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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정희진이 거듭 말하는 것이 있다. "다른 생각"과 "상처"다.
생각해보면 남성은 상처란 말을 잘 쓰지 않는다. 나 상처 받았어...라는 말은 여성들에게서 나오는 말이다.
"트라우마의 생존자들은, 고통을 겪은 자신과 고통을 말하는 자기 사이에서 분열한다."
알고 있는 것과 말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이다. 나는 내 자신의 상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으며 얼마나 말하고 있는가. 그 많은 남성들 사이에서 살아가면서, 나는 얼마나 승리하고 있는가, 반성해보았다.
나는 아직, 승리를 향해서 나가지 못하고 있다.
정희진은 여성인 나 자신조차 감지하고 있지 못한 남성중심적 사고 곳곳에 파고들어, 그 사고의 무서움, 획일성에 대한 반발을 시도한다.
"나는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나도 어느 순간부터는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이라는 걸을 깨닫기 시작했다.
차라리 몰랐다면 덜 아팠을 텐데...하는 생각을 하게 될때가 참 많기 때문이다.
"젠더(성별) 문제는 사적인 문제거나 하찮은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모순이다."
이렇게 선언한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민족문제 혹은 국가적 문제에 대한 해결보다는 여성인권에 촛점을 맞춘 발상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생각에서도 드러난다.
"한국 남성에게 성폭력당하면 개인적인 일이고, 일본 남성에게 당하면 민족의 아픔인가? 성폭력은 가해 남성이 누구인지에 따라 그 성격이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남성에 의한 폭력이라는 사실이 더 본질적인 문제이다."고 단언한다.
동의한다.
개개의 삶이 있어야 민족이고 국가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남녀평등'에 대한 딜레마는 이렇게 바라본다.
"같음의 기준이 남성의 경험에 근거한 것일 때, 여성은 남성과 같음을 주장해도 다름을 주장해도 차별받는다. 그것이 소위 차이와 평등의 딜레마이다. 예를들어, 여성이 남성과의 차이를 주장하면 남성사회는 그것을 차별의 근거로 삼고, 같음을 주장하면 사회적 조건의 다름은 무시한 채 남성의 기준을 따르라고 요구한다."
계급적 측면에서 여성을 바라보며, 성매매 문제에 대해 여성주의를 뛰어넘은 사고를 보이는 것도 매우 유연하고 좋다.
"한국의 성매매는 인신매매 여성의 가족 부양, 소비 자본의 욕망, 입시제도, 강력한 가족주의, 학연, 가족 내 성폭력, 전무하다시피한 사회복지 등으로 인한 남성과 여성, 여성과 여성의 계급차이가 성판매 여성의 '선택'으로 실현되었다고 생각한다."
여성주의의 사유방식의 출발점은 "그들을 말하게 하라"였다고 한다.
아는 것과, 말하는 것의 차이.
그래서 나는 어쩌면 글을 쓰는 건지도 모르겠다.
여성, 동성애자, 장애인의 처지에서 바라본 이 책은 그동안에는 대중적(진정 중산층 여성에게 국한한 배부른 운동이라는 차원을 벗어나) 지지를 받지 못했던 사안에 대한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해준다. (적어도 나에게는)
살아 있을 때는 그저 양갈보에 불과해 수치스러운 존재였으나 미군에게 살해당한 이후에야 민족적 색채가 입혀져 "우리 민족의 순결한 누이"가 되는 사건을 통해, 남성 중심적 사고에서 여성이 어떤 취급을 당하고 있는지, 그 처지가 어딘지 확실히 알 수 있다.
그것을 깨닫게 해준 것도 당연히, 정희진이고 이 책이다.
책에서 나누고 있는 주제들은 매우 다양하며, 폐부를 찌른다. 굳이 여성주의가 아니라도, 자신이 속한 운동영역에서 혹은 삶에서 가질 수 있는 수없이 많은 편견(인줄 몰랐던)을 깰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는 것, '다른 사고'의 허용을 말하고 있다는 점은 이 책이 갖는 큰 장점이다.
여성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사고에 대해 별다른 반성없이 살아가는 사람일수록, 특히 남성들에게 권한다. 뭐, 권한다고 읽을만한 사람들은 그나마 희망이 있긴하다. "난 그런 책은 안읽어..." 하는 사람들이 문제지.. (그 오만함이라니...)
읽고 난후에도 이런 민족적 과제(혹은 국가적 사안)가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는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여성문제를 들고 일어서는 것이 과연 대의를 위해서 현명한 것인가 하는 식의 논리를 펼친다면, 정말 어쩔 수 없는 마초라고 실망하기 보다는, 절망할 것 같다.
그런 말들로 여성들은 지금까지 억압받고, 착취받고, 소외되어 왔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책 앞에서 그런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