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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리어 열도의 기원 - 김가경 소설집
김가경 지음 / 강 / 2020년 12월
평점 :
다음은 <배리어 열도의 기원> 중 3부 연작소설 <다소 기이한 입장의 C>, <미에 가깝고 솔에 다가가는 파>, <야자수 나라>를 읽은 소감이다.
"고갱의 그림 속에서 막 걸어 나온 타히티 여자처럼" 보이는, 유난히 튀는 옷차림새로 다니며, 사시가 있어서 타인과 시선이 잘 맞지 않는 여자가 있다. 창작촌의 작가들은 웃음을 자주 흘리고 계속해서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여자를 경계한다. 아이처럼 행동하는 여자는 단단히 사회화된 사람들 사이에서 도드라져 보인다.
여자의 이름은 '정숙', 자기 올케 '미란'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고 다닌다. 정숙은 미란의 하나뿐인 선생님을 언급하며 자신에게도 선생님이 있다고 주장한다. 시인 '그'와 'C'의 작업실에 방문한 날, 정숙의 상상 속 선생은 곧 C로 대체된다. C가 정숙의 세계를 인정해주었기 때문이다.
🔖51-52쪽
"이 세상은 공처럼 둥글고 보이지 않는 막대기에 꽂혀서 돌아간대요. 이 세상은 거북이 등을 타고, 떨어지는 별을 피해다닌대요. 파란색은 바다, 빨간색은 시암, 초록색은 버마."
(...)
"아름다운 이야기군요."
(...)
"저도 거북이 등을 타고 다니다 돌아오는 길입니다."
🔖56쪽
"천사가 다녀간 거 같지 않아?"
그는 열린 미닫이문 밖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녀의 방문에 대해 정리가 될 만한, 더할 나위 없이 근사한 마무리 문장이었다.
'그'는 정숙의 방문을 불편하게 여기면서도 '천사'라는 단어를 수식한다. C는 정숙의 말에 공감해주지만 '그'의 평가에는 동조하지 않는다. 위선과 솔직함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장면이다. 이후 '그'가 매끄럽게 재단된 시집을 출간한다는 점에서 위선을 버리지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정숙의 이야기는 <미에 가깝고 솔에 다가가는 파>에서 이어진다. '그'와 C가 떠난 자리에 '수경'이 새로 입주하지만 정숙은 자신의 선생님을 찾아 계속해서 창작동에 찾아온다. 수경은 앞선 단편에서의 '그'와 C의 중간에 가까운 인물이다. 적극적으로 호응하지는 않지만 정숙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정숙은 그런 수경에게 역시 선생님 호칭을 붙이며 뱃고동 소리와 잡채라는 단어로 수식한다.
한편 창작촌 작가들은 정숙의 방문을 불편해 한다. 쫓아내고 쫓아내도 정숙이 계속해서 C 선생을 찾으러 오자 작가들은 수경에게 책임을 묻는다. 그들의 불쾌감을 이기지 못한 수경은 결국 재입주 심사에서 탈락하고 이사하는데 그 동네에 미란이 살고 있었다.
<야자수 나라>에서 사라진 정숙을 찾으러 다니는 미란은 무례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정숙과 마찬가지로 꾸밈이 없다. 수경은 그들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예술가로서의 진정성을 고민한다. 과거 명왕성을 떠올리며 공연했을 때와, 겉보기에 멋지기만 한 현재의 공연 사이에서 '내 안에서 나오는 소리'에 집중한다.
🔖70쪽
'너무 작고 왜소해서 주변의 천체를 위성으로 만들거나 밀어내는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인간이 자의적으로 영구 제명시킴. 그래도 명왕성은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다.'
(...)
조명도 비추지 않는 어두운 무대 귀퉁이에 앉아 내는 소리였지만 명왕성은 그 소리를 들을 것만 같았다.
🔖107쪽
나는 행렬을 따라가려다 걸음을 멈추었다.
(...)
이상한 것은 내 안에서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는다는 거였다.
(...)
그가 올라오라고 손짓을 했지만 올라갈 수가 없었다.
명왕성은 겉보기에 투박하고 어둠 속에 가려진 인물을 상징한다. 수경이 끊임없이 '내 안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으려고 귀기울이는 것은 명왕성의 처지에 공감하기 위해서라고 여겨진다. 정숙과 미란의 말을 흘려듣지 않는 수경에게는 그럴 자격이 있다.
수경이 정숙에게 C선생을 찾아주지 못하고, 미란에게 정숙을 찾아주지 못하고, 여전히 그들 밖의 세상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끊임없이 진정성을 고민하는 예술가로서의 삶, 명왕성과 태양계 행성들의 중간자적 삶의 의미를 독자에게 일깨워준다. 연작소설은 여기에서 끝나지만 좀 더 곱씹어봐야겠다. 내 안의 값싼 연민이나 혐오의 감정을 비워내는 촉매제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