것이 밝혀져서 사형이 집행되어야 했는데 백선협이 구해준겁니다. 백장군은 지금도 박정희가 일으킨 516을 찬성하지않지만 그가 이루 경제적 성공은 인정한다고 합니다.

그는 한국군이 된이후 후방에서 미군에게 훈련을 받았고 정보국을 세우는 등 한국군의 토대를 현장에서 맡은 인물입니다. 그의 스타일은 때를 기다리는 방식이었습니다. 미군이 빨치산토벌지시를 내리면 그는 바로 군대를 움직이지않고 군대를 훈련시키면서 작전지역의 주민들을 만나 설명하고 견해를 묻고 협조를 구한후에 토벌을 수행한다는 겁니다. 625전쟁이전까지는 국군의 토대를 잡고, 빨치산토벌이 주업무라고 봐도 되겠죠.

운명의 시계는 625로 달리며 1950년 4월 백장군은 29세나이로 1사단장으로 부임을 합니다. 대령신분이었습니다. 625전쟁은 터지고 급속도로 쫒겨서 낙동강까지 국군은 밀립니다. 그때 백단장이 꺼내든 전술은 지연전이었습니다. 기다리는 겁니다. 미군이 올때까지 준비를 하면서 말입니다. 드디어 부산에 미군이 상륙을 하고 그는 별을 답니다. 백선엽의 1사단은 북한국 주공을 대적합니다. 9천의 병력으로 북한국 3개사단과 전투가 시작됩니다. 김일성은 815일까지 전쟁을 끝내라고 하달합니다. 낙동강전투는 처절해서 하루에 700명이상의 사상자를 만들었습니다. 다부동전투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꺽으면서 전세를 역전되고 맙니다. 그후 북진을 하던 국군과 미군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밀리기 시작합니다.

이승만이 휴전협상의 불만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하는 것에 대해 중공군이 매우 반발했는데 그 이유가 중공군포로가 중공이 아닌 대만을 선택하면 바로 적에게 2개사단을 헌납하는 것이고 세계에게 대만을 행선지로 택하므로 중공의 위신이 떨어지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합니다. 백선엽장군의 전과는 1953년 7월 금성 돌출부전투였습니다. 이 전투는 미군이 참여하지 않은 오직 중공군 24만대 국군3개사단과의 전투로 2.4배의 병력차였지만 중공군이 6만6천명의 희생자를 내고 패퇴했고, 이는 국군의 성장을 뜻하는 전투였습니다.

백선엽은 일본과 미국으로부터 군사학을 전수받았습니다. 특히나 2차세계대전을 승전으로 막 이끈 세계최고의 군대에게서 군사기술을 직접 전수받았다는것이 특징입니다. 그는 미군에게서 인정을 받았고 지원도 이용할 줄 알았습니다. 로튼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의 회고록에서금성돌출부전투의 성공을 보고, 한국군의 성장에 놀라움을 표했고, 미8군 사령관 테일러장군은 백선엽을, 냉정하고 깐깐하고 철저하게 타산적이라고 표현합니다.

백선엽장군이 군을 떠난것은 1960.5월 연합참모회의 의장으로 보입니다. 그후 그의 인생은 중국, 프랑스, 캐나다대사를 거쳤고 박정희시대에 교통부장관을 역임한후에는 1980년도까지 기업체 사장을 지내시고 1990년까지 기업체 고문을 하시다가 은퇴를 하셨습니다. 그를 단순히 43년도 22세의 나이에 만주군소속 장교이어서 친일파로 공격할것이지 아니면 1950년 625의 영웅으로만 칭송할지를 떠나 군인이 아니었던 그가 인간 백선엽이 70세까지 기업체 사장과 고문으로 끊임없이 활동할 수있었던(물론 90년까지가 딱 정치군인의 시대였습니다^^) 그의 리더십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