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셔의 손 - 2017년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김백상 지음 / 허블 / 2018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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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번에 장편소설 한 편을 다 읽었다. 흐름이 끊길까봐 별로 쉬지도 않고 다섯 시간 삼십분 동안 몰입했다는 말이다. 에셔의 손은 그 정도로 흡인력이 강한 SF소설이다!




에셔의 손은 인간의 뇌에 전자두뇌(이하 전뇌)를 이식하는 게 보편화된 사회에서 전뇌해킹을 통해 기억을 삭제하고, 삭제 당하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렇게 기억을 잃은 사람은 백지증후군환자라 부른다. (이외의 스포는 최소화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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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형식 측면에서 눈에 띄는 부분이 두어 가지 있었다.

첫 번째 특징은 각 장 별로 서술시점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각 장의 중심 인물들이 백지증후군을 둘러싸고 다각도로 조명해서 독자가 그 너머의 상황을 짐작하는 재미가 있다.

 

1장은 기억을 지우는 손’ ‘김진의 시점으로 시작된다. 왜인지 알 수 없지만 <원칙>에 따라 <대상>의 기억을 삭제하려 고군분투한다. 진은 때때로 뜻하지 않아도 떠오르는 육사의 시 광야를 읊조리며 일한다.

 

2장은 전직 격투기 선수 최수연의 회상이고, 수연의 테마는 살인하는 손이다.

3장에서는 백지증후군의 내막을 따라 추적하는 손을 가진 강현우가 등장한다.

4장은 3의 손이라는 제목 하에, ‘정미연섭리(전뇌)’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5장에서는 손과 손’, 진과 현우가 기억을 잃으며 갈등이 고조되고,

마지막 6장에서 손들의 형태가 드러나며 이 열린 결말로 인도한다.

 

나는 특별히 진의 시점에서 서술되는 문장들이 마음에 들었다. 작중 공감능력이 가장 뛰어난(?) 인물이기도 하고, 감각적인 표현을 많이 쓰기 때문이다. “회로의 분기점에 다다른 전자처럼 나는 고심했다.” “곧게 선 뒷모습이 행성의 이면처럼 검었다.” “빛과 어둠의 인수인계가 마무리되는 하늘을 바라볼 뿐이었다.” “피어나는 식물의 떡잎처럼 그가 고개를 들었다.” 등이 1장에서 진의 시점에서 서술된 문장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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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눈에 띈 것은, 다중작업 처리가 가능한 전뇌설정에 맞게 텍스트가 배치된 점이었다. 15~16쪽에서 진이 <대상>의 정보를 검색하는 장면이라든가, 175~176쪽에서 현우가 잠복해있는 동안 관찰하고 생각하는 장면에서 2~3개의 텍스트가 세로로 단이 나뉘어 있는 게 전뇌를 설명하기에 적절해 보였다.

 

섭리의 전뇌에 담긴 기억이 말하는 부분에서는 ... .. . 할머니의 손은 나무껍질처럼 건조했다.” “... .. . 눈을 뜬다.”처럼 페이드인(?) 효과가 보여서 서술자에 따라 달라지는 텍스트를 흥미롭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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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적 특징은 아니지만 이육사의 광야가 작중 곳곳에서 재현되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이렇게 세련된 한국적’ SF라니! 광야가 등장한다는 것 자체로도 에셔의 손이 힙하고 다채로운 문학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소설 속에서 섭리<밀리건의 문> 코드를 작성하며 파일 첫 머리에 광야를 삽입했는데 그 이유를 듣다보면 섭리가 상당히 감성적인 공돌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

 

(286)

<밀리건의 문>은 한 편의 시와 같다. 한 줄 한 줄 행갈이 된 코딩문이 시의 행을 떠올리게 한다. 행과 행이 얽혀 시의 이미지를 창출하듯 각각의 코딩문들이 맞물려 프로그램에 생명을 부여한다.

 

(288)

광야의 시적 화자는 눈 내리는 세상에서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며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기다린다. <개벽>을 바라는 나의 심정과 같다. 광야야말로 <밀리건의 문>에 걸맞은 서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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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셔의 손에서 한국적인 요소는 사실 많은 페이지에 스며들어 있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2장에서 수연이 전뇌불능자가 된 대목이 현실적인 한국의 모습으로 생각되었다.

 

(138)

병원에서 발급받은 진단서를 제출하자 전뇌불능자 및 기타생활보호대상자 보호법에 의해 나는 전뇌부적응자로 분류되었다. 내 몸 어딘가에 불량품이라는 딱지가 붙은 듯 께름한 기분이었다. 그 딱지가 내게 남은 마지막 희망이었다.

 

전뇌 이식이 대중화된 시대에는, 원래의 신체와 전뇌가 부적응 반응을 보이면 전뇌부적응자로 낙인찍힌다. 우리 시대의 장애인에 대한 비유처럼 느껴졌다. (여담이지만 소설의 후반부에서 수연이 기억을 삭제당한 뒤, 더 이상 말을 더듬지 않는 것을 보고 묘한 기시감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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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임새가 탄탄하지 못한 리뷰였지만-,-;; 그래도 마지막으로 이 책의 재미를 한 번 더 강조하고 싶다. 첫줄에서도 말했듯이 에셔의 손은 몰입감이 뛰어난 작품이고 박진감 넘치기 때문에 누구나 즐기며 후루룩- 읽을 수 있다. 독서가 어렵지만 소설 읽는 습관을 들이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하고픈 작품이다!

<밀리건의 문>은 한 편의 시와 같다. 한 줄 한 줄 행갈이 된 코딩문이 시의 행을 떠올리게 한다. 행과 행이 얽혀 시의 이미지를 창출하듯 각각의 코딩문들이 맞물려 프로그램에 생명을 부여한다. - P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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