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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범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6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24년 11월
평점 :
한때 위엄과 권위를 누리던 살리나 가문은 이제 무너져가는 시칠리아의 초라한 유산처럼, 변화를 외면하지 못한 채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의 『표범』은 이 몰락의 이야기를 한 가문의 서사로 압축하지만, 단순히 사라져가는 귀족 계급을 애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 작품은 시대의 굴곡과 함께 인간의 영혼을 관통하며, 변화와 죽음이라는 필연성을 품위 있게 노래하는 불멸의 기록이다.
살리나 가문의 문장은 위풍당당한 표범의 형상이다. 그러나 이 상징은 단지 권력의 그림자가 아니다. 표범은 눈앞의 사냥감을 끝까지 쫓아가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만, 그럼에도 언젠가는 세상의 다른 사냥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마지막을 맞이한다. 이는 곧 인간의 삶을 닮아 있다. 권력과 욕망, 사랑과 성공에 집착하는 삶의 흔적들이 결국에는 죽음이라는 정점에서 사라지고 만다는, 피할 수 없는 진실이다.
작품의 중심에는 돈 파브리초 살리나 영주가 서 있다. 그는 천문학에 심취하며 별들의 규칙을 탐구하지만, 정작 자신의 삶과 가문의 미래는 예측할 수 없다. 사냥과 연애, 무도회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즐기지만, 삶이 주는 모든 풍요 속에서도 끊임없이 죽음의 그림자를 느낀다. 혁명과 부르주아의 부상이 가져오는 시대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그는 딸의 혼례보다 조카 탄크레디의 신분 초월적 결혼을 축복한다. 그것은 단순히 가족의 유산을 지키기 위한 결정이 아니라, 변화의 물결에 자신을 맡기는 한 인간의 결단이다.
돈 파브리초가 무도회에서 춤추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느끼는 감정은 깊은 연민이다. 화려하게 빛나는 조명 아래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그들은 마치 죽음이 가져갈 찰나의 시간을 모른 채 환희에 젖어 있다. 그는 그들의 춤 속에서 삶의 극적인 유희와 동시에 끝이 다가오는 조짐을 본다. 이것이 바로 『표범』의 가장 압도적인 힘이다. 변화는 겉으로는 새로움을 의미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기존의 세계를 허물고 소멸을 예고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그대로 유지되길 원한다면, 모든 것이 변해야 한다.
돈 파브리초의 이 고백은 단순히 추상적인 생각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그는 변화를 통해서만 기존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는 역설을 꿰뚫어 본다. 이 말은 단지 체념이 아닌, 삶의 불가피한 변화와 그 안에서 지속되는 본질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표범』은 이러한 통찰을 통해 변화와 보존 사이에 놓인 인간 존재의 모순적 아름다움을 탐구한다.
이 작품은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의 생애 유일한 장편소설이다. 생전에 자신의 작품이 거절당하며 좌절을 겪었지만, 사후 출간된 이 책은 그의 죽음과 함께 부활하며 이탈리아 문학사에 찬란한 족적을 남겼다. 알랭 들롱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되었으며, 현재 넷플릭스 시리즈로 재탄생을 준비 중이다. 작가의 증조할아버지의 삶을 바탕으로 한 이 이야기는 특정 시대와 개인을 넘어, 시간과 존재에 대한 보편적 성찰로 확장된다.
『표범』은 묻는다. 우리의 삶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변화와 죽음을 앞둔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며, 무엇을 기대하는가? 이 작품은 그 질문에 명확한 답을 내리기보다, 독자가 스스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그 의미를 탐구하도록 초대한다. 모든 것은 사라지지만, 그 자리에 남는 것은 삶을 겪어낸 자들의 흔적이다. 살리나 영주의 마지막 순간처럼, 모든 변화와 죽음은 결국 새로운 시대의 출발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