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이야기 사슬
정영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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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문의 <<검은 이야기 사슬>>은 요즘 우리 소설에서 보기 드문 이야기집이다. 연쇄적으로 폭음탄 터지듯 탁탁거리는 정영문의 어두운 조롱은 우리로 하여금 씁쓸한 미소를 짓게 한다. 그런데 그 미소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내 안에 가득 고여 있던 생의 반란의 징후를 정영문이 이미 포착하여 있고 그래서 그의 어두운 말이 내 속에 잠재한 어두운 앙금을 휘젖기 때문일까. 인간은 별다른 존재가 아닐지도 모른다. 신이 인간을 흙에서 빚어냈다는 말은 정말이지 인간의 영험성을 깎아낼 수도 있는 소지를 충분히 마련한다. 삶을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여러가지로 볼 수 있겠지만, 일단 낙관과 비관의 이분법은 언제나 쉬운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정영문의 서사적 시도는 비관의 끝간데를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인 우리가 타자의 죽음을 앞에 두고 눈물짓는 것도 결국은 존재하는 인간이란 죽음앞에서는 누구나 별 수 없다는 체념에서 나오는 싱거운 행동이 아닐 것인가. 정영문은 그런 인간의 존재 인식의 비관성을 또 한번 더 비관성으로 감싸면서 비관의 알레고리를 이야기로 엮어가고 있는 것이다. <<검은 이야기 사슬>>이란 소설의 제목이 말하는 것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라고 생각된다. 이 소설은 장편도 단편도 아니다. 그렇다고 수필집도 아니다. 단지 소설적 질감을 유지하면서 수상집의 형태를 갖춘 정영문만의 삐딱한 이야기 묶음이다.

화장 실 낙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준의 이야기지만 그 속에서 삶의 삼각함을 언어로 엮어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아버지, 어머니, 교사 등 중심의 가치는 철저하게 거부당한다. 정영문이 한껏 조롱 하고 짓밟아버리려는 것이 바로 이런 권력의 핵심인 것이다. 푸코가 일찍이 <<감시와 처벌>>, <<광기의 역사>> 등에서 밝힌 바 있듯이, 사회의 조직과 운용에는 반드시 중심 가치(이성의 체계) 가 만들어 내는 권력과 지식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권력과 지식은 둘 다 상호보완적으로 작용하여 이성의 바깥에 있는 비이성의 요소를 광기라 규정하고 항상 조직적인 감시와 처벌을 통해 관리해왔다는 것이다. 이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의 근대가 만든 엮어온 실체다. 길게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근대도 그러한 역사를 밟아 온것이 사실이다. 19세기에 쿠테타로 집권했던 나폴레옹이나 20세기의 박정희나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런 점에서 푸코의 분석은 정영문 소설을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따라서 정영문의 소설을 지배하는 모티프는 푸코식의 이성과 비이성의 이분법 도식에서 이해될 수 있다. 물론 소설가는 예술가이므로 아무래도 비이성의 편을 들 터, 곧 정영문은 천민자본주의가 만든 이 병든 세상을 허무의 독백으로 고발하고 있다. 관리되는 사회라는 이성의 체계 속에서 인간은 이제 질식할 만큼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그것이 이 소설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권태와 광기의 행동들이다. 이것이야말로 긍정의 세계관이 아닌 부정의 세계관이 만들어 내는 존재론적 소설의 형태이다. 그러나 다음은 작가가 고민해야 할 성싶다. 즉 부정은 스스 로를 부정할 수 있을 때 비로서 참다운 부정의 정신을 달성한다. 타자의 눈에 비친 자아는 마찬가지로 타자 눈에서는 타자로 비칠 뿐이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부정하면서 거듭나려는 정신 없는 부정정신은 그야말로 '이유없는 반항'의 수준으로 떨어져 사춘기적 질풍노도밖에 보여주질 못한다. 게다가 탄탄한 근거부족으로 지속적인 소설쓰기가 어렵게 될 지도 모르기에 작가의 세심한 자기 관찰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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