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생처음 뮤지컬을 본 날이었다. 혜를 처음 만난 날이기도 했다. 덕질하던 아이돌이 공연하는 뮤지컬을 같이 보라 갈 사람을 팬카페에서 찾다가 약속을 잡았다. - P43
김 약사가 상대하는 손님은 주로 순하디순한 단골이었고, 까다롭고 낯선 손님은 대체로 조의 몫이었다. 인간적으로는 흠이 될지 몰라도 고용주로서는 크게 흠이 되는 성격은 아니었다. 오히려 손님이 없을 때가 문제였다. 김 약사는 지치지도 않는지 쉴 새 없이 조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단골에게 친절한 이유가 장삿속보다 수다를 떨 대상이 필요해서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 P45
- 우유식빵으로 사와야 돼. 김 약사가 신신당부했다. 조는 옥수수식빵을 좋아하고 김 약사는 우유식빵을 좋아하고, 혜는 치아바타를 발사믹 소스에 찍어 먹는 걸 좋아했다. 나도 앙버터라든가 오후 3시면 품절되는 크루아상을 찾아다니며 먹고는 했는데 이제는 호빵이라도 상관없었다. 깔끔한 단맛과 진득한 단맛을 구분하던 때가 아득했다. - P55
최저임금으로는 미래를 꿈꾸기 어려웠다. 아직 서른이라고 해도 살아내는 당사자에게는 인생의 끝자락이다. 상상력이고갈되었는지 막다른 길 너머를 그려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벌써 길을 잘못 들었다는 생각만 자꾸 들었다. 아직과벌써 사이에는 넓은 해협이 있었다. 안개가 자욱한 바다에서 홀로 헤매는 기분이 들 때면 어찌할 바를 몰랐다. - P92
나와 다르게 조는 유령이 된 이유를 명확하게 아는 것 같았다. 원하지 않는 자리로 돌아간 기분을 짐작해보았다. 한쪽에 구겨놓았던 우울을 펴보니 모양새가 비슷하게 겹쳤다. - P111
술자리를 즐기기는 해도 폭음은 하지 않던 혜였는데 그날은 혀가 꼬일 정도로 마셨다. 새벽까지 마시다가 몸을 가누지 못하는 혜를 부축해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택시를 타고 주소를 물어 도착한 곳은 한적한 골목의 빌라였다. 도어록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시큼한 냄새가 났다. 현관에 재활용 쓰레기가 아무렇게 쌓여 있었고 주위에 양념이 묻은 플라스틱 그릇이 흩어져 있었다. 바닥에는 벗어놓은 스타킹이 머리카락 뭉치와 뒤엉켜 있었다. 쓰러져 있는 빈 술병에도 먼지가 앉았다. 싱크대에 시퍼렇게 곰팡이가 슨 귤이 보였다. 개수대 거름망에 음식물 쓰레기가 가득 차 있었다. 화장대 위에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인 화장품이 수십 개 늘어서 있었다. 몇 개는 뚜껑을 열어놓아 내용물이 말라붙었다. 혜를 부축해서 침대로 데려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책을 피해 눕혀주었다. 혜는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나는 현관으로 돌아가 발에 묻은 먼지 덩어리를 비벼서 떨어뜨리고 신발을 신었다. 문을 닫자 도어록 잠기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왠지 울적해져서 문에 한참 기대서 있었다. 센서등이 꺼지고 주위가 어두워졌다. - P129
어머니는 아버지와 다투고 나면 꼭 나에게 와서 하소연했다. 한때는 어머니와 같은 나라의 주민이라고 생각했다. 귀담아듣고 연민했으며 언젠가 상황이 나아지리라 믿었다. 몇 년쯤 똑같은 얘기를 반복해서 들은 뒤에야 어머니에게 딸이란 약국에서 구입하기 쉬운 약과 같다는 걸 알았다. 수시로 복용해도 병세의 원인이 다른 데 있었기에 차도는 없었다. 그저 진통제에 불과했던 약의 역할을 거부했더니 어머니의 한탄은 비난으로 바뀌었다. 나는 점차 침묵을 모국어처럼 사용했다. ㅡ듣고 있는 거야? ㅡ응.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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