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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잡으면 눈이 녹아 ㅣ 문학동네 시인선 152
장수양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3월
평점 :
『손을 잡으면 눈이 녹아』에는 유독 ‘사랑’이라는 단어가 많이 쓰인다. 도대체 ‘사랑’이 시인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길래 이렇게나 많이 사용하는 걸까. 먼저 사랑의 개념에 대해 말하는 「미소」를 살펴보자. 어떤 사람이 끈을 쥐고 있는데, 그에게 “끈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거, 사랑이에요.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사람은 “천진난만”했고, “영원히 끈을 쥐고 있어도 좋아요. 잡아당겨주지 않아도 좋아요.”라고 묘하게 수동적인 말을 하고, 심지어 “이거, 제 몸이에요.”라며 사랑을 자신과 동일시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가관이다. “어떻게 움직이는지 몰라요. 모르는 게 좋아요.” 자기 몸인데 모르는 게 좋다니, 이상하게 들린다. 화자는 끈을 쥐고 있는 사람이 힘들어 보여서 “도움을 요청”하라고 일러주지만 그는 거절한다. 화자는 “그를 부정할 방법을 찾을 수 없다.” 사랑을 놓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 결국 화자와 같은 상태이기 때문에 부정하지 못하는 것 아닐까. 시인은 인간이 사랑을 자기 몸처럼 느끼지만 동시에 그것을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모르면서 잡고 있는 기묘한 의식 속에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시인은 다른 존재와의 사랑을 어떻게 감각하고 있을까. 「작은 포크 병」에서 서로 사랑하는 인물들을 통해 알아보자. “싱은 아주 작은 포크를 샀다. 필요 없는 물건을 사버린 죄로 그는 여생을 포크에 찍혀 살아가게 되었다…//작은 포크는 싱의 눈동자에 박혀 있었다. 그게 싱을 아프게 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가 누구를 바라볼 때면 대상의 뺨 위에 빗금을 새겼다.” ‘작은 포크’는 ‘싱’이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는 방식이다. 다큐멘터리에서는 그것을 “희귀한 피부 질환”으로 다루지만, “싱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나’(화자)를 바라보며 “가장 많은 빗금의 소유주”로 만든다. 사회는 싱과 ‘나’가 시선을 교환하며 사랑하고 빗금을 남기는 방식이 ‘병’이라고 낙인찍는다. 그렇기에 ‘나’는 그 누구도 ‘나’가 싱을 “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게 만들었다.” “신문을 끊은 날, 나와 싱은… 온몸에 작은 포크가 박혀 있는 커다란 개”를 발견하고 키우기 시작한다. “작은 포크는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나나 개나 싱을 다치게 하지도 않았다.” 개의 ‘작은 포크’ 역시 ‘나’가 개를 사랑하는 데 장애물로 기능하지 않는다. 싱과 개의 ‘작은 포크’ 덕분에 “나는 많은 빗금을 소유했고… 오랫동안 나를 불안하게 했던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빈 접시 같은 건 없었다.” 남들이 뭐라 하건, ‘작은 포크’는 분명 화자에게 사랑의 증거이자 불안을 잠재워주는 사물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의문이 더 생긴다. 이렇게 좋은 사랑을 왜 다른 사람들은 ‘병’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요새」를 통해 작은 단서를 얻을 수 있다. 각주에 따르면 「요새」는 2020년 진행된 전시 <낯섦의 몸>을 모티프 삼아 쓴 시인 듯하다. 이 전시는 여성 주체가 적극적으로 몸을 감각하는 작품들로 가득하다. 다시 시의 본문으로 돌아와서 “모든 농담에 조롱이 깃들어 있기에 그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장수양 시인 역시 여성이고, 몸을 탐구하는 전시와 「요새」를 결부했다는 점에서 ‘농담’은 여성을 대상화하는 사람들이 던진 것으로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누군가 선천적으로 흰 그의 머리카락을 휙 잡아당기며 외쳤다 할머니!” 이 농담에는 사랑이 전혀 담겨 있지 않은 반면, 농담에서 조롱의 낌새를 감지한 시인은 ‘할머니’로 불린 인물을 옹호하고 사랑한다. 「작은 포크 병」의 맥락을 확장하자면, ‘싱’, ‘개’, ‘할머니’가 ‘다큐멘터리’가 ‘병’이라고 말하는 ‘조롱’을 들을 때 ‘나’는 사랑하는 존재들을 품는 것이다. 시인에게 여성을 사랑(꼭 성애가 아니더라도)하는 일은 좋은 일이지만 사회는 그것을 조롱한다. 이런 부정적인 현실에서도 시인은 꿋꿋하게 사랑을 시로 풀어낸다.
시인이 계속해서 사랑에 대한 시를 쓸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을 ‘좋은 사람’이라고 불러주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인님」의 ‘치리’는 “뜨개질이 얼마큼 진행되었는지 물”으러 ‘나’를 찾아온다. 치리는 “나는 마족이다”, “나는 관산도서관의 연체된 소설에 나오는 선생님이다”, “난 망토를 두를 줄 아는 최초의 집토끼이다”라며 매번 “새로운 감상”을 표현하지만 ‘나’는 언제나 “그렇구나” 또는 “그래”라고 자못 무심하게 대꾸하기만 한다. ‘나’는 치리를 그다지 대단한 인물로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다 뜬 털모자를 주기 위해 “그달 마지막날” 치리의 집으로 갔을 때 ‘나’는 “다육식물 화분”을 보고 변화하게 된다. 치리가 사는 빌라 “앞에는 다육식물 화분이 줄지어 있”고 “화분 곁에는 하드보드지로 만든 팻말”에 “누가 당신을 만나기 위해 이 빌라까지 온다면/당신은 그 사람에게 고마워해야 한다/그런 사람에게라면 화분 하나쯤 데려가게 해도 괜찮을 것이다/분명 좋은 사람일 테니”라고 쓰여 있다. 치리는 ‘나’가 그에게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에 연연하기보다,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부르며 자신의 소중한 화분마저도 기꺼이 줄 수 있는 넉넉함을 보여준 것이다. 사실 “이 빌라 근처에는 빌라의 주민밖에는 오지 않는다 너무 외지고, 주변 경관도 좋지 않다”라는 말에서는 치리의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음이 드러난다. 하지만 “당신은 어차피 이 빌라의 주민”이라는 말은 결국 ‘나’가 치리를 찾아올 거라고 믿었기 때문에 쓸 수 있는 것이었다. 치리가 ‘나’를 찾아오고 또한 ‘나’의 방문을 기다린 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치리는 부드러운 어조로 독자에게 동참을 요구한다. 「요새」의 화자가 “뜨개질 같은 것은 일찌감치 집어치우고, 다육식물에 관한 연구를 시작”한 것처럼 상대방을 위한 사랑을 행동으로 옮기기를, 조롱하지 않기를 바란다. 시인은 이처럼 사랑하자고, 아프게 하지 않는 사랑을 하자고 시를 통해 우리를 부른다. “다육식물에 관한 연구”를 어떤 방식으로 펼칠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나도 그 사랑을 감각하고, 말하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