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 존
기시 유스케 지음, 한성례 옮김 / 씨엘북스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판타지나 SF를 읽을 때는 작가가 구축한 세계를 머릿속으로 그려가면서 그 세계만의 규칙을 발견하고 사건마다 적용하는 재미를 느끼곤 한다.
이 소설 역시 그런 재미를 안겨줬다. 바둑이나 장기에 대해서는 만화 같은 데에서 슬쩍 맛만 봤을 뿐 잘 모르는지라 초반엔 고생하며 읽었지만 읽다 보니 어느 정도 세계관이 이해되면서 정신없이 사건의 본질과 전개를 더듬어가며 읽었다.
그리고 이러한 장르의 특별한 재미 중 하나라고 할 힌트 모아 퍼즐 맞추기를 즐겼다. 작가가 하나씩 던져주는 암시들을 모아가면서 이리저리 궁리했다. 처음엔 <매트릭스>와 같은 세계려나 추측했고 종반 부분에 다가갈 즈음 등장인물들의 머리만 두둥실 떠오르는 장면에서는 뇌만 따로 떼어 냉동시킨 냉동 인간들이 머릿속으로 구축해낸 세계를 대입하기도 했다. 끝까지 다 읽고 나서 내린 결론은 루프물이었는데 어째 한때 SF를 지독하게 읽은 탓에 해답에서 비켜났다 생각하니 슬쩍 웃음이 났다. 물론 결말은 웃음을 이끌어내는 종류가 아니었지만 말이다.
과연 루프물답게 남자 주인공은 한심하고 여자의 마음을 영 몰라줬다. 이 작품에서 완벽하게 나쁜 사람은 주인공과 여자친구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이간질한 여자 정도였고 나머지 사람들 그중에서도 오쿠모토는 끄트머리에서 비열한 짓을 잠깐 하기는 했어도 그렇게 나쁜 사람이라는 인상은 받지 않았다. 그는 주인공에게 책임 전가를 당해 인생 종친 불쌍한 사람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결국 이 모든 일의 원흉은 소심하고 나약해 빠진 주인공일지도 모르겠다. 자기 문제에만 빠져 주위를 돌아볼 줄 모르던 한 남자가 잃고 나서야 진정 자신에게 소중한 게 무엇이었는지 깨닫는 이야기라고 정리된다. 가련한 남자는 끝없이 허무하지만 나름대로 행복한 전장에 끝없이 나설 뿐이다. 그래 봤자 잃었던 것을 되찾을 가능성은 없는데 비록 허상일지라도 한 가닥 희망을 움켜잡고. 이 세상은 그런 일들로 가득 차 있다. 작가는 그런 세상에서 자신의 바로 곁에 있는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고 작은 행복들을 잊지 말라며 넌지시 충고를 던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시종일관 가혹한 전쟁터를 그리는데도 따뜻하고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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