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저자들은 직업도, 연령대도 살아온 이력도 천차만별이었다. 편집자가 아니었더라면 결코 내 인생에서 만날 일 없었을 사람들의 신기하고 놀라운 이야기에 푹 빠져 한 시절씩을 살았다. 그들에게서 가장 아름답고 독보적인 점을 발견해 책에 담았다. 이 과정이 미치도록 재밌었다. 화려하고 회전율 높은 에세이 매대에서 무조건 눈에 띄게 만들 궁리를 해야 하다 보니, 지루할 틈도 게으름 피울 겨를도 없었다. 결국 에세이가 편집자로서 나를 더 고민하고 몰두하게 하고, 완성시킨 셈이다.
- P12

내가 편집하면서 늘 최종적인 독자로 가정하는 대중이란 지극히 보통의 취향과 삶의 조건을 가진 사람들이다. 숙련된 독자가 아닌 사람, 책을 반드시 읽지 않아도 살 수 있고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 심오한 지식과 미학보다는 즉각적인 재미와 감동 · 위로가 당장 필요한 사람, 책값 15,000원을 낼 형편은 되지만 책보다 재밌는 것도 많고 돈 쓸 데도 많아서 서점에서 지갑을 여는 데는 제법 깐깐한 사람이다. 그리고 나를 포함해 모든 출판인과 작가 들은 철저히 숙련된 독자에 속하므로, 이들 평범한 대중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다가서려면 아주 많은 노력과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P26

내 컴퓨터의 기출간 책 폴더에는 책마다 끝내 채택되지 못한 제목 안 파일들이 들어 있다. 제목을 지어 놓은 다음날 아침에만 열어 봐도 손발이 오그라들고, 한 1년쯤 지난 후에는 ‘어휴, 이 제목으로 안 나오길 천만다행이다!‘라고 가슴 쓸어내리게 하는 제목의 흑역사‘가 가득한 파일이다. 누가 훔쳐볼까 무서운 그 실패한 제목들을 볼 때마다 제목은 편집자가 어느 날 번뜩이는 영감을 받아 일필휘지로 짓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삽질 끝에 겨우 찾아내고 발견하는 것이란 생각을 자주 한다. - P43

나는 내 작가에게 가장 눈에 띄고 화려하고 단단한 간판을 달 줄 아는 간판장이가 되고 싶다. - P54

에세이 편집자가 디자인에 대해 가질 수 있는 가장 나쁜 태도는 아무 생각도, 의견도, 제안도 없는 것이다.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없는 무색무취한 편집자는 저마다의 삶과 스타일이 녹아 있는 에세이의 겉모습을 무표정하게 만든다. 그런 편집자가 만든 에세이는 전체적인 꼴이 이상하지는 않지만, 딱히 구석구석 뜯어보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는다. - P65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내가 최종 결정권자가 아니라 생각하며, 일에 자기 자신을 걸지 않는 사람은 일할 때 감정 소모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화내는 디자이너, 화내는 마케터, 화내는 작가, 당장은 까다롭고 불편한 이야기일지라도 길게 보면 서로의 작업을 위해 확실한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까놓고 말해 주는 사람들을 줄곧 좋아했다. - P70

문학동네에 신입 사원으로 입사해서 교정교열에 대해 배울 때 가장 놀랐던 것은, 교정지(특히 저자가 보는 교정지)에서 가급적 빨간색 펜은 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우리 편집자들은 저자의 원고에서 정 · 오답을 체크하는 빨간펜 선생님이 아니니까. 또한 빨간펜은 시각적으로도 자극적이어서 수백 페이지의 원고에서 오탈자와 오류를 찾아내야 하는 저자와 편집자의 안구 건강에도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닌 것 같다. - P85

우선 에세이 보도자료는 ‘웅숭깊고 핍진하게‘, ‘오롯하면서도 폭넓은‘ 세계관을 망라하여, ‘한국 문학 장을 뒤흔든 ‘기념비적‘인 ‘대서사시‘처럼 쓰면 절.대. 안. 된.다! 나는 후배들에게 에세이 보도자료에서 평론 쓰려하지 말라고 늘 강조한다. 에세이 보도자료는 ‘에세이답게‘ 써야 한다. 대체로 다른 장르의 보도자료는 ‘평론‘이나 ‘해설‘조로 쓰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시·소설·인문서 등에서 작품의 의의와 가치, 이 책의 중요성과 시의성을 편집자가 정확하게 짚어 주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에세이는 다르다. 에세이 보도자료는 이 원고가 출판계를 뒤흔들 엄청난 파급력을 지녔다는 것을 주장하거나 웅변하는 것이 아니라, 이 소소한 이야기가 한 사람의 인생에서 어떤 의미였는지를, 이 작가는 왜 이 이야기를 쓸 수밖에 없었는지를 최대한 살에 와닿는 구체적인 에피소드를 곁들어 스토리텔링을 해야 한다.
- P102

"편집자가 한 권의 책을 맡으면 짧게는 두 달 길게는 수개월, 때로는 몇 년까지도 좋든 싫든 그 원고를 붙들고 살아가야 한다. 기획안을 올리기 전, 진지하게 스스로에게 되묻길 바란다. 나는 정말 이 원고에 수개월 그 이상을 헌신할 준비와 각오가 되어 있는가? 그만큼 이 이야기에 관심이 있고 깊이 알고 싶은가? 편집자로서 내가 이 책을 정말 확신을 갖고 만들어 내고 싶은지,
그리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만들어 낼 수 있는지, 내가 기획을 위한 기획‘을 하는 건 아닌지, 거듭 묻고 각자 답을 찾아보았으면 좋겠다." - P119

나는 함께 일할 후배 편집자를 뽑는 과정에서 고심할 때도 무엇보다 그가 열광하는 게 무엇인지, 좋아하는 분야가 다양하고 그것을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인지를 눈여겨본다. 냉철하고 냉소적이고 그 어떤 것에도 크게 놀라거나 감정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도 나름의 장점이 있겠지만, 나는 아무래도 좋아하는 게 너무 많아서 자주 복받치는 사람에게 마음이 가고, 그런 사람과 동료로 일하고 싶다. 좋아하는 게 많아서 보고 싶고 듣고 싶고 다니고 싶고 만나고 싶고 알고 싶은 것도 많은……. - P137

출판인으로서 나의 꿈 중 하나는 훗날 한국의 에세이와 논픽션을 대상으로 권위와 상금 면에서 압도적인 상을 만드는 것이다. - P148

우리는 일상과 생활이 이미 예술인 사람들, 예술가 이전의 예술가를 발견해 작가가 되어 보자고 유혹한다.
자신은 작가나 예술가가 될 깜냥이 아니라고, 그저 먹고 살다 보니까 이렇게 됐다고 말하는 사람, 자신이 얼마나 아름답고 대단한지 잘 모르는 사람, 그러나 곁에서 조금만 대화해 보면 내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모조리 주머니에 주워 담아 간직하고픈 사람, 나는 이런 사람들을 붙들어 내 작가로 만들고 싶다. - P152

편집자의 특권이자 재능은 작가와 잘 노는 것이다.
작가와 수다를 떨고 그들의 고민을 듣고, 그들이 좋은 작품의 싹이 되는 생각이 떠올렸을 때 그들의 눈이 빛나는 것을 포착한다. 특히 에세이는 그렇게 같이 놀고 떠들다가 다음 책이 탄생하는 경우가 많다. - P159

편집자란 이런 사람들이다. 저자가 자학하고 작아질 때 끝까지 편이 되어 주는 사람. 묵묵히 기다려 주는 사람. 그러나 내가 도달해야 할 목표점과 마감을 잊지 않도록 등대가 되어 주는 사람. 그리고 그 모든 사정과 핑계를 돌파하고 끝내 책 한 권을 완성해 내고야 마는 사람. 내게 그런 편집자가 되어 준 사공영 편집자님에게 감사한다. 나 역시 내 작가의 작은 이야기들을 대작, 인생작으로 여기며 계속 에세이 편집자로 살아가고 싶다. - P174

어느 날 정여울 작가님이 네이버 오디오클립 월간 정여울‘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걸 들었다. 타인이 에세이를 ‘잡문‘이라 부를 때는 이 장르를 가볍게 보는 편견이 들어 있을 것이나, 스스로 나의 장르를 ‘잡문‘이라 말할 때 그것은 자기비하도, 겸손도 아닌 단단한 자신감이 된다고. ‘잡스럽다‘는 것은 반듯하게 그어진 경계나 선 따위는 가볍게 뛰어넘어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라고.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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