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롤 에디션 D(desire) 9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김미정 옮김 / 그책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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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한창 상영 중이라 과연 영화를 볼 날이 올지는 알 수 없어도 미리니름 당하기 전에 책은 읽어봐야겠다는 마음에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상처 입은 두 여성이 만나 진정한 사랑에 빠진다는 식의 익숙한 퀴어 로맨스 서사인가 생각했다. 그래서 중반부를 넘어서도 주인공 테레즈에 대한 캐롤의 마음이 손에 잡히지 않는 듯해 갸우뚱했다. 결말도 자꾸만 비극에 가까운 결말만을 예상했다. 테레즈는 둘째치고 캐롤은 진심이 아니라 한순간의 불장난, 아니면 자기에게 호감 있는 젊은 여성에 대한 호기심으로 상대한다고만 여겼기 때문이다. 실제 후반부까지만 해도 캐롤은 과거 사귀었던 애비란 소꿉친구와 더 친밀해보였다. 그 모습에 나도 테레즈처럼 안달복달하면서 테레즈가 기만당하는 것만 같아 안타까웠다. 테레즈가 금세 사랑에 빠지는 기질인 만큼 회복력도 남달라보였기에 이번 고비를 무사히 잘 넘기면 나름대로 평탄한 삶을 살 거라 믿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테레즈의 캐롤에 대한 마음이 과연 사랑일까 의문스러웠다. 테레즈의 가족사를 보면 예술가가 되고 싶어했지만 실력 없고 패기도 없어 어정쩡한 위치에 머무르다 아내가 다른 사랑을 찾았기에 이혼해야 했던 아버지가 있었고 그 아버지는 테레즈가 여섯살이었을 때 죽어버렸다. 테레즈는 아버지와 달리 실력도 있고 야심도 있는 피아니스트인 엄마에게 반발하여 가능한 한 엄마의 힘을 빌리지 않고 살아가려 했다. 그런 상황이면 아버지에게 연민을 느끼고 아버지 같은 사람과 사랑에 빠지기 쉬울 법도 한데 테레즈는 엄마와 비슷한 느낌의 여성들에게 더 끌리는 듯했다. 테레즈가 캐롤에게 첫눈에 반하여 마구 돌진할 때는 마더 컴플렉스에 사로잡혀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때 푹 빠졌던 얼리샤 수녀와 로비체크 부인과의 관계에서도 그런 징후가 엿보인다. 중반까지 테레즈와 사귀던 리처드는 화가 지망생이지만 재능도 야심도 없이 어정쩡하게 갈림길에 머물러만 있었다. 반면 테레즈는 자기 엄마처럼 무대 디자이너로서 재능도 있고 야심도 넘친다. 상냥하지만 테레즈의 이상에는 못 미쳤던 리처드는 테레즈를 잡고 싶어했으나 포기하고 원망하며 떠나간다. 동시에 화가의 길도 버리고 만다. 리처드와 달리 캐롤은 매혹적이며 자신만만하고 패기에 넘친 것처럼 보여 캐롤이 남자라면 체홉의 <<갈매기>>에서 여주인공이 좋아한 소설가 느낌이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더더욱 불행한 결말을 예상했으리라. 캐롤이 테레즈를 갖고 놀다 버리는 결말을 말이다. 후반부로 가면서 둘의 관계는 역전된다. 초반부에서는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테레즈가 무서우면서도 불쌍하더니 후반부로 갈수록 캐롤이 불쌍하여 테레즈가 그대로 캐롤을 버리고 떠났으면 테레즈는 내 안의 나쁜 여자 순위권에 올랐을 것이다. 놀랍게도 둘은 이어졌고 그 결말에 퀴어 로맨스가 맞긴 맞구나, 영화 선전 문구가 거짓은 아니었구나 고개를 끄덕였다. 저자 후기에서 행복하게 끝나는 퀴어 로맨스를 그리고 싶었다고 해 1950년대에 그런 생각을 했다니 재미있는 사람이라 느꼈다. 후반부 캐롤의 권총으로 비극의 냄새룰 폴폴 풍겨 권총이 둘 사이에 큰 역할을 할 것이라 믿었는데 아무 일 없이 끝난 것에 맥이 빠졌다. 권총은 맥거핀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비극을 예상한 독자들을 한방 먹이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이런 깜찍한 사람 같으니. 하하. <<열차 안의 낯선 자들>>을 탈고한지 얼마 안 되어 집필을 시작했다는 말에서는 테레즈와 캐롤의 모습이 낯익었던 이유를 새삼 깨달았다. 전작의 둘처럼 테레즈는 경계선 인격장애, 캐롤은 회피성 인격장애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전작과 다른 점은 끈질기게 좇아다니고 애정을 갈구하는 사람이 주인공이며 둘 사이에 육체관계를 포함한 로맨스가 끼어들어 있다는 것일까. 
그나저나 번역이 말 많은 이유를 알겠다. 문장은 뒤죽박죽, 안 어울리는 관용구 범벅, 줄임말 남발('하고 싶은'을 '하고픈'이라 줄인 걸 대화 아닌 곳에서 보게 될 줄이야, 맙소사.) 오탈자 속출. 속이 메슥거린다. 차라리 평범하게 써라. 버티고의 하이스미스 번역처럼. 편집자가 셋이나 되던데 다 농땡이치셨는지. 영화 개봉을 앞두고 졸속으로 번역서를 내놓은 거 아닌가 의심스럽다. 인터넷 글쓰기면 상관없지만 파는 책이 이런 식이면 곤란하지 않나. 요새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에게 관심이 생긴 독자로서 더 화가 난다. 하이스미스 월드를 세우려는 내게 이런 시련을 안겨주다니. 하필 이 시리즈에 내가 읽고 싶은 책들이 잔뜩 있어 더더욱 뿔이 난다.
 
덧. 알고보니 '버티고' 출판사도 이 책이 나온 '그책' 출판사도 오픈하우스 계열이었다. 그러니까 같은 출판사란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은 왜 이리 번역이 심각하지. 번역자의 문제인가, 편집자의 문제인가. 둘은 편집자가 다른 걸까. 아니면 영화 개봉에 발맞춰 내놓느라 이렇게 된 건가. 문학 브랜드라면서 왜 장르문학 브랜드보다 못한 모양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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