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묵은 먼 산의 기억에서 블레이크를 "글과 그림을 동시에 생각한 가장 위대한 거장"(P. 130)으로 언급하며, 자신 또한 그처럼 글과 그림이 공존하는 세계를 평생 탐구하고 싶다고 고백한다. 이 두 예술가의 만남은 단순한 존경의 차원을 넘어 창작의 본질에 대한 대화를 여는 열쇠다.


윌리엄 블레이크와 오르한 파묵. 두 이름을 나란히 두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운 긴장이 흐른다. 한 명은 18세기 영국의 시인이자 화가로, 초월적 비전과 신화적 상징을 창조한 예술가다. 다른 한 명은 21세기 터키를 대표하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로, 주로 글쓰기를 통해 서사를 엮어온 현대의 예술가다. 그는 지난 14년 동안 몰스킨 노트에 일상의 생각과 관찰, 그리고 그림을 기록해 왔다. 먼 산의 기억은 이 수천 페이지의 노트를 한 권으로 집약하여 독자들에게 처음으로 공개한 작품으로, 기억과 일상이 글과 그림으로 엮인 그의 창작 세계를 가장 가까이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이다. 이들은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에 속했지만, 글과 그림을 통합하려는 열망으로 연결된다.


블레이크는 "시와 그림은 하나의 언어"라는 신념 아래 자신의 판화 작업에 글을 새기고, 시를 삽화와 함께 출판했다. 그의 순수와 경험의 노래(Songs of Innocence and Experience)는 순수와 경험, 천국과 지옥, 빛과 어둠이라는 상반된 주제를 문학적, 시각적으로 교차시킨 대표작이다. 이 작품들은 초월적 상징과 강렬한 비전을 통해 독자에게 단순한 해석을 넘어서는 다층적 경험을 선사한다.


특히 The Tyger는 경험과 두려움의 세계를 상징적으로 담아낸 블레이크의 대표작이다. 호랑이의 "불타는 듯한 빛 (burning bright)"은 단순한 동물이 아닌 초월적 존재로 형상화되며, 창조의 신비와 두려움, 그리고 그 창조주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Did he who made the Lamb make thee?"라는 구절은 순수와 경험, 인간 존재와 신의 본질에 대한 블레이크의 탐구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붉은색, 주황색, 검은색으로 묘사된 호랑이는 경험이 가져오는 고통과 성숙의 과정을 시각적으로 상징한다.


블레이크의 시 The Tyger는 문학적 경계를 넘어 현대 음악과 예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마이크 배트(Mike Batt)가 작곡한 곡 Tiger in the Night는 블레이크의 시적 이미지를 음악적으로 재해석한 대표적인 사례다. 이 곡은 사랑과 열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블레이크의 "burning bright"라는 이미지를 차용하며, 불타는 호랑이의 강렬한 에너지를 새로운 예술적 방식으로 구현했다. Tiger in the Night는 블레이크의 상징이 단지 문학의 세계에 머물지 않고, 현대 음악에서도 창작의 영감으로 작용했음을 보여주는 예다. 이는 블레이크의 시가 가진 초월적 힘과 보편성을 증명하며, 그의 작품이 시대를 넘어 다양한 방식으로 재해석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Mike Batt & The Royal Philharmonic Orchestra ~ Vocal by Colin Blunstone ~ Tiger In The Night


반면, 파묵의 먼 산의 기억은 훨씬 개인적이고 서정적이다. 그는 자신의 일기를 통해 기억과 감정을 그림과 텍스트로 엮어내며, 과거의 자신과 대화한다. 그의 그림은 도시의 풍경, 창문 너머의 자연, 일상의 소소한 순간들로 채워져 있다. 창문 밖으로 펼쳐진 푸른 풍경과 테이블 위에 놓인 일상의 흔적은 정적인 아름다움과 평화로운 사색을 담고 있다. 이는 블레이크의 The Tyger의 강렬한 상징성과 강렬히 대비된다. 블레이크가 두려움과 경외를 불러일으키는 호랑이를 그려냈다면, 파묵은 따뜻한 색감과 고요한 풍경으로 독자를 위로한다.


파묵이 블레이크를 떠올리며 남긴 고백, "나는 그처럼 평생 글과 그림을 같은 페이지에서 생각하고 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 (P. 130)는 단순한 동경을 넘어 두 예술가의 접점을 드러낸다. 블레이크가 신화와 상징의 언어로 영원의 경계를 탐구했다면, 파묵은 기억과 일상의 언어로 시간을 초월하는 세상을 구축했다. 한 명은 영국의 산업혁명 속에서 신성한 비전을 노래했고, 다른 한 명은 현대 터키의 역사와 개인적 사색 속에서 인간의 흔적을 그려냈다. 두 거장의 작업은 글과 그림이 서로를 해석하고 확장할 때 얼마나 풍부한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들의 작품은 각자의 시대와 맥락을 넘어 오늘날에도 여전히 깊은 영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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