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결국 부모를 떠나보낸다 - 부모의 마지막을 함께하며 깨달은 삶의 철학
기시미 이치로 지음, 박진희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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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변함이 없던 부모님이 만날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느끼는 나이 대의 자녀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거동이 불편하시거나 치매에 관한 걱정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오늘 소개할 #인플루엔셜 에서 출간한 #기시미이치로 의 실제 치매 부모 간병기를 통하여 배운 것을 나누는 #우리는결국부모를떠나보낸다 를 보며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다. 기시미 이치로 작가는 우리에게 미움받을 용기로 꽤 유명한 작가이다.





인플루엔셜에서 출간한 기시미 이치로의 실제 치매 부모 간병기를 통하여 배운 것을 나누는 우리는 결국 부모를 떠나보낸다는 총 4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는 마흔아홉 살에 뇌경색으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 이야기, 2부부터는 치매에 걸린 아버지와의 일상이 중심이다. 특별한 사건 없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상과 기본적인 간병의 현실을 담아 같은 경험을 한 독자에겐 위안을, 아직 겪지 않은 독자에겐 통찰을 건넨다.






특히, 철학을 하는 작가의 특성상 미리 치매에 걸린 부모를 대하는 것에 능숙하리라는 예상을 깨고 스스로 화를 다스리지 못하는 상황도, 권력 구도 안에서 치매에 걸린 부모와 대치 관계를 벌이는 일도, 매번 같은 것을 묻고 억지소리를 하는 상황에 대한 울분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덕분에 독자는 이 글을 유명한 작가의 글로 받아들이기보다 바로 옆에서 속상한 마음을 털어놓는 지인의 말처럼 거리감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누군가는 그저 옆에 있어 등을 토닥여주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고, 지금 이 순간 치매 부모를 돌보고 있는 이에게는 내가 왜 힘든지를 비로소 깨닫게 해준다. 그리고 아직 그런 상황을 겪지 않은 자녀에겐 언젠가 맞닥뜨릴 시간을 준비하게 만드는 지혜로 다가온다. 이 작품은 상황을 바꾸기 위한 특별한 행동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마음가짐 하나만으로도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음을 조용히 일러주는 심리적 지침이 되기에 누구에게나 조건 없이 닿을 수 있다.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과거의 부모님을 지우고 현재의 부모님을 받아들이라는 조언이었다. 많은 자녀들이 이 괴리로 인해 연로한 부모와 충돌을 겪는다. 나 역시 이 부분에 대해 부모님과 자주 대화해왔기에 더 깊이 공감했다. 어릴 적 히어로 같았던 부모의 모습이 나이 들어 한 조각씩 무너질 때 자녀는 설명하기 어려운 혼란을 겪게 된다.







자녀는 왜 평소에 잘하던 것을 못하는지 갑갑해 하고, 양친은 우리도 많이 늙었으니 이제는 어린 시절 너희를 키울 때 이해해 주듯 너희가 우리를 이해해야 한다는 말만 반복하게 된다. 그 이유는 바로 어린 시절 자신도 모르게 각인되어 있던 슈퍼 히어로인 엄마, 아빠의 이미지가 너무 굳건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말한다. 과거의 이상적인 부모의 이미지를 지우지 않고 현실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서로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우리는 자녀와는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스스로를 변화시키려 노력하지만 나이 든 부모에겐 과거의 이미지를 그대로 덮어씌운 채 별다른 노력을 들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간병하는 이와 받는 이 모두에게 매 순간 생지옥이 될 수 있다. 어차피 겪어야 할 일이라면 마음에서 먼저 포기해야 할 것을 내려놓는 편이 낫다고 그는 조언한다.






두 번째로 기억에 남는 부분은 과거를 깡그리 잊어버리는 병에 걸린 이들도 멀쩡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존재의 이유 즉, 가치를 인정받길 원한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것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사회적 의미의 가치는 아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환자 스스로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느낄수록 고통을 받으며 잊히는 것이 두려워 더 고통스러운 일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프다고 쓸모없는 존재로 낙인을 찍는 행위는 자신의 지옥문을 최대한 빠르고 넓게 여는 행위라고 한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1분 전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존재의 가치를 타인이 인정한다고 느끼게 만들 수 있을까? 어려워 보이지만 사실 가장 쉬운 일일지도 모른다. 효율을 따지지 않고 행위가 아닌 존재 자체에 감사를 전하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기에 무 쓸모가 아니라 존재하기에 가족의 결속을 이어주는 쓸모가 있다는 사실을 자녀 스스로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마지막으로 치매 환자를 둔 가정이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인 기억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미 우리는 이와 같은 상황을 영화로 많이 마주하였다. 치매 환자를 둔 부부 이야기인 노트북, 사고 이후 어떠한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와이프를 둔 서약, 매일이 새로운 연인을 둔 첫 키스만 50 번째 등등으로. 이렇게 영화로 마주할 때는 낭만으로 다가오지만 직접 겪게 되면 낭만적인 상황은 찾아볼 수 없다. 






언제나 시간이 과거-현재-미래로 흐르는 자녀와 현재-현재-현재로만 흐르는 부모님. 이 관계에서 승자는 절대적으로 자녀가 될 수 없다. 그러니 언제든 오늘부터 1일이라는 연애의 설렘을 적용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런 시간대가 생소할 수도 있는데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시간이 현재-현재-현재로 흐른다고 설교한다. 그래서 나의 시간대를 하나님께 들이대면 깨지는 것은 자신이라고. 이제 이것을 우리는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분께 허용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고령화 사회로 가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치매 환자를 대하는 태도나 시스템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개인주의가 팽배한 국가에서 사는 작가가 이런 말을 하니 더욱 심각하게 다가왔다. 인플루엔셜에서 출간한 기시미 이치로의 실제 치매 부모 간병기를 통하여 배운 것을 나누는 우리는 결국 부모를 떠나보낸다는 가장 일상적인 언어로 쓰여 마치 아무렇지 않게 던진 말 같지만 가슴 깊숙이 박히는 것처럼 묵직한 울림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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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은
고정욱 지음 / 샘터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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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어린 시절 옆집에 소아마비에 걸려 중증 장애인이 된 삼촌이 살았었다. 세상을 잘 모르던 아이들의 놀림거리가 되기도 하고, 어른들은 자신들보다 모자란다고 깔끔하게 무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가까이에 살던 우리 가족은 다 안다. 그 삼촌이 당시 우리가 알던 그 어떤 사람보다 머리가 비상하고 똑똑했다는 것을. 오늘의 책인 #샘터 에서 출간한 #에세이 #고정욱 작가의 #어릴적내가되고싶었던것은 을 읽으며 그 삼촌과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샘터에서 출간한 따뜻한 신간 고정욱의 『어릴 적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은』에서는 총 다섯 가지 카테고리로 작가가 평소에 겪은 일들과 생각을 바탕으로 쓰인 생활 에세이이다. 키워드에 따라 나, 사랑, 책, 용기, 소명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총 46개의 에피소드가 실려 있다. 제목만 보면 꽤 동화적인 느낌이 나지만 내용은 확실하게 어른을 위한 책이다. 모진 세상의 바람에 길을 잃은 어른, 자식을 키우는 데 옳다고 믿었던 것에 흔들림이 생긴 부모, 꿈은 있지만 용기가 없어 포기하는 성인들을 위한 내용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책의 처음은 세계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장애인을 언급하며 시작한다. 나는 장애인이 아닌 데라는 마음이 자리 잡기도 전에 작가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다가 보면 급변하는 세상에서 누구나 안고 살아가는 동일한 공포를 마주하게 된다. 바로 쓸모없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저자의 경우는 자신이 소아마비를 겪으며 가진 중증 장애에 대한 허들에 걸려 느낀 케이스이지만 이는 중력에 의해 지면에 발을 붙이고 사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느끼고 있는 공포감이다.


보통 이런 경우 꼭 쓸모가 있어야 존재의 이유가 될까?라는 질문으로 결론을 내며 듣기 좋은 말로 다독이며 끝나는 경우가 많지만 작가는 오히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타인이 정해 놓은 기준이 아닌 자신만의 기준을 맞춰야 한다고. 그 첫 번째 방법으로는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것, 내가 정말 바라는 것을 남의 것과 혼동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좋은 대학, 대기업이 아닌 나만의 것. 그러나 보통 성인이 되고 나면 스스로 이런 기준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잘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다.


어쩌겠는가? 사회가 센티미터 자를 들고 들이대는데 나 혼자 부피를 재는 저울을 들고 설치는 게 옳지 않아 보이는 것을. 이런 상황이 지속되다가 보면 스스로의 존재 가치에 의심을 품게 되고, 삶의 경로를 잃어버리게 된다. 내가 가야 할 곳은 제주도인데 사회는 내비게이션을 일괄적으로 서울이라고 규정해 놓았으니 말이다. 이때 작가는 작은 방법을 알려 준다. 가장 순수했던 마음으로 가졌던 어릴 적 내가 되고 싶었던 것에 중점을 맞추라고. 그러면 이런 질문을 던질지도 모른다.


그는 이미 현재 활동하는 작가 중에서 가장 많은 책을 펴냈고, 가장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았고, 연간 300회의 강연을 다니며 2025년 아스트리드 린드그렌(말괄량이 삐삐 작가) 추모상 후보에 올랐으니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사실, 그가 길지 않은 지면에 소개한 그의 일생은 결과만 가지고 재단하기에 미안할 정도로 난관이 많았다. 다만 그는 갖은 힘을 다해 그것을 넘었기에 현재에 도달할 수 있었다는 것을 책장이 넘어가면서 독자 스스로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처음에 목차를 보고 가장 인상 깊을 것 같은 파트가 책일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러나 마지막 장을 읽고 책을 덮고 나니 의외로 네 번째 파트인 용기가 가장 기억에 남았다. 아마 이 파트가 직업에 관련된 이야기였고, 또한 꿈은 가졌지만 선뜻 실행으로 옮기지 못하는 자신을 투영할 수 있기에 더 기억에 남은 듯하다. 처음에 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애초에 의대에 진학조차 하지 못한 저자는 국문학과를 나와 대학 강단에 섰으며 이후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소설가가 되었다.


점차 문학작품의 자리가 좁아지면서 어쩌다 한 번 써 본 동화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이제는 까칠한 재석이라는 책 제목을 온 국민이 알 정도로 유명한 동화 작가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여정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리얼리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작가가 트렌드에 맞춰 판타지로 넘어가야만 했던 시기에 심리적 벽을 허물면서 했던 고심을 활자로 보고 있었지만 바로 옆에서 자괴감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환영이 보일 정도로 생생하게 독자에게 다가온다.


우리는 인공지능이 앞으로 인간의 직업을 모두 대체하여 설자리가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항상 그림자처럼 달고 산다. 이런 점에 대하여 6.25가 끝나고 폐허가 된 도시에서 태어나 최첨단의 시대를 걸어온 작가는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인간은 경쟁력을 가지고 있으며 탄력성과 유연성은 두 발로 걷는 지능인에게 가장 절대적인 무기라고. 과거에 있던 연탄장수가 사라질 때 우리는 그들의 밥그릇을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살아남았고, 그의 자식들도 사회에 무사히 정착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면서.


그가 겪은 수많은 일 속에서 스스로 느낀 점을 독자에게 들려주는데 그 과정에서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하고, 막연함을 느끼게 하는 부분도 있다. 바로 장애인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인데 개인적으로 딱히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나누어 생각지 않고 살아서인지 몰랐던 부분을 상당히 많이 알 수 있었다. 제일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은 장애인 주차 공간에 차를 대는 사람이었다. 누구나 주차 공간이 없을 때 비어있는 이곳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은 사람은 없었겠지만 기본 에티켓은 지키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샘터에서 출간한 신간 에세이 고정욱 작가의 『어릴 적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은』은 장애인에 대한 이해를 돕는 내용도 있지만 핵심은 결핍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스스로의 심연을 투영하는 과정에서 내 안에 있는 나만의 무게추와 타인의 것이 아닌 진정한 나만의 기준을 찾아 사람마다 기준이 다른 행복을 찾는 이야기이다. 모든 공기가 정체됨을 느끼는 순간에 작가는작은 바람이 되어줄 그의 목소리를 지금 전한다. 이제 정체된 당신의 공기를 살짝 움직여볼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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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데란 미래의 문학 11
데이비드 R. 번치 지음, 조호근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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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모데란은 철과 플라스틱, 규율과 반복의 세계에서 인간성이란 무엇인지 묻는 작품이다. 약 40편의 단편이 느슨하게 연결된 연작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이야기 사이를 잇는 것은 감정과 기억의 흔적이다. 겉으로는 기계화된 미래 사회의 풍경을 담고 있지만 결국 우리가 사는 지금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인간이 스스로를 통제 가능한 기계로 바꾸려는 그 환상을 조용히 조롱하며 결국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남긴다. THE? or A?







#폴라북스 에서 출간한 #데이비드R번치의 #모데란은 인간 세계에 적응하지 못한 주인공이 스스로 모데란이라는 도시국가에 들어오며 시작된다. 그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데 실패했기에 감정을 제거한 채 강철로 이루어진 기계 인간들의 세계에 자신을 맞춰보려 한다. 처음에는 관찰자로 머물던 그는 점차 성체화 과정을 거쳐 인간성을 하나씩 잘라내고 시스템에 동화된다. 그 변화는 한순간이 아니라 점진적인 삭제의 연속이다. 시스템은 그에게 M을 부여하며, 그는 감정과 기억, 자율성을 하나씩 포기하고 모데란의 일부가 된다. 







모데란 속에는 M이 정확히 무엇의 약자인지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M을 받을수록 인간성을 잘라낸다는 점에서 M이 MEN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즉 M이 많다는 것은 곧 사람다움을 많이 포기했다는 뜻이고 결국 존재하는 대상의 정의가 사람에서 기능으로 옮겨간다는 의미다. 작가는 사람이라는 개념이 잘려나갈 때 어떤 파편이 남고 무엇이 마지막까지 저항하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알파벳 하나로 인간성 제거를 단계화하는 발상 자체가 이미 섬뜩했다.







이 작품의 핵심 질문은 테세우스 배의 역설과 연결된다. 이는 배의 모든 부품을 하나씩 교체한 후에도 여전히 같은 배인지 묻는 고대 철학의 문제다. 주인공은 감정, 신체, 기억까지 모두 교체된다. 이때 그는 여전히 동일한 그인가? 아니면 시스템만 남은 껍데기인가? 결국 작가는 테세우스 배의 역설의 정답을 독자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현대 사회의 시스템에 잡아먹힌 당신은 아직 the human 인가, 아니면 a something 인가? 이 배는 어디까지가 '그'이며, 어디부터가 시스템인가?







책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 중 하나가 성체다. 성체란 더 이상 성장하지 않고 완전히 기능화된 존재를 뜻한다. 주인공은 열 번의 M을 통해 그렇게 성체가 된다. 그는 완전한 소멸 직전 스스로 그 길을 멈추고 다시 내려온다. 죽음 혹은 융합이라는 선택지 앞에서 마음을 바꾼 것이다. 이 장면은 마치 작가가 마지막으로 던지는 질문처럼 느껴진다. 그래도 너는 아직 사람이니? 그가 남기로 한 그 순간 시스템은 완성되지 못하고 균열은 침묵 속에서 자라난다. 







가장 아이러니한 점은 이 시스템이 처음부터 인류를 없애려는 것이 아니었다는 데 있다. 작가는 단순히 기계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실제 사람을 깎아 기계로 만드는 길을 택했다. 왜 굳이 그렇게 어렵고 먼 길을 돌아서 가는 것일까? 이 지점에서 우리는 깨닫는다. 모데란은 외부의 억압이 아니라 인류 내부의 욕망에서 시작된 것을. 완벽함, 통제, 고통 없는 질서를 추구한 결과가 인간성 제거라는 모순된 결론으로 이어졌다는 것. 사람은 스스로를 없애기 위해 스스로를 설계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우리에게 모데란의 세계는 결코 낯설지 않다. 플라스틱으로 덮인 땅, 증식되는 요새, 플러기 플라기 버튼 같은 귀여운 이름의 통제 장치. 특히 이 버튼의 이름은 아이 장난감 같은 어감으로 사람들의 경계를 무디게 한다. 감정을 억제하는 장치에 유치한 명칭을 붙여 통제받는 기분을 없애는 방식은 현대 사회의 기술 문명과도 연결된다. 우리는 종종 편리함과 익숙함이라는 이름으로 자율성과 감정을 시스템에 위탁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는다. 체제는 이미 부드러운 언어로 포장된 명령을 내린다. 핵무기에 선샤인이라는 이름을 붙이듯.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은 살아 있다. 그러나 살아 있다는 것이 곧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는 말을 하지 않고 감정을 표현하지 않으며 시스템의 일부로서만 존재한다. 완전한 기계 인간이 되지는 않았지만 다시 온전한 사람이 되지도 못한다. 이 어정쩡한 간극이 모데란의 가장 잔인한 결말이다. 감정을 선택하지 않은 자에게 인류라는 말은 더 이상 붙지 않는다. 그는 살아 있는 껍데기로 남는다. 기능만 있고 의도도 없다. 독자는 그 침묵 속 떨림을 감지하게 된다. 인간은 과연 무엇인가?








그러나 그는 융합 직전 마음을 바꾼다. 죽으러 갔다가 돌아온다는 이 장면은 단순한 생존의 문제가 아니다. 그는 모데란과 완전히 합쳐지는 것을 거부하고 아주 조용히 한발 물러선다. 이유도 설명되지 않지만 그것이야말로 감정의 증거다. 시스템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계산되지 않은 감정의 개입이다. 완전한 기계가 되지 않겠다는 이 미세한 거절이야말로 인류라는 증거이며 동시에 이 소설 전체의 결론이자 출발점이 된다. 거절은 의지이며, 의지는 감정이다.







결국 모데란은 하나의 거대한 실험실이다. 인간이 만든 시스템이 인간을 다시 정의하고 감정과 기억은 제거해야 할 에러로 취급된다. 하지만 작가는 끝까지 그 에러가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세상에서도 감정을 기억하는 독자만이 이 소설을 끝까지 읽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아직 인간이라고. 이 문장은 선언이 아니라 생존자만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절규이다. 사라지지 않는 감정은 결국 살아 있음의 증거다. 그리고 불안을 야기하는 확고한 흔들림이다.​






책을 덮고 나면 인간성은 한 번에 사라지지 않는다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 천천히, 단계적으로, 기능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씩 잘려나간다. 두려움과 불안을 가진 고유의 인간으로 남을 것인가, 사회가 원하는 보편적인 시스템 속의 인간으로 살 것인가가 작가가 마지막으로 던지는 질문이다. 당신은 인간성을 유지하고 있는 The human 인가, 아니면 기능 하나만 남은 A something 인가? 기능 하나만 남은 A something의 목소리가 궁금하다면 읽어보시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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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물화 속 세계사 -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사물들
태지원 지음 / 아트북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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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흑사병은 자본주의를, 구텐베르크는 르네상스를, 후추는 잉카 제국의 멸망을, 신교도 탄압은 스위스의 명품 시계를, 청어 배를 가르는 칼은 주식회사와 중앙은행을, 악마의 음료 커피는 시민에게 선거권을 가져왔다. 전혀 이어질 것 같지 않은 두 지점 사이를 그림 한 장을 통해 질문하고 답을 얻는 책이 바로 아트 북스에서 출간한 태지원의 정물화 속 세계사이다. 단순히 눈요기를 위해 그려진 정물화 한 장은 우리에게 어떤 말을 걸고 있는지 자세히 살펴보자.



아트북스에서 출간한 태지원의 정물화 속 세계사는 한 점의 명화가 건네는 소리 없는 음성을 통하여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사물들을 알려준다. 제목처럼 작품은 모두 정물화이며 그 속의 대상은 단순히 정렬해 놓은 것들을 그린 것이 아닌 철저히 계산된 당시의 시대 상황을 드러내고 있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예술의 장르에서 역사라는 장르로의 변화를 독자는 겪을 수 있다. 총 열다섯 개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으며 시기는 13세기부터 20세기까지 차례대로 구성되어 있다.



각 챕터당 연표가 따로 적혀 있으며 말하고자 하는 작품의 주인공이 지나온 시기에 발생한 역사적 사건을 모두 연표에 작성되었다. 이는 단순히 어떠한 사건을 단편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닌 인류 역사의 전체의 맥락에서 3차원으로 그림을 감상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하나의 챕터는 그 시대의 흐름을 완벽하게 바꾼 주인공이 담긴 정물화 한 점으로 시작하여 이 배경을 이해할 수 있는 지도, 당시 시대의 복장, 기타 배경이 담긴 명화 여러 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이야기는 정물화의 설명에서 시작해 작가의 생애와 역사적 사건, 그리고 그 흐름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각 장의 끝에는 시대를 송두리째 바꾼 계기와 그로 인한 변화가 조명되며 독자의 흐름을 해치지 않고 섬세하게 이끈다. 특히 장면 전환이 물 흐르듯 매끄러워 집중력을 흐트러뜨릴 틈 없이 빠져들게 만드는 장점이 있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명인의 바보 같은 일화까지 곁들여져 있어 흥미까지 꼼꼼하게 챙기고 있다. 그러면 인상 깊었던 부분을 살펴보자.



17세기 네덜란드 델프트에서 활동한 하르먼 스테인비트의 정물화에는 해골이 등장한다. 동시대 화가들도 해골, 썩은 과일, 시든 꽃 등을 곁들인 그림을 자주 그렸다. 모두 인간의 죽음과 인생의 덧없음을 상징한다. 이런 그림들이 유행한 배경에는 흑사병이 있다. 중국에서 시작된 이 병은 크림반도를 거쳐 유럽 전역으로 퍼졌고, 몽골군이 시체를 성 안에 던졌다는 세균전 일화도 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원인을 알 수 없어, 나쁜 공기 때문이라고 믿거나 신의 벌로 여겨 스스로를 채찍질했고, 유대인을 희생양 삼아 집단 학살하는 일도 벌어졌다.



하지만 흑사병은 아이러니하게도 자본주의의 씨앗이 되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줄어든 인구 덕에 더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었고 신분제의 굴레에서 벗어나 도시로 옮겨 부르주아 계급이 되었다. 흑사병은 경제적 변화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메멘토 모리, 즉 죽음을 기억하라는 인식을 남겼다. 해골을 그린 바니타스 정물화는 그런 감정을 담은 것이고 오늘날까지 해골은 크롬하츠 같은 브랜드를 통해 허무와 허영의 상징으로 계속 소비되고 있다. 이런 식의 전개로 흑사병은 자본주의를 낳았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폴 세잔이 그린 검은 시계가 있는 정물은 에밀 졸라를 위해 그린 것으로 전해진다. 이 그림의 중심엔 시계가 있다. 그런데 어떻게 시계가 신교도 탄압과 연결될까? 그 시작은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이다. 당시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였고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신교도인 위그노가 등장한다. 장 칼뱅은 모든 직업은 신의 부여라고 말했고 그의 가르침을 따른 위그노는 근면하고 절약 정신이 강해 자본주의와도 조화를 이루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이들을 위협으로 여겨 탄압하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앙리 4세가 내린 낭트칙령을 루이 14세가 폐지하면서 찾아왔다. 신앙의 자유를 잃은 위그노들은 프랑스를 떠나 유럽 곳곳으로 흩어졌고 20~30만 명에 이르는 이들 중 상당수가 숙련된 장인이었다. 이 중 일부가 정착한 스위스 제네바에서 시계 제작 기술을 발전시켜 파텍필립, 롤렉스, 차펙 같은 명품 시계를 탄생시켰다. 프랑스는 이로 인해 경제적으로 타격을 입었고 스위스는 위그노의 정착 덕분에 정밀 기술 산업이 번창했다. 정물 속 시계는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역사와 신념의 산물인 셈이다.


후안 그리스의 신문과 커피분쇄기가 있는 풍경은 단순한 정물이 아니라 혁명의 씨앗이 된 커피의 상징이다. 커피의 기원은 7세기 에티오피아 목동 칼디의 일화로부터 시작된다. 염소들이 붉은 열매를 먹고 흥분하자 자신도 먹어본 그는 각성 효과를 경험하고, 이를 이슬람 사원의 수도승에게 알린다. 이후 커피는 수도승들 사이에 퍼지고 15~16세기에는 이슬람 전역으로 확산된다. 그들의 커피하우스 카베 카네스는 대화와 게임, 그리고 점차 정치 토론의 중심지로 발전한다.



이 커피하우스는 결국 권력자들에게 위협이 되어 금지되지만 커피는 유럽으로 건너간다. 초반에는 악마의 음료로 외면받았으나 교황의 “이 맛있는 음료를 이교도만 마시게 둘 수 없다"라는 발언 이후 유럽에서도 유행하게 된다. 프랑스의 카페는 계몽사상가들이 모여 정치 토론을 벌이는 장소가 되었고 감시와 금지에도 불구하고 혁명의 기운을 키웠다. 결국 프랑스 대혁명, 나아가 루공가의 치부에 등장하는 2월 혁명까지 이끈 셈이다. 커피는 단순한 음료가 아닌 시민의 선거권을 이끈 주역이었다.



유독 정물화가 네덜란드에서 발달한 이유는 후원의 구조 차이 때문이다. 로마에서는 교황과 귀족의 주문으로 미술이 제작되었지만, 네덜란드는 상인이 직접 그림을 구매하는 시장 중심 구조였다. 이로 인해 종교화보다 대중 취향에 맞춘 현실적인 정물화가 유행했고, 그 안에 시대상과 국민성이 자연스럽게 담겼다. 한 점의 그림을 통하여 유명 화가가 숨겨 놓은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사물들을 찾아 과거를 읽고 싶다면 아트북스에서 출간한 태지원의 정물화 속 세계사를 추천한다. 


#정물화속세계사 #태지원 #아트북스 #세계사의흐름을바꾼사물들 #교양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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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공가의 치부 을유세계문학전집 141
에밀 졸라 지음, 조성애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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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루공가의 치부는 제목만 보았을 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때 치부는 남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부분이 아니라 재물을 보아 부자가 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프랑스 제2제정기의 작은 도시 플라상을 배경으로 한 가문이 어떻게 사회의 각 계층 속으로 스며들고 정치와 권력, 이상과 타협, 욕망과 파멸의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에밀 졸라는 이 가족의 연대기를 무려 스무 권으로 엮어 루공-마카르 총서로 출간하였다. 루공가의 치부는 이 장대한 서막을 여는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다.






작품의 줄거리는 정신이 온전치 않은 아델라이드 푸크는 농부 루공과의 관계에서 피에르, 거지 마카르와의 관계에서 앙투안과 위르쉴을 낳으며 루공-마카르 가문이 시작된다. 온갖 약은 수를 써서 피에르는 어머니의 전 재산을 자신이 가져가고, 군대에 갔다가 이를 알게 된 앙투안은 이를 갈면서 복수를 꿈꾼다. 정체되어 있던 상황에 변화를 가져오는 사건인 1848년 2월 혁명이 발생한다.







이 과정에서 피에르는 법대를 나온 큰아들 으젠의 도움을 힘입어 정치적 성공을 통하여 부를 쌓기 위한 노력을 한다. 그러나 언제나 자식과 아내에게 빌붙어 살던 앙투안은 모두가 떠나고 홀로 남아 여전히 형에게 대한 복수에 눈이 멀어 정세를 보기보다는 형과 반대편에 서는 것에 중점을 둔다. 이 과정에서 루공과 마카르의 피를 절반씩 받은 실베르는 여자 친구인 미에트와 함께 혁명에 몸을 던진다. 이들이 품은 이상은 끝내 어디에 도달했는지 궁금하다면 직접 읽어 보시길!







이 작품은 인간의 유전학적 조건과 사회 구조의 관계를 문학적으로 실험한 작품이다. 정신 질환을 가진 아델라이드 푸크를 기원으로 삼아 그 자손들이 어떻게 각기 다른 환경 속에서 분화되고 파멸하거나 권력을 장악하는지를 장대한 서사를 통해 정밀하게 추적한다. 이 실험의 진행자는 작가이지만 그의 분신인 파스칼을 창조하여 독자에게 다가온다. 정치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스토리보다는 과학 실험을 한 계통도에 가까워 여느 소설과 달리 보고서로 읽히는 특징이 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등장인물도 줄거리도 아니었다. 책장을 넘기다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언제나 단어, 색상, 배경 묘사였다. 이것들은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작가가 독자에게 미리 던지는 결말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다시 첫 장을 펼치게 만드는 마력을 뿜어낸다.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에밀 졸라의 독특한 필력이었다. 그는 사건보다 장소, 대사보다 명사, 감정보다 지형으로 독자에게 단서를 던진다. 따라서 이 책을 읽을 때 이 부분을 얼마나 찾느냐에 따라 작품의 밀도가 달라지는 특징이 있다.






초반부에 등장하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너울거리는 망토는 애정의 절정처럼 보이지만 구조적으로는 매장의 은유로 작동한다. 노동으로 굳어진 노동자의 손이 단단하게 달려 있다고 하는 부분은 신분의 고착화를 드러내고 있다. 그 외에 오래된 주검들의 평화 속이라는 것은 그동안 이곳에 대량 학살의 혁명이 없었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여지며 그 연도를 거슬러 올라가다가 보면 나폴레옹 1세가 정권을 잡기 전 프랑스 대혁명과 지금의 나폴레옹 3세가 정권을 잡는 2월 혁명의 대치도 보인다.






이런 방식은 색과 공간의 배열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노란색은 피에르의 거실과 자스 메프랑의 들판에서 반복되며, 부패한 질서와 병든 번영의 상징이 된다. 붉은색은 실베르가 속한 저항의 색으로 이상주의자들이 품은 생명력과 동시에 그들의 비극적 운명을 함축한다. 그리고 흰색 손수건은 포플러 나무가 잘려 나갈 때 공화파가 보여주는 애도의 신호로 등장하며 절망과 체념, 상징의 종말을 암시한다. 졸라는 색채를 통해 인물의 계급과 정치적 입장을 구분하고, 단어 하나하나에 사회 구조의 기호를 심는다.







그 상징은 특히 나무의 은유에서 가장 강하게 드러난다. 느릅나무는 과거의 왕당파, 플라타너스는 질서당(보나파르트주의), 포플러는 공화파와 급진 공화주의를 상징한다. 느릅나무는 베이고, 플라타너스는 심어지고, 포플러는 밤에 몰래 독살된다. 그중 포플러는 노동자들의 모임 장소이자 이상주의의 상징이었고 이 나무를 펠리시테가 제거하는 장면은 단순한 식물 제거가 아니라 정면충돌 없이 이념을 말살하는 정치적 행위였다. 작가는 자연의 묘사 하나로 다양한 정치 성향과 그들의 미래를 암시하는 연출 방식을 보여준다.






이 작품을 유독 인상 깊게 만든 또 하나의 독해 방식은 DNA였다. 등장인물들이 단순히 가족관계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감정, 도덕성, 행위 방식까지 유전된다. 실베르는 정신적 우성인자를 모두 받은 것처럼 이상과 질서를 중시하고, 미에트는 운명적 열성인자가 응축된 존재로 그들이 받은 DNA답게 산다. 루공-마카르 총서 서막의 시작인 이 책에서 아델라이드의 DNA가 농부 루공과 섞인 결과와 거지 마카르와 섞인 결과를 구분하여 그 후손의 성향을 따져보는 것도 하나의 즐거운 포인트로 작동한다.






루공가를 지배하는 구조는 철저한 모계 사회다. 아델라이드는 모든 것을 낳았지만 감정에 따라 움직이는 그녀는 창조자이면서 통제 밖의 존재로 그려진다. 그녀는 신화적 모성 가이아 혹은 성모 마리아의 위치에 가깝다. 졸라는 이야기 곳곳에 동물 가죽, 키클롭스의 도시, 바벨탑 같은 신화적 기호를 심는다. 이들은 모두 혁명과 욕망과 몰락의 전조로 기능하며 과학적 사실 위에 은밀하게 신화를 얹어놓는다. 이 작품은 신화를 모티브로 인간의 핏속에 흐르는 운명을 추적한 실험이다.







루공가의 치부는 단순한 시작이 아니라 거대한 연대기의 구조적 기반이 된다. 작가는 혈통, 계급, 정치, 욕망을 유전이라는 키워드로 묶어내며 등장인물 하나하나를 생물학적·사회학적 조건 위에 올려 실험한다. 또한 은유와 색채, 공간과 신화를 조합해 독자에게는 또 다른 층위의 의미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따로 떨어진 이야기가 아닌 스무 권의 총서를 하나로 엮어주는 첫 권은 전체 서사의 토대를 닦는 것이므로 목로주점, 제르미날 등을 읽은 독자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관문이다. 



#루공가의치부 #에밀졸라 #을유문화사 #고전문학 #을유세계문학전집 #루공마카르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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