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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교육 - 골든세계문학선 13
플로베르 지음 / 중앙출판사(중앙미디어) / 1992년 4월
평점 :
절판
19세기 프랑스 문학사에서 플로베르가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어떠한 사조에도 속할 수 없는 그만의 독특한 관점 때문일 것이다. 흔히 낭만주의의 마지막 세대로 또는 사실주의의 선구자로 해설되는 그의 작품은 실상 낭만주의로도 또 사실주의로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특히 '감정교육'은 삶의 현실에 대한 치밀한 관찰과 꿈으로 인도되는 이야기의 복잡 다단한 상호 연관관계를 개인의 이야기histoire와 역사Histoire 속에서 훌륭하게 그려내고 있는 역작이다.
꿈꾸는 자아의 내면으로 침잠하여 자연과의 만남을 강조하는 낭만주의의 관점에서 보자. 이 작품에는 스스로 되돌아 볼 주인공 내면의 깊이도 없을 뿐더러 돌아가야 할 원점으로서의 자연도 없다. 주인공의 심리는 고정되지 않고 늘 이리저리 방황하며, 각자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의 논리를 따라간다. 그들은 낭만적이기 보다는 오히려 정치적이며, 그들이 처한 19세기 전반기 격동의 세월은 거시적인 정치와 미시적인 정치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온갖 전략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렇다면 사실주의인가? 실제로 인물들이 등장하고 만나는 장면들에서 배경은 너무도 섬세하게 묘사되고 있다. 배경에 대한 충분한 설명 후 시작되는 인물들의 동작, 섬세한 제스쳐들은 이 작품이 사실주의의 선구라는 모파상의 말을 그럴듯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등장인물들의 행위들을 이끄는 꿈은 어찌되는가? 안타깝게도 이 작품은 졸라의 작품들에 비해 환상과 이미지, 꿈들의 힘이 너무나도 강력하게 살아 있다. 꿈은 현실과 부단히 부딪히며, 현실을 유발하지만 그것은 늘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나폴레옹 3세 휘하 경찰관으로 돌변하여 옛 동지 뒤사르디에를 죽인 세네칼은 그 절정을 이룬다. 일관성이 없어 인생이 허무한 프레데릭, 일관성만 있어 인생이 허무해진 데로리에 등, 인간 삶의 불완전성은 꿈과 현실의 부단한 상호작용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꿈과 현실의 만남 외에도,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만남은 바로 일상적 인간들의 작은 정치들과 거시적 정치사회의 만남이다. 내면의 신념을 지켜나가는 주인공이 없는 바에야, 이상적인 정치도 기대할 수 없는 것이 플로베르의 관점이다. 주인공 프레데릭에게 돈을 빌려주며 내뱉는 뒤사르디에의 절망은 19세기 프랑스인의 것만은 아니리라. 정치상황에 따른 재빠른 의견의 수정, 이권에 따른 이합집산, 권력을 향한 동화와 차별의 전략들... 정치적 격변의 소용돌이는 의지를 지닌 인간의 걸작이 아니라 삶의 전체적이고도 구체적인 상황을 규정하는 조건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여기에 다시 우리는 실제 현실 역사와 작가가 구상한 가상의 이야기가 다시 맞물리는 현실과 꿈의 또 다른 만남을 목격한다.
꿈 없는 현실의 삭막함과 현실 없는 꿈의 공허함을 작가는 한 번에 뛰어넘는다. 꿈과 현실이 뒤섞인 영역에서 낭만주의적 주체는 상황의 논리 속에서 현실적인 모습으로 해소되고, 객관화된 인물들의 모습은 그들의 꿈과 욕망으로 귀착한다. 꿈을 좌절시키는 현실은 비관적이지만 다시 꿈을 생성하는 현실은 낙관적이다. 이 비관과 낙관의 리듬을 조절하는 것은 바로 인간들 간의 삶의 관계망, 즉 서로 다른 수준들이 복잡하게 얽힌 정치적 삶들의 영역이다. 모든 삶들이 귀속되는 이 정치적 삶들의 영역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면서, 이 작품은 스스로 또 하나의 정치적 견해이고자 한다. 예술은 세네칼이 말하는 도구로서가 아니라 조각난 등장인물들 각각의 꿈으로서 그 정치적 견해를 획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