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정사회 한길그레이트북스 56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지음, 박여성 옮김 / 한길사 / 2003년 3월
평점 :
품절


기존의 서양 역사학에서 16-18세기는 이상하게도 나름대로의 특성을 지닌 독립된 시기로 연구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사회경제사의 관점에서 봤을 때에 이 시기는 왕과 귀족이 농민을 착취하는 봉건제의 연장이었고, 제도사와 정치사의 관점에서 봤을 때에는 19세기의 국민국가를 준비하는 근대국가의 시발점이었다. 즉 이 시기는 언제나 중세의 아류로서 끝내는 없어져야 할 찌꺼기이거나, 19세기의 유럽국민국가가 되기엔 아직 무르익지 못한 풋내기였다.

기존의 관점들에 대해 미시적인 권력의 문제를 기본 관점으로 채택한 엘리아스는 중세와도 다르고 19세기와도 다른 이 시기만의 특성을 밝히고 있다. 중세 봉건제 권력의 바탕이 끊임없이 분열되고 통합되는 토지에 있었고, 19세기 부르주아 권력의 바탕이 늘 유동적인 자본에 있었다면, 이 시기의 권력의 바탕은 아무도 그 실체를 알지 못한 채 이용하면서 동시에 복종해야만 했던 왕에게, 더욱 정확히 말하면 '왕의 자리'에 있었다.

왕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개인으로서의 왕은 전통귀족과 대검귀족이라는 한 부류와 부르주아 출신의 상인과 법복귀족이라는 한 부류 사이를 조정하고 중개하면서 권력의 균형을 유지했다. 이는 다시 양자에 대한 왕권의 개입을 극대화 할 수 있는 계기를 산출했다. 엘리아스는 이와 같은 절대왕정의 메커니즘을 앙리 4세에서 시작되어 루이 15세 시기로 끝나는 프랑스 절대주의 역사로 제시하고 있다.(이러한 관점에서 '문명화 과정II'는 중앙집권적 권력이 형성되는 과정을 14세기부터 고찰하고 있으며, 이 '궁정사회'에 대한 충분한 참고서가 된다.)

이와 같은 역사학적인 중요성 외에도 역사현상을 분석하는 그의 사회학적 이론틀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다. 엘리아스가 강조하는 '결합태', 즉 'figuration' 이라는 개념은 한 사회가 구성되는 상호의존적인 권력의 기본 구도를 다층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한 사회는 개인의 계획대로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간의 복잡한 상호의존관계를 통해 모습을 갖추게 된다.

예를 들어 궁정사회라는 커다란 권력의 틀은 왕이 의도한 모습은 아니었으며, 그가 모르는 사이에 그의 의도마저도 종속시킨 사회적인 공통의 권력구도 였다. 그것은 권력의 게임에 동참한 모두의 몸에 새겨진 보이지 않는 규칙이었기 때문에, 이 게임의 참가자들로서는 아무런 문제도 제기 할 수 없었던 삶의 기본태도였다. 엘리아스의 말대로 그것은 후천적으로 획득된 것, 즉 '하비투스habitus'(라틴어 '소유하다habere'의 과거분사)이다.

궁정사회란 바로 이러한 결합태의 특수한 한 종류이다. 그러므로 엘레아스의 입장을 밀고나간다면, 인간사회의 권력구조를 파악할 때 그 기본은 늘 탈주하려는 권력의 분산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공통지반의 모습을 갖추어 나가는 권력의 피드백작용이 된다. 메를로-퐁티의 지각하는 코기토를 연상시키는 이러한 그의 지적은 역자가 주를 통해 누누히 강조하고 있듯이 체계이론과 밀접한 관련성을 갖으며, 탈구조주의의 주장과는 또 다른 방식의 권력에 대한 관점을 제시한다.

뒤늦게야 서구지성사에 영향을 끼친 엘리아스 작업의 중요성은 시대를 앞서간 새로운 관점을 바탕으로 추상적인 이론의 차원에서나 구체적인 역사의 차원에서 진지한 문제를 던졌다는 데에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