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안 - 일본 최고의 미스터리 작가 9인의 단편집
미야베 미유키 외 지음, 한성례 옮김 / 프라하 / 2012년 12월
평점 :
품절


<<혈안>>은 추리소설 팬이라면 익히 들어왔을 일본의 유명 추리작가 아홉 명이 쓴 글을 모은 단편집이다. 작가들은 각기 자신의 평소 특기를 잘 살리면서도 숨겨져 있던 뜻밖의 모습도 보여 팬이라면 아주 즐겁게 읽을 만하다.
맨 처음 실린 미야베 미유키의 <혈안>은 그녀 팬이라면 아주 친숙할 특유의 시대물이었다. 일본의 시대물에 익숙지 않은 사람이라면 처음엔 당황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미야베 미유키를 알고 이 책을 집어든 사람은 퍽 반가워하며 읽으리라. 배경은 에도 시대로 시대 분위기를 잘 살려냈고 옛날 옛적이라면 있을 법한 요괴도 등장한다. 동글동글한 눈알들이 무더기로 달라붙은 거적때기(?) 요괴 퇴치담이다. 퇴마물치고는 조금 싱겁게 요괴를 물리친 감도 있으나 주요 인물인 두 일곱 살짜리 꼬맹이와 사투리로 말을 거는 고마이누 상이 귀여워 읽을 맛이 났다. 클라이맥스라 할 요괴 퇴치 부분에서도 종이 멍멍이들이 왕창 나와 무섭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고 되레 아기자기하여 <<백귀야행>>이나 <<세상이 가르쳐준 비밀>>같이 무섭지 않고 귀여운 기담 만화들이 떠올랐다.
아야쓰지 유키토의 <미도로 언덕 기담-절단>은 주인공의 거주지 근처 뇨로즈카 호수에 서식하는 괴물 탓에 발생한 사건을 주축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괴물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명기하지 않고 땡땡이로 처리하여 더 기괴했다. 원래 이름이 붙여진 것들은 정체가 어느 정도 확실하여 사람의 이성으로 충분히 처리할 수 있지만 이렇게 이름 붙여져지 않은 것들이야말로 정체를 모르기에 더 공포심을 자아낸다. 그래서 앞서 <혈안>은 마음 편히 읽었으나 이 단편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읽었다. 게다가 시대도 과거가 아닌 현대라 어쩌면 내 주위에도 이런 일들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어 더 무서웠다. 괴담과 도시 전설이 발달한 나라 일본의 작가다웠다. 시체 토막 숫자로 시체의 정체를 파악하는 부분에선 절로 무릎이 쳐졌다.
그리고 다음으로 내가 아끼는 작가 시마다 소지의 단편 <신신당 세계 일주-영국 셰필드>에는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명탐정 미타라이가 나온다. 데뷔작에선 좀 촐랑맞은 미청년이었는데 어느새 나이를 먹어 '나'라는 고등학생에게 자기의 경험담을 늘어놓는 아저씨가 되었다. 이 단편은 그가 세계를 여행하는 도중 들른 영국에서 겪은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를 화자인 '나'에게 하게 된 계기는 둘이서 교토 대학 근처의 한 식당에서 식사할 때 종업원이 복잡한 주문을 잘 처리하지 못하는 것을 미타라이가 도와준 일이다. 그 종업원은 정신 지체 장애인으로 간단한 주문은 잘 처리하나 복잡한 주문은 잘 처리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미타라이가 아무렇지 않게 나서서 도와주는 모습이나 그 방식에서 사람됨됨이가 보였다. 그가 풀어놓는 영국 여행담에서는 개리라는 학습 장애 청년과 그 아버지가 나온다. 개리가 완력이 센 사실을 안 아버지가 아들의 재능을 키워주고 당시 장애인이 운동을 하기 어려웠던 사회 환경을 일일이 격파하는 부분에선 아버지의 사랑을 절절히 느꼈다. 그리고 개리가 마침내 역도 선수로 성공했을 때는 그들과 같이 내 일처럼 기뻐했다. 작가는 그 에피소드를 풀어놓으면서 사회 문제를 너무 무겁지 않으면서도 진지한 자세를 잃지 않고 다룬다. 이 단편에서 나는 신본격 미스테리의 대부인 시마다 소지의 일면을 엿보았다. 그와 동시에 어쩌면 본격과 사회파는 그리 거리가 멀지는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해봤다.
요코야마 히데오의 <미래의 꽃>은 한 살인(?) 사건을 통해 평범한 한 가정이 어떤 식으로 꿈과 희망을 잃고 몰락하는 과정을 그려낸다. <<종신 검시관>>을 읽은 사람이면 당연히 알 구라이시 검시관이 이마무라 경찰이 들고온 사건을 이야기와 사진만으로 그 자리에서 해결하는 것이 주된 전개다. 추리물로서 갖춰야 할 논리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사회파 미스테리로서 사회의 어두운 모습을 잘 꼬집어냈다. '미래의 꽃'이란 제목이 붙은 이유를 끝부분에서 알고 마음이 아팠다. 이 가정의 비극은 까딱 잘못하면 밑바닥 인생로 떨어지기 쉬운 현대 사회를 웅변하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일본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났고 또한 현재도 진행 중이다.
다나카 요시키의 <오래된 우물>은 영국의 정통 미스테리의 향기를 풍기는 단편이었다. 그의 대표작인 <<은하영웅전설>>과 달리 정통 미스테리라 뜻밖이었다. 무엇이 진실인지 결말에서도 도무지 풀리지 않아 작가분께 직접 묻고 싶을 정도였다. 아마 물어봐도 독자 마음이라는 말밖에 안 하실 테지만 말이다.
이밖에도 모리무라 세이치, 오사와 아리마사 등 쟁쟁한 추리작가분들이 나온다. 인상 깊은 작가, 애정도 순으로 적느라 미처 쓰진 못했으나 그분들 작품도 즐겁게 읽었다. 각 작가분의 팬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한다. 작가분들 유명 시리즈의 주인공이 활약하는 단편들이 있어서다. 그러므로 각 작가의 전작 주의자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단편집이다. 그렇지만 그분들을 처음 접하는 독자라 해도 즐겁게 읽을 것이라 믿는다. 물론 그 인물들을 알면 배로 재미있을 테지만 몰라도 이야기 전개를 이해하고 즐기는 데에 불편함은 없고 새로운 나의 작가를 발견하는 즐거움도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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