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 과학 인문학 - 유럽 지적 담론의 지형
이종흡 지음 / 지영사 / 199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푸코의 '말과 사물'이 비워 놓은 여백의 공간을 거칠게나마 이어 놓은 역작이다. '말과 사물'에 한 번쯤 심취해 본 독자라면, 푸코가 에페스테메라는 지식 발생의 세 가지 토대를 제시하면서 그 변화 과정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어차피 그에게는 기원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에, 또 모든 현상들이 배경들을 찾아가는 과정은 지식의 단절성이라는 테마를 흐릴 수 있기에 그러한 그의 침묵에는 이유가 있다. 하지만 그 침묵은 푸코에게 맡겨두자. 그의 방식에 영감을 받았다 할지라도 호기심은 침묵을 말하게 할 권리를 갖기 때문이다.

저자는 정말 드물게도 푸코의 첫번째 침묵에 대해 이야기를 건다. 르네상스 시기의 인식방법론에서 고전주의 시기의 인식방법론으로의 이동, 즉 유비 체계에서 표상체계로의 전환, 또 인문학의 형성과정이 비학의 전통과 프랜시스 베이컨, 지암바티스타 비코를 중심으로 밀도있게 펼쳐진다. 실제로 이 세 테마는 푸코가 주의 깊게 관찰하지 못했던 철학 들이다.  하지만 푸코에게서나 저자에게서나 중요한 것은 논의의 내용들보다는 논의되는 방식들, 개념을 형성하는 방식들, 그리고 그와 연계된 정치적 정당성의 획득이다. 폐쇄적 비학담론은 평면적 표상체계를 통해 누구나에게 접근을 허용하는 과학의 담론으로 펼쳐지며, 다시 표상담론의 평면성은 인문학을 통해 그 의미의 깊이를 확보해낸다. 비학은 과학의 기둥이 되며, 과학은 인문학의 터전이 된다.

비학, 베이컨, 비코라는 세 인물에 치중하여 각 시대적 특성을 전반적으로 그려내는 데에는 부족한 점이 없지 않지만, 각 인물들을 통해 드러나는 지식 형성의 독특한 국면들은 생생하게 살아 있다. 푸코가 서로 떨어져 있는 지식 체계들의 매끈한 경계선들을 그었|다면, 저자는 이 체계들이 모순 속에서 얽혀 공존하는 경계선의 복잡다단함을 잘 그려내고 있다. 

아마도 훨씬 고되겠지만, 루소와 칸트를 기점으로 한 고전주의에서 19세기 담론으로의 전환에도 이와 유사한 연구작업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으리라. 또 저자가 다루는 시기의 다른 사상가들의 인식론에 대해서도 면밀한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르네상스는 중세와 어떤 다른 관계를 맺는지, 14세기 둔스 스코투스와 윌리엄 오캄의 인식론적 변혁은 어떻게 자리매김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진지한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이렇게 기존 서양 지성사의 여백을 우리가 색칠하고 침묵을 말하게 할 때, 그것은 우리가 바라보는 서양의 모습, 우리와 이야기하는 서양의 지성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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