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파랑 - 2019년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천선란 지음 / 허블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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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파랑을 달리 말하자면 파랑으로 세상을 느끼는 콜리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인간 대신 휴머노이드가 기수로 뛰면서, 한국은 2035년까지도 경마가 성행한다. ‘C-27’은 경마를 위해 만들어진 단순한 휴머노이드지만, 우연한 실수로 인지학습기능을 탑재하게 된 별종이다. C-27투데이라는 말을 만나 함께 달리는 훈련을 받는다. 이 로봇은 하늘 바라보기를 좋아하며 후에 콜리라고 불리게 된다. 콜리는 인간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말을 타고 달리는 경기를 열게 됐나요?

인간이 재미있는데 왜 말이 달리나요?

말이 재미있어 하는 걸 어떻게 알죠?

 

관리자 민주는 투데이가 달릴 때 즐거워한다고 콜리에게 알려주었다. 콜리는 그 말을 듣고 투데이에게서 전해지는 생()의 진동을 감지하고는, 메모리에 기쁨이라고 저장해두었다. 그러나 경마에서 잘 이긴다는 이유로 투데이가 혹사당하게 되자 기쁨의 떨림이 사라진다. 콜리는 투데이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처럼 여겼고, 투데이가 아프지 않길 바랐다. 그래서 콜리는 어느 여름날, 투데이를 위해 스스로 낙마했다.

 

산산이 부서진 콜리는 연재를 만나 망가진 몸을 수리 받고 인생(?) 2막을 맞이한다. ‘인간처럼학습하고 행복을 느끼는 (그렇다고 주장하는) 로봇 콜리와, 감정표현을 자제하고 살갑지 못한 로봇 같은인간 연재는 특별하다. 소설이 깊이 진행될수록 콜리는 점점 인간처럼 말하고 인간처럼 취급받고, 연재는 지수, 연재, 보경, 그리고 전에 일했던 편의점의 점장까지, 그들과의 관계를 점차 배워나간다.

 

(콜리)

저에게 투데이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한 번 들어보시겠어요? 투데이를 행복하게 만드는 거예요. 행복만이 유일하게 과거를 이길 수 있어요. (231, 233)

행복만이 그리움을 이길 수 있다고 했잖아요. 아주 느리게 하루의 행복을 쌓아가다 보면 현재의 시간이, 언젠가 멈춘 시간을 아주 천천히 흐르게 할 거예요. (286)

살아 있다고 느끼는 순간이 행복한 순간이에요. 살아 있다는 건 호흡을 한다는 건데, 호흡은 진동으로 느낄 수 있어요. 그 진동이 큰 순간이 행복한 순간이에요. (302)

 

연재, 은혜, 보경 일가족의 오래 침체된 갈등은 콜리와 투데이를 통해 회복된다. 휠체어를 탄 언니를 돕기 위해 너무 일찍 철들어버린 연재, 한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원하지만 장애를 연민하는 사람들 때문에 남몰래 분노하는 은혜, 영화배우로서의 꿈을 포기하고 가족을 위해 식당을 차린 보경. 셋 중 누구도 악인이 아니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받고 회복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투데이를 살리자는 콜리의 말은 모두에게 변화를 야기했다.

 

로봇이 인간관계의 엉킨 매듭을 푸는 열쇠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천 개의 파랑은 다분히 SF적이면서도 지극히 문학적이다. 콜리가 인간들 사이에 마치 섬유유연제처럼 섞여 들어갈 수 있었던 건, 민주와 연재가 그를 인간처럼 취급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서로의 행복을 바란다는 점에서 콜리는 과연 인격체로 존중받을만했다. 결말에 이르러서는 콜리가 부서지는 장면이 사람의 죽음처럼 비극적이고 장엄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천 개의 파랑을 통해 모처럼 인간, 동물, 로봇의 존재를 동시에 고민할 수 있었다. 콜리가 하늘과 사람들을 파랑으로 느끼듯이, 나에게 파랑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았다. 파랑은 곧 사랑이다. 연재가 은혜를 생각하며 구상한 로봇에서 나는 파랑을 보았다. 사람들을 움직이는 요소는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은 파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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