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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재난 국가
이철승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월
평점 :

도서관에서 라벨 정리 작업을 하다가 『왜 저 사람은 나보다 출세가 빠를까』라는 책을 발견했다. 일본인 저자가 쓴 것이지만, 한국인에게도 익숙한 질문이다.

“옆집 민수는 수학 백점 맞았다던데” 라든가, “네 사촌 도연이는 서울대 갔는데 너는 인하대구나?” 같은… 듣기만 해도 피곤한 말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되)며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느낀다. 이런 현상에 대해 이철승 교수님은 두 나라 모두 동아시아의 벼농사 문화권에 속하기 때문이며 그밖에 여러 사회문제들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라고, 『쌀 재난 국가』를 통해 말한다.
(48쪽)
나는 쌀 이론을 통해 …위계구조와 불평등, 불평등에 대한 인식, 급속한 경제 발전, 협력과 경쟁의 공존, 행복과 질시, 교육열과 사회이동, 노동시장 구조, 성차별, 연공 문화의 존속 그리고 소통의 문화까지 포괄한다. 이 모두는 종속변수에 대해 나는 ‘벼농사 경작 시스템’이라는 단 하나의 독립변수를 제시할 것이다.
초반엔 이렇게 폭 넓은 이야기를 ‘쌀’로만 설명하는 게 가능한가? 싶었지만 본문을 읽으며 저자가 깊이 고민하고 연구한 결과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곳곳에 등장하는 통계분석 자료들이 신뢰도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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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서평을 쓰기 전 보도자료를 검색해보았다. “50대가 포기하자, 한국사회 불평등 없애려면” 이라는 꽤나 자극적인 표제가 상단에 노출되었다. 『쌀 재난 국가』의 핵심을 뽑아낸 문장이라고 생각했다.
『쌀 재난 국가』에서 1~4장은 우리(동아시아)가 ‘벼농사’를 지으며 어떤 방향으로 진화했는지, 5~6장은 ‘연공제’로 인해 흔들리고 있는 한국의 오늘을 보여준다. (※ 이 서평에서는 5~6장에 집중했다.)

연공제(年功制)는 “근무연한에 따라 임금과 직급이 상승하는 임금제도”를 뜻한다. 전세계에서 연공제를 고집하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저자는 바로 이 연공제가 우리 사회를 녹슬게 하는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대부분이 농사를 짓던 조선시대에는 연공제가 효과적으로 작동했겠지만(2장의 ‘평수리’ 예시 참고) 지금은 아니다. 연공제는 청년과 중장년 세대간 갈등, 남녀(또는 여남) 갈등을 영속화하고 있다.
(318쪽)
벼농사 체제의… 여성을 배제하고 차별하는 제도적 기제는 앞서 분석한 연공-세대-인구의 중심축인 ‘연공제’다. 연공제를 강하게 고수하는 기업일수록 남성과 여성 간 임금 차별이 심하다.
(344쪽)
혁명적 수준의 제도 개혁 외에는 답이 없다. 가장 좋은, 가장 빠르고 확실한 대안은 모든 조직의 의사결정기구에서 여성의 대표성을 높이는 것이다. 그런데… 여성을 평등하게 대우하면, …저항은 남성 위주 지배 구조에 진입하지 못한 채 긴 실업과 구직의 대열에 서 있는 청년 남성들에게서 가장 높을 것이다.
(345쪽)
2010년대 이후 악화된 청년 세대의 젠더 간 혐오 문화의 기저에는 주어든 정규직 일자리를 둘러싸고 극심한 경쟁을 조장하는 연공-세대-인구의 착종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저자의 진단을 읽자, 가려웠던 등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남성 신입사원 선호 경향, 출산으로 인한 경력 단절과 승진 한계 등의 현상을 단순히 성차별이라고 뭉뚱그리지 않고 날카롭게 분석해냈기 때문이다.
나는 곧 취준생 단계에 진입할 청년 여성이기도 해서 이런 갈등과 불평등을 (알고 싶지 않아도) 소름끼치게 체감하고 있다. 아직은 연공제를 고집하는 기업이 전체의 2/3에 달한다고 한다. 구직자인 나에게는 당장 세상을 바꿀 힘이 없다. 그래서 더욱, 저자의 주장에 목소리를 보태고 싶어졌다. 그동안 연공제의 덕을 톡톡히 본 이들에게, 모두가 함께 살기 위해 조금만 나누어달라고 말이다. 쉽지 않겠지만, 이 책이 강한 메시지를 담고 세상에 나온 만큼 세상도 답해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