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미오와 줄리엣 - 논술대비 초등학생을 위한 세계명작 25 논술대비 초등학생을 위한 세계명작 120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송재찬 옮김 / 지경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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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미오와 줄리엣.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이다. 서로의 집안이 서로 적인데도 그속에서 피어난 사랑의 이야기의 스토리로 진행되는 아름답고 슬픈, 그리고 큰 감동을 전해주는 책이기에,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지 않았나 싶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집안들은 모두들 넘부럽지 않은 귀족 집안들의 딸과 자식 들이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서, 가장 생각에 남는 부분이 있다면, 줄리엣이 자신의 집안과 로미오의 집안을 화해 시키기 위하여 약을 먹고 죽은척 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로미오의 귀에는, 줄리엣이 약을 먹고 죽었다고 들어가게 되고, 그렇게 로미오 역시 줄리엣의 길을 따르게 되지만, 그순간 로미오는 일어나는, 그 안타까운 장면이다.

로미오는 약을 마신 상태에서 줄리엣이 깨어나는 것을 보며 돌이킬 수 없는 것을 알았다. 로미오는 놀란모습을 한 줄리엣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그 뒤 줄리엣도 로미오를 따라가기 위해서 총을 이용해 자신도 스스로 자살을 하게 된다. 난 이부분을 읽으면서 무지 안타까웠다. 부모들의 반대에도 굴하지 않고 안타까운 사랑을 했는데.. 끝내 이루지도 못한 안타까운 사랑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만약 로미오가 미리 알았더라면, 줄리엣이 조금만 일찍 깨어 났다면... 하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을 반대하고 두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끝내야만 하게 만들었던 로미오와 줄리엣의 부모님들에게 대한 나쁜 감정도 생긴것 같다. 과연 사랑 앞에, 돈과 명예. 그리고 귀족적 위치가 뭐그리 대단한 소유물이 될까? 그저 사랑하며 더할것없이 행복하기만 하면 될 것을.. 결국 인간의 욕심이 가져온 부작용이었던 것이다.

나는 이생각을 하면서 만약 내가 로미오나 줄리엣의 부모였다면, 하나뿐인 자식을 돈과 명예를 위해 사랑하게 할것인가? 아니면 더할것없이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아가게 할것인가? 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되었다. 물론 생각할 것도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처음에는 나도 반대를 할 것이다. 집안이 원수로 엮어진, 그런 불행한 위치였기 때문에 말이다. 하지만, 돈과 명예의 이유에서라면, 그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아들의 행복을 위한답씨고, 결국엔 그런 명예를 지키려 했을 것이지만, 결국 아들을 죽인, 그리고 딸을 죽인 악덕한 부모가 되었기에.. 무엇보다도 부끄러운 사람들이 되었을 것이다. 아무리 돈이 많아 뭘 하겠는가. 죽고 나면 한장 쓰지도 못할 종이 따위로 남을 것을..

돈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곧 진실된 사랑마저 무시해 버리는 사람의 욕심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한번 더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비극이라고 볼수 밖에 없는 이야기 였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의 곁에서 잠시나마 행복한 모습을 지켜볼 수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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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님되는 법
진산 지음 / 부키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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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무척이나 재밌게 보았던 것 같다. 아주 쉽고 재밌는 말투로 쏙쏙 들어오게 책을 썼기 때문에 누구나 한 번 잡으면 쉽게 놓기가 어려운 책일 것이다.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의 공통적 반응이 재밌다는거다. 이만큼 후딱 넘겨가며 볼 수 있는 책 흔하지 않다.
그러나 내가 이 책을 선물하고 추천하고 다니는 것은 그 유용성이나 재미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보다는 이 책에 담겨있는 생각, 가치관 등이 아주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특히 결혼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평소 성수가 생각했던 것과 거의 일치한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와 같은 가치관을 가진 여자라면 기꺼이 한 평생 '삼돌이'로 살겠다는 당찬 말까지 하고 다닌다. (여자이기만 하면 충성을 다하는게 아니었냐고? 당신 너무 예리하다 )
대체 어떤 생각이기에 그러냐고? 책에 보면 좋은 삼돌이 재료 고르기라는 게 나온다. 재료가 좋아야 좋은 삼돌이가 나온다면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는데 저자가 말하는 좋은 재료란 외모, 돈 이런 게 아니다. 특히 화려한 재료에는 반드시 비싼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다이아몬드 반지 끼고 멍든 눈에 계란 문지르지 않으려면 그런 헛된 것에 눈돌리지 말고 사람의 본질을 살피라고 조언한다.

결혼에 대한 생각도 마음에 든다. 결혼을 앞두고 남편될 사람과 수많은 싸움을 벌이게 되는데 이 때 결혼식이나 결혼예물, 신혼살림 등을 싸우지 말라고 한다. 이 때 해야할 것은 미래를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가를 놓고 얘기하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저자는 장난스럽게 남편 길들이기 코스를 조언하고 있지만 실제로 살펴 보아야 할 것은 결혼에 대한 합리적 접근이다. 중요한 것은 남들 눈에 어떻게 멋지게 보일 것인가가 아니라 둘이 얼마나 잘 살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걸 말로 하면 쉽지만 실제로 결혼을 앞두고 수많은 커플이 결국은 주위의 시선에 굴복하고 만다. 천편일률적인 웨딩사진을 찍는 것부터 시작해서, 예물을 놓고 양가가 신경전을 벌이고, 닭장에서 계란 뽑아내듯 결혼식을 치뤄내고, 남들 다 간다니까 동남아로 신혼여행가고 등등. 말로는 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다 하게 된다. 그만큼 남 시선 신경안쓰고 둘 생각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다. 남 시선 따라가다보면 결국 겉치장에만 치중하게 된다. 잠시 동안 부러움의 시선을 받기 위해 평생 고생할 수 있는 것이다. 겉치장은 단위시간당 자원 소비량이 최고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실속있는 결혼을 하고, 그에 걸맞는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이 부부가 부러운거다.

평소 평등한 부부상을 제창하며, 동반자적 부부관계를 꿈꾸면서도 '마님과 삼돌이'라는 불평등한 내용을 조장하는 책을 적극 추천하는 것은 그 속에 담긴 근본 가치관을 배우자는 뜻이다. 어떤 책에서 우리가 뽑아내야 할 것은 가장 핵심적인 주제다. 세부적인 것은 몰라도 된다. 이 책을 두고 어떤 사람이 말하길 '이건 이 저자의 사는 방식일 뿐이다.'라고 하는데 그건 맞는 말이다. 마님되는 법이라고 해서 그걸 다 따라할 필요는 없다. 따라한다고 다 마님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습득해야 할 것은 기본정신이다. 세상이 강요하는 모습을 거부하고, 내가 생각하기에 옳은 것을 당당하게 따라가는 모습, 겉모습보다는 실리를 따라가는 삶 그걸 이 책에서 깨달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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톡톡캔디 2004-07-03 0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당신의 리뷰가 더 맘에 든다.
 
검은 이야기 사슬
정영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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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정영문의 <<검은 이야기 사슬>>은 요즘 우리 소설에서 보기 드문 이야기집이다. 연쇄적으로 폭음탄 터지듯 탁탁거리는 정영문의 어두운 조롱은 우리로 하여금 씁쓸한 미소를 짓게 한다. 그런데 그 미소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내 안에 가득 고여 있던 생의 반란의 징후를 정영문이 이미 포착하여 있고 그래서 그의 어두운 말이 내 속에 잠재한 어두운 앙금을 휘젖기 때문일까. 인간은 별다른 존재가 아닐지도 모른다. 신이 인간을 흙에서 빚어냈다는 말은 정말이지 인간의 영험성을 깎아낼 수도 있는 소지를 충분히 마련한다. 삶을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여러가지로 볼 수 있겠지만, 일단 낙관과 비관의 이분법은 언제나 쉬운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정영문의 서사적 시도는 비관의 끝간데를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인 우리가 타자의 죽음을 앞에 두고 눈물짓는 것도 결국은 존재하는 인간이란 죽음앞에서는 누구나 별 수 없다는 체념에서 나오는 싱거운 행동이 아닐 것인가. 정영문은 그런 인간의 존재 인식의 비관성을 또 한번 더 비관성으로 감싸면서 비관의 알레고리를 이야기로 엮어가고 있는 것이다. <<검은 이야기 사슬>>이란 소설의 제목이 말하는 것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라고 생각된다. 이 소설은 장편도 단편도 아니다. 그렇다고 수필집도 아니다. 단지 소설적 질감을 유지하면서 수상집의 형태를 갖춘 정영문만의 삐딱한 이야기 묶음이다.

화장 실 낙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준의 이야기지만 그 속에서 삶의 삼각함을 언어로 엮어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아버지, 어머니, 교사 등 중심의 가치는 철저하게 거부당한다. 정영문이 한껏 조롱 하고 짓밟아버리려는 것이 바로 이런 권력의 핵심인 것이다. 푸코가 일찍이 <<감시와 처벌>>, <<광기의 역사>> 등에서 밝힌 바 있듯이, 사회의 조직과 운용에는 반드시 중심 가치(이성의 체계) 가 만들어 내는 권력과 지식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권력과 지식은 둘 다 상호보완적으로 작용하여 이성의 바깥에 있는 비이성의 요소를 광기라 규정하고 항상 조직적인 감시와 처벌을 통해 관리해왔다는 것이다. 이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의 근대가 만든 엮어온 실체다. 길게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근대도 그러한 역사를 밟아 온것이 사실이다. 19세기에 쿠테타로 집권했던 나폴레옹이나 20세기의 박정희나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런 점에서 푸코의 분석은 정영문 소설을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따라서 정영문의 소설을 지배하는 모티프는 푸코식의 이성과 비이성의 이분법 도식에서 이해될 수 있다. 물론 소설가는 예술가이므로 아무래도 비이성의 편을 들 터, 곧 정영문은 천민자본주의가 만든 이 병든 세상을 허무의 독백으로 고발하고 있다. 관리되는 사회라는 이성의 체계 속에서 인간은 이제 질식할 만큼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그것이 이 소설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권태와 광기의 행동들이다. 이것이야말로 긍정의 세계관이 아닌 부정의 세계관이 만들어 내는 존재론적 소설의 형태이다. 그러나 다음은 작가가 고민해야 할 성싶다. 즉 부정은 스스 로를 부정할 수 있을 때 비로서 참다운 부정의 정신을 달성한다. 타자의 눈에 비친 자아는 마찬가지로 타자 눈에서는 타자로 비칠 뿐이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부정하면서 거듭나려는 정신 없는 부정정신은 그야말로 '이유없는 반항'의 수준으로 떨어져 사춘기적 질풍노도밖에 보여주질 못한다. 게다가 탄탄한 근거부족으로 지속적인 소설쓰기가 어렵게 될 지도 모르기에 작가의 세심한 자기 관찰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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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대한민국 1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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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감옥에 있는 양심적 병역거부자에게 이 책을 바친다'는 맨 앞장의 헌사에 나타나듯이 이 책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적 특수상황과 그 특수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 개인의 양심을 지키고 싶은 사람들의 눈물 나는 노력이 왜 가치가 있는 지를 밝히고 싶은 마음에서 쓴 책이다. 저자는 러시아 태생의 귀화 한국인으로 현재는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에서 한국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의 한국인됨의 개인적 과정을 잘 모르겠지만 완전한 한국인 됨 때문일까? '양심적 병역거부'가 사회의 중심 화두로 부각된 후 그는 중심에서 이 화두가 가지는 가치를 그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부각시키고자 노력하는 한 사람이 되었다.

아마도 처음부터 한국인이 아니었기에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것의 숙명적 의미와 그 속에 뿌리박혀 있는 전근대적 관념을 누구보다 분명하게 통찰할 수 있었기에 그의 목소리가 더 강하게 부각되는 것이 아닐까? 저자는 자유와 평등, 개인의 가치 등이 교묘하게 제도와 의식 속에 숨여든 한국 사회의 부조리를 날카롭게 지적해 낸다. 특별히 진정한 민주화와 인권에 대한 의식이 눈을 뜨기 전, 군대 문화와 패거리 문화 등에 의해 정착된 한국 사회의 불합리한 단면들을 그가 지적해 주었다. 교수와 학생간의 관계,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 상사와 부하의 관계, 선배와 후배의 관계...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단위들을 형성하는 그룹 속에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폭력을 중심으로 한 권력담론으로 무장된 우리의 정신 사회를 만나게 된다. 그걸 아주 당연한 문화로 여기고 받아들이는 우리의 모습은 과연 올바른 것일까?

저자가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중심으로 한 논의에서 이같은 전근대적 사회구조를 들춰내는 것은 그만큼 현재 우리의 삶의 구조가 그만큼 인권이나 개인의 자유로부터 멀어진 채 집단적 권력 담론을 중심으로 한 가치 체계속에 얽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구조가 '우리들의 대한민국'을 엮어가고 있다. 그 뜨여지는 직물구조를 우리는 미쳐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사실 우리는 그 현실을 너무도 잘 안다. 그 현실 속에 우리가 살아오지 않았는가? 어린시절 초등학교 시절의 아침 조회 시간에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가? 머리를 깍고 교복을 입고 지도부 선배들을 무서워 하며 다니던 중고등학교 시절은 어떤가? 또 아버지가 무서워 가정 밖에서 배회하던 우리의 모습은...

이 모든 모습들의 결정판은 군대에서 나타나지 않았던가? 개인의 인권이 딱지 떼이고 무엇이든 군율(?)과 질서에 통제되된 전쟁 기계, 아니 제도 기계가 된 인간의 비참한 모습. 그 모습으로 지낸 3년여의 기간은 이 사회의 모든 기득권자들의 정신구조를 거의 그런 모습으로 꼴지웠다. 그래서 지금 우리의 대한민국은 정말 비상식적으로 왜곡된 문화 속에 너무 깊이 참잠되어져 있다. '양심적 병역거부' 논쟁이 국민의 의무에 대한 개인의 회피 내지는 사회 평등의 원칙이라는 빗나간 논제로부터 시작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아마도 이런 의식을 끄집어 내었음에 틀림없다. 그의 설명대로 정말 우리들의 대한민국은 비상식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오늘 우리의 대한민국 사회의 모습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한 마디로 유교적 질서에 편입되어 젊은이들이 변화를 이끌어나갈 가능성이 희박한 중세의 갑옷을 입은 얼치기 모더니티라는 것이다. 이 불합리한 사회적 현실은 극복되어야 한다는 그의 외침이 이 땅의 독자들을 부끄럽게 만들수만 있다면 희망은 있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이 책을 쓴 그의 진정한 바람이 아니었을까? 그의 책을 주목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대한민국을 바로 보고자 하는 작은 노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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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천년 유태인의 지혜 탈무드 - 채우리 세계명작 2
배영옥 엮음, 김미정 그림 / 채우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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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흔히 유태인들을 세계의 여러 민족 중에서 두뇌가 가장 뛰어난 민족이라 생각한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유태인들은 세계의 역사를 뒤바꿔 놓을 만큼 놀라운 업적들을 남겼다. 그러한 업적만큼이나 유태인들의 활동 분야 역시 정치•과학•문학•예술•종교 등 다양하다. 아인슈타인, 뉴턴, 마르크스, 프로이트 등등.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알 수 있을 법한 이 네 명의 인물은 모두 유태인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노벨상을 받은 유태인만 하더라도 50∼60여명은 족히 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유태인들이 세계에서 두뇌가 가장 뛰어난 민족이라는 생각은 일리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러한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유태인들에 대한 찬사가 있기에 앞서 유태인들의 생활 지침서이자, 정신적 지주라고 하는 탈무드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떨까?

탈무드가 유태인들에게 끼친 영향력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탈무드의 가르침에 따라 태어나 성장하고 교육받고 생활한다. 한 권의 책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 놓는다는 말이 있지만, 한 권의 책이 이렇게 한 민족 전체에게 영향을 끼치는 책이란 그리 많지 않다. 과연 탈무드가 어떤 책이기에 유태인들이 이토록 헌신적으로 탈무드의 가르침을 따르고 지향하는 것일까? 유태인들에게 있어 탈무드는 조상 대대로부터 내려져 온 가르침이었다. 기원전 200년경부터 500년까지 약 700여년에 걸쳐 랍비들에 의해 종합 정리되어 이루어진 실로 장대한 책인 탈무드. 축척되어 내려온 지혜의 결정체가 바로 탈무드인 것이다.

유태인들의 역사를 살펴보면 한마디로 수난의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로마의 학정에서부터 근대 독일의 나치 대학살 까지. 그러한 수난의 역사 속에서, 유태인들이 수 천년간 뿔뿔이 흩어져 살아오면서도 그들 고유의 문화와 민족성을 잃지 않고 지켜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탈무드였다. 유태인들이 나라 없는 설움을 딛고 다시 영토를 되찾기까지, 유태인 특유의 정신력과 함께, 탈무드가 존재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나 싶다. 조상 대대로부터 전해 내려온 탈무드는 유태인들에게는 정신적 지주나 마찬가지였다. 만약 탈무드가 전부 소실되어 버렸더라면 그들은 다른 민족들의 이방인 노릇이나 하며 평생 살아야 할 운명이었을지 모른다. 탈무드는 유태인을 하나로 연결시켜 주는 고리와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다.

유태인의 역사는 곳 탈무드의 역사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유태인과 탈무드는 함께 해 왔다. 현재 우리가 접하는 탈무드는 완벽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유태인들이 수 천년동안 여러 민족에게 수난을 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탈무드도 여러 차례 수난을 당한다. 탈무드는 1244년부터 1957년에 이르기까지 기독교도 들에 의해 10여 회에 걸쳐 찢기고 불태워 졌다. 그러한 수난의 역사 속에서도 탈무드가 현재까지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구전이라는 원시적인 방법에 의해서 이다. 구전의 방법을 택해서 까지 탈무드가 현재까지 전해진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라 생각한다. 영영 사라져 버렸을지 모를 지혜의 결정체인 탈무드를 현재의 우리가 접할 수 있으니 말이다.

탈무드는 '바다'. 유태인들은 탈무드를 바다라 불렀다. 그것은 이 책 속에 담긴 지혜의 무궁무진함, 바로 이것 때문이다. 한없이 넓고 끝없는 바다처럼 탈무드에서는 유태인들의 선조 때부터 축척되어 내려온 수많은 지혜들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탈무드는 유태인들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민족이 읽어볼 가치가 있는 삶의 지혜가 담긴 책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제 탈무드는 유태인들만의 소유물이 아니다. 나는 탈무드를 누구나 한번쯤은 꼭 읽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유태인들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 책의 교훈적 내용들도 그렇지만, 유태인에 대해 연구하고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번 탈무드를 읽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유태인들은 탈무드와 함께 해 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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