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중요한 것은 "예언"이란 말을 사용함으로써 이 책의 묵시적(apocalyptic) 비전 자체가 고대 성서 전통의 권위 있는 예언적 비전에속하며, 의존하며, 앞으로 계속 나아감을-방어적으로 그리고 논쟁적으로-선언한다. - P44

요한은 그의 책 결론쯤에 새롭고 변화된 세계로서 오고 있는 것을 새 예루살렘에 대한 비전에서 절정에 달한 것으로 요약한다. - P45

더구나 당신이 믿는(faith) 하느님은 분배 정의로 세상을 다스리지만(예를 들어, 시편 82편), 당신의 경험(experience)은 반복되는 제국의 불의라면, 어떻게 그 어긋남/불일치를 조화시킬 것이며, 그런 인지 부조화를 어찌 해결할 것인가? 이스라엘의 대답을 요약하면 이렇다. 하느님이 언젠가는 승리하실 것이다. - P47

마지막으로, 이런 극단의 의기양양한 순간에도, 이스라엘은 그 자신을 위한 갱신만이 아니라, 모든 땅을 위한 일반적인 갱신도 상상했다. 아마도 인격화된 이스라엘의 포로기 고통은-표준적인 신명기 신학에서처럼-민족의 죄악에 대한 정당한 처벌이 아니라, 제국의 죄악을 위한 대리 속죄(vicarious atonement)였다(이사야 53장). 제국주의 자체가 공개적으로 바빌론의 억압으로부터 페르시아의 지원으로 "전환"되었으니, 이스라엘의 대리 속죄는 분명히 성공했다. 그래서 만일 제국이 변할 수 있다면, 세상도 변하지 않겠는가? - P49

세례자 요한이 벌인 하느님의 세례(baptism of God) 운동과 예수가 벌인 하느님의 통치(rule of God) 운동 모두를 똑같이 싫어하여 반대하는사람들은 마태오복음 11:18-19과 루가복음 7:33-34에 있는 다음과 같은 부정적인 평가를 통해 여전히 그 두 운동을 구별했다.

요한이 나타나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니까 ‘저 사람은 미쳤다.‘ 하더니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까 ‘보아라, 저 사람은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와 죄인하고만 어울리는구나‘ 하고 말한다.

우리는 이처럼 악의적으로 중상 모략하는 해석을 무시할 수 있다. 그러나 기본적 사실은 요한이 금식(fasting)을 잘하는 반면, 예수는 잔치(feasting)를 즐기는 것으로 알려졌다는 점이다. 금식은 곧 올것(what iscoming soon)을 위해 준비하는 것인 반면, 잔치는 이미 온 것(what hasalready arrived)을 축하하여 벌이는 것이다. - P55

예수가 이스라엘 백성의 종말론적 기대에서 그 패러다임을 바꾼 것은 하느님의 통치가 이미 여기에, 혹은 더 나은 표현으로, 항상 여기에 있었다는 점이지만, 그 통치가 성장 과정에서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신과 인간의 협조를 통해서뿐이라는 점이다. 예수의 비전을 참여적, 협력적, 혹은 보다 간단히 계약적인 종말론이라고 부르자.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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