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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머 씨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장 자끄 상뻬 그림 / 열린책들 / 199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자신의 어릴적 과거 이야기를 이미 다 커버려 현실을 알아버린 사람이 과거 동심의 세계에서 겪고, 생각했던 것들을 더듬어가며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쓰여졌다. 이 책의 서술자는 꼬마 소년도 '나'이다. 책 속에서 소년 '나'의 특별한 이름도 나이도 분명히 밝히지 않은 것은 어쩜 쥐스킨트 자신의 의도적인 설정이 아니었을까? 좀머씨에 대해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적지 않은 관심을 보였던 소년. 쥐스킨트는 그 소년도 좀머씨와 비슷한 설정을 통해 접근시키려 했던 것 같다. 또 좀머씨의 행동을 보면 정신병자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어떤 사회로부터의 도피, 두려움으로 인한 행동이 아니었을까?
그는 이런 혼란스럽고 더럽혀진 사회가 아닌 순수하고 어떤 구속도 받지 않는 평화로운 사회를 찾아 끊임없이 걷고 또 걷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 책은 특별한 줄거리도 클라이막스라고 이름붙일 만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도 없다. 그저 한 소년의 눈을 통해 바라보게 되는 세상, 그 소년이 겪는 생활등을 소년의 입을 통해 얘기하고 있다. 소년이 좋아하게 되는 카톨리나라는 소녀이야기, 그 어린시절의 순수한 사랑의 감정, 괴팍한 노처녀 선생님께 피아노를 배우며 혼날 때 느끼는 어린아이의 자살감정, 옛날 TV가 흔치 않았던 시절 남의 집에서 TV를 보고 싶어하는 어린아이의 호기심 많고 장난스러운 모습등 유년시절 우리가 경험했던 사소한 일상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소년의 삶 가운데 가끔씩 스쳐가는 좀머씨 이야기를 소년의 순수한 시각으로 잔잔하게 적고 있다. 그러나 주인공 좀머씨의 정체는 좀처럼 알 수 없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이 책을 읽으며 아무런 감동도 느끼지 못한채 실망감만을 표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모두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 안에서 우리는 냉혹한 현실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따스함과 뭔가 목적의식을 갖고 이익을 바라며 사는 우리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그 순수함의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의 저자인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어쩌면 자신의 모습을 좀머씨를 통해 표출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좀머씨의 삶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지만 좀머씨의 세계에서는 너무나 바쁘게 살아가며 이익만을 추구하는 우리들을 더 이상하게 바라보지 않을까?
철저한 은둔생활을 하는 쥐스킨트는 햇빛을 싫어해 모든 창문을 가리고 사는가 하면 누군가 그의 작품에 대해 무슨 대화라도 하려하면 금방 질색을 하며 사나운 표정을 짓는다고 한다. 이런 쥐스킨트의 모습이 바로 여름이나 겨울이나 상관없이 항상 오른손에는 길쭉하고 약간 구부러진 지팡이를 쥐고 등에는 텅 빈 배낭을 짊어지고 뭔가 시간에 쫓기는 사람처럼 잰 걸음으로 이 마을 저 마을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묵묵히 걷기만 하는 좀머씨의 모습이 아닐까 한다. 이 책에서 가장 유명하고도 눈에 띄는 말, 쥐스킨트가 꼭 한번 주인공 좀머씨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부여한 부분이 있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처음으로 크고 분명한 목소리로 애원했던 좀머씨의 소원은 지나치게 합리적이고 계산적인 이 사회에서 쥐스킨트 자신이 자신의 글과 자신이 그런 사회에서 이익을 쫓아 살아가는 것을 거부하고 그만의 순수하고 독특한 삶을 살아가고 싶은 바람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정체를 알 수 없었던 좀머씨. 죽음까지도 소리없이 행했던 좀머씨.
소년은 우연히 좀머씨의 죽음을 목격하지만 끝까지 누구에게도 좀머씨의 죽음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혹시 소년은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라며 얘기한 항상 무언가를 두려워 하며 이세상에 항거하는 듯한 좀머씨의 생각을 이해라도 한 것이 아닐까? 끝내 좀머씨는 자신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지도 않은 채 조용하게 사라져 버린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이 한 마디만을 남긴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