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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너희 세상에도
남유하 지음 / 고블 / 2023년 3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남유하 작가는 독자의 연령대와 이야기의 장르를 종횡 누비며 지금 가장 두렵고도 날카로운 글을 쓴다. 청소년 SF 소설인 「푸른 머리카락」 이후 틈이 나면 챙겨보았을 정도로 좋은 소설을 다작하는 작가라 남몰래 팬이 된 지 꽤 시간이 지났다. 가장 최근에 읽은 단편집은 『나무가 된 아이』지만 청소년 소설이나 동화가 아닌 이야기로 소설집이 나온 건 『다이웰 주식회사』 이후 오랜만이라 서평단 모집 소식을 듣고 설레는 마음으로 신청했다. 얼마 뒤 처음 네 편의 소설만 실린 얇은 가제본이 집에 도착했다. 기대했던 대로 네 편의 소설은 선명하고 흡인력 있는 이미지와 속도감 있는 전개를 보여주는 남유하 작가만의 문체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첫 소설인 「반짝이는 것」은 좀비와 유사한 증상을 보이는 후천적 심정지 증후군 ACAS가 만연하고 웰다잉(well-dying)을 표방하는 기업 ‘다이웰 주식회사’가 생긴 미래를 가정한다. 전작 중 단편인 「다이웰 주식회사」와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 작품은 ‘잘 죽는 것’이란 무엇인지에 관한 일종의 실험이다. 「반짝이는 것」의 주인공 역시 「다이웰 주식회사」와 마찬가지로 노인이다. 단지 나이를 먹었다는 이유만으로 노인들이 멸시받는 세상을 손쉽게 타자화의 대상이 되는 ‘좀비’를 이끌어와 그려냈다. 두 소설을 함께 읽으면 더 폭넓은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소설인 「에이의 숟가락」은 평범하지 않은 숟가락으로 무심히 가족을 죽이는 에이의 시점에서 쓰인다. 이 숟가락은 젤리를 푸듯 사람의 살을 깔끔히 잘라낼 수 있을 뿐 아니라 피를 빨아들여 완벽한 살인을 가능하게 한다. 그는 처음에 욕망에 가득 차 사람을 죽이지만, 이후에는 마치 의식이 숟가락에게 제거당한 것처럼 습관적으로 살인을 저지른다. 이 소설의 결말은 숟가락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나 그러지 못한 에이의 처참한 말로를 보인다. 살인의 유희도 오롯한 복수도 아닌, 경계의 즈음에서 벌어지는 에이의 심리 변화에 주목하여 읽으면 좋을 소설이다.
세 번째 작품인 「뇌의 나무」는 소설이라기보다는 시의 형식에 가깝다. 마치 서사시처럼 길게 늘어지는 이야기 안에서 자연과 보호, 신비한 권능을 상징하는 나무는 인간의 탐욕에 의해 무너진다. 이 소설은 동화집 『나무가 된 아이』를 떠올리게 한다. 비인간 존재로서 나무가 형성하는 으스스함과 공포가 소설 속 인간들이 느끼는 두려움을 보다 비범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인간이 저주해야 하는 것은 뇌를 가진 나무였을까, 아니면 끝없이 타 존재를 착취하려는 그들의 탐욕이었을까.
네 번째 소설은 「화면 공포증」이다. 공포 소설은 때로 이미 우리에게 친숙한 소재를 가져와 일상적인 오싹함을 형성한다. 거울 속 귀신을 소재로 한 콘텐츠를 보고 화장실이나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는 게 무서워지는 것처럼 이 소설을 읽으면 왠지 디지털 기기의 화면을 들여다보는 것이 두렵다. 화면을 오래 보면 눈과 머리가 무거워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공포증이 찾아와 인간의 정신을 삼켜버릴 수 있을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화면으로 가득한 이 세상은 얼마나 혼란스러워질까. 이 소설이 주는 일상적 공포는 상상 이상으로 우리와 가까이 있다.
남유하 작가의 소설은 인간의 어두운 모습을 묘사할 때 빛난다. 이 역설적인 표현이 가능한 이유는 그가 공포 소설에 끝없이 도전하기 때문일 것이다. 가장 은근한 것부터 섬뜩하고 잔혹한 묘사까지 서슴지 않는 작가의 다재다능함에 오늘도 감탄한다. 끈끈하고도 어두운, 그러나 그 속은 무엇보다 신비하고 다채로운 남유하라는 이름의 늪에 조금 더 깊이 잠겨 본다. 난 이 늪에서 유영할 때 가장 다양한 색의 감정을 만난다. 지금도 밑바닥에서 새로이 솟아나는 이야기를 찾으러 잠수한다. 영영 표면으로 떠오르기는 힘들겠다는 듯이.
*본 리뷰는 고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