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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ㅣ 밀란 쿤데라 전집 1
밀란 쿤테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1년 11월
평점 :
농담이 농담으로 통하지 않는 사회.
스스로 검열하도록 만드는 사회.
자신을 스스로 숨기게 만드는 사회.
공포스러운 사회입니다.
이런 사회에서 개인은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남들이 불행해도 나만 잘살면 행복한 걸까요?
루드비크는 이런 사회에서 어쩔수 없이 불행해진 인물입니다.
그의 주변사람들도 모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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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쪽 (헬레나)
아니, 하긴, 그들이 맞는지도 모르지, 어쩌면 난 악독한 여자인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든 정말 마음대로 내버려둬야 하는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도 개인적인 일에 끼어들 권리는 없다, 우리는 우리가 존재하는 이 세상 전체를 정말로 잘못 생각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어쩌면 정말로 자기와 전혀 상관도 없는 일들에 참견하는 혐오스러운 순경일지도 모른다, 다만 나, 나는 그냥 이렇고 언제나 느끼는 대로 행동할 뿐이다, 바뀌기에는 이제 너무 늦었다, 인간은 둘로 나뉠 수 없다고 나는 항상 생각했다, 오직 부르주아만이 속임수를 써서 공적 존재와 사적 존재로 자신을 양분한다, 이것이 나의 신조다, 나는 언제나 그에 따라 행동해 왔다, 이번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56쪽 (루드비크)
이 마지막 얼굴이 진짜였을까?
아니다. 모든 것이 진짜였다. 위선자들처럼 내게 진짜 얼굴 하나와 가짜 얼굴 하나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나는 젊었고, 내가 누구인지 누가 되고 싶은지 자신도 몰랐기 대문에 여러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얼굴들 사이에 존재하는 부조화가 내게 두려움을 주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나는 그중 어느 것에도 꼭 들어맞질 않았고, 그저 그 얼굴들 뒤를 맹목적으로 이리저리 헤매 다니고 있었다.)
133쪽 (루드비크)
~ 그때 이래로 나는 새로 사람들을 알게 될 때마다 남자든 여자든, 새 친구든 애인이 될지 모를 여자든, 머릿속에서 그들을 그 시대 그 강당에 옮겨 놓고 그들이 손을 들 것인가 자문해 보게 된다. 그 누구도 이 검사에 통과한 사람은 없다. 예전에 내 친구들이나 아는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 얼른, 또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확신에 의해서 혹은 두려워서) 그랬던 것처럼 그들 모두가 손을 들고 만다. 그러니 인정하시라. 당신을 유배 보내거나 사형할 태세인 이들과 같이 산다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그들과 아주 친해지기가, 그들을 사랑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 오랫동안 나는 그런 상황에서 결코 다른 사람들처럼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확신시키려고 애써 보았다. 그렇지만 결국 그런 자신을 비웃을 수 있을만큼은 정직하다. 그러니까 나 혼자 손을 들지 않았을 것이라고? 유일하게 정의로운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전혀 그렇지 않다. 내가 다른 이들보다 더 낫다는 그 어떤 보장도 내게서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타인과 나의 관계에 무슨 변화를 줄 수 있는가? 나 자신의 한심함을 인식한다고 해서 나와 비슷한 이들의 한심함과 내가 화해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 타인에게서 자기 자신의 비천함을 발견하고 사람들이 서로 형제처럼 결속된다든가 하는 일만큼 내게 역겨운 것은 없다. 그런 메스꺼운 형제애는 사양한다.
152쪽
젊은이란 참혹한 것이다. 그것은 어린아이들이 희랍 비극 배우의 장화를 신고 다양한 무대 의상 차림으로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르면서 광적으로 신봉하는 대사들을 외워서 읊으며 누비고 다니는 그런 무대다. 역사 또한, 미숙한 이들에게 너무도 자주 놀이터가 되어 주는 이 역사 또한 끔찍한 것이다.
~ 그렇다면 누가 잘못한 것이란 말인가? 역사 자체가? 그 신성한, 합리적인 역사가? 그런데 왜 그런 실수들이 역사 탓이라고 해야만 할 것인가? 인간으로서의 나의 이성에만 그렇게 보일뿐, 만일 역사에 자기 고유의 이성이 있다면, 무엇 때문에 그 이성이 인간들의 이해를 신경쓸 것이며 여선생처럼 꼭 진지해야 하겠는가? 그리고 만일 역사가 장난을 한다면? 그 순간 나는, 나 자신이, 그리고 내 인생 전체가 훨신 더 광대하고 전적으로 철회 불가능한 농담 (나를 넘어서는)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이상, 나 자신의 농담을 아예 없던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 그렇다, 갑자기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사람들 대부분은 두 가지 헛된 믿음에 빠져 있다. 기억(사람, 사물, 행위, 민족 등에 대한 기억)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과 (행위, 실수, 죄, 잘못 등을) 고쳐 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 이것은 둘 다 마찬가지로 잘못된 믿음이다. 진실은 오히려 정반대다. 모든 것은 잊히고, 고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을 (복수에 의해서 그리고 용서에 의해서) 고친다는 일은 망각이 담당할 것이다. 그 누구도 이미 저질러진 잘못을 고치지 못하겠지만 모든 잘못이 잊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