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망의 시대 - 새로운 중국의 부, 진실, 믿음
에번 오스노스 지음, 고기탁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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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이 떠오르고 있다는 이야기가 수면 위로 떠오른 지도 꽤나 오래됐다. 출근길 지하철에서는 브루스 리의 복색을 한 전현무 씨를 마주치고, IT 기기에 문외한인 내 친구 김기자는 요즘 들어 연신 샤오미의 쾌적함을 찬양하고 있다. 그는 생활비가 모자라 짜왕으로 간신히 연명하고 있지만, 'Mi'가 붙은 제품들의 구매를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카드를 긁을 준비가 되어 있다. 이렇게 중국이라는 존재는 수면 위를 넘어서 우리 삶의 한가운데로 끼어들고 있다. 앞서 나온 예시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더 많은 이야기를 꺼내보라 해도 거뜬히 몇줄 더 써 내려갈 수 있을 것 같다. 아마 그 정도는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하지만 주제를 조금만 틀어보자. 현재의 중국 그 국가의 실체에 대해 한 번 이야기해보라 한다면 어떻게 될까? 음... 엄청나게 스케일이 크다는 것 빼고는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렇다. 나는 중국에 대해 실질적으로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콜럼버스에게는 찾아 나설 미지의 대륙 인도가 있었다면, 내게는 중국이 미지의 대륙이었던 셈이다. 멀리 갈 필요도 없었다. 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중국을 비하했고, 또 때로는 중국을 대단하다 치켜세웠다. 하다못해 소개팅을 주선하더라도 양쪽 남녀의 페이스북 타임라인 정도는 훑어보는 나이거늘, 중국이라는 그 큰 대륙의 타임라인은 틈틈이 살펴보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SNS에 올라와 있는 프로필 사진 한 장만으로도 우리는 호감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있기는 있다. 처음 봐도 나도 모르게 눌러보는 사람이 있고, 매일 봐도 그냥 흘려보내는 사람도 있다. 책의 표지도 이러한 프로필 사진과 비슷한 면이 있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수많은 신간들 사이에서 내가 <야망의 시대>에게 끌린 것도 같은 현상이라 이야기할 수 있다. 잘 빠진 표지 디자인이라고 느꼈다. 중국을 논하는 책들은 시중에 많았지만, 오직 이 책만이 보다 더 세련되고, 재미있게 풀어줄 것만 같았다. 원래는 <이중톈, 국가를 말하다>를 읽으려고 눈여겨 보고 있었다만 막판에 밀렸다. 흰 바탕의 심플한 표지는 이제 조금 식상하다.

 

프로필만 보고 혹해서 타임라인에 들어왔는데 올라와 있는 글까지 마음에 든다면 그때부터는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잊게 된다. 관련해서 '취향 저격'이라는 재미있는 표현도 있다. 딱 꽂힌 것이다. <야망의 시대>는 나의 취향을 조준하는데 성공했다. 중국 이야기를 이토록 재미있게 읽게 될 줄은 몰랐다. 게다가 디테일하다. 자신의 주장에 흥분하여 어느 방면으로 치우치는 글도 없었다. 작가는 중국인이 아닌 외부인인데도 말이다. 어쩌면 오히려 그 점이 더 많은 진실을 드러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미국인 기자 에반 오스노스. 그가 베이징에 8년간 머무르면서 직접 만나고 관찰했던 중국인들의 이야기가 이 책에는 자연스레 녹아있었다.

 

책의 첫 챕터, 다른 말로 <야망의 시대> 그 타임라인의 시작은 1979년, 중국 공산당이 경제 성장 의지를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순간부터 펼쳐진다. 아래는 당시 덩샤오핑의 멘션이다.

 

"우선은 일부 사람들 먼저 부자가 되게 하고, 그런 다음에 점차 모든 인민들이 함께 부자가 되어야 한다." -25p

 

경주를 알리는 총소리가 퍼져나가자, 야망을 가진 개척자들은 하나 둘 대륙의 타임라인 위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바다를 맨몸으로 건너온 남자 린이푸, 보이지 않는 눈을 가지고도 진실을 보고자 했었던 천광청, 예술로 자유를 표현하고자 했던 아이웨이웨이, 젊은 중국인의 아이콘이었던 한한이나 탕제를 비롯하여 수많은 중국인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중국을 살아가고 있었다. 이들은 정치적 성향도, 가지고 있는 강점도 모두 다르다.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할 만큼 다채롭다. 이들에게 찾아볼 수 있는 공통점이란 그저 중국인이라는 사실과, 스스로가 믿는 이상이 있다는 것뿐이다. 에반 오스노스는 이를 야망이라 불렀다. 이들의 야망이 한 데 어우러지면서, 중국은 빠르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한편 타임라인이 분주해짐에 따라 덩달아 바빠지는 분들도 있었다, 바로 페이지의 관리자 역할을 하는 중국의 공산당 세력이다. 그들은 24시간 검열하고 통제하고 또 검열해야 했다. 성장에 따라 시대가 빠르게 변했기에, 그들도 넋 놓고 바라볼 수만은 없었다. <야망의 시대>가 재미있는 이유는 단지 개척자들의 성장담 때문만은 아니었다. 뻗어나가는 이야기들이 한데 묶일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악역으로서의 공산당(혹은 국가 권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비약적으로 말하자면 <야망의 시대>는 새롭게 태어나는 중국 국민들과, 그 안에서 꾸준히 질서를 유지하려는 국가 권력의 대립이라는 키워드 하나만으로도 읽을 수도 있다. 표현의 자유, 진실의 은폐를 다루는 챕터들은 무척이나 끔찍했다. 정치 체제는 다르지만 비슷한 문제들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한국의 타임라인도 오버랩됐다. "한국에서 진정한 민주주의란 가능할까?" 하고 화두를 던지던 다니엘 튜더의 <익숙한 절망, 불편한 희망>도 문득 떠올랐다. 이제 보니 두 책은 자매품이다. 오스노스쪽이 튜더보다는 훨씬 냉정한 관찰자라는 점에서 느껴지는 성격의 차이는 있지만 말이다.

 

타임라인을 따라 쉼 없이 정주행을 완료했더니 어느새 현재의 중국이 뉘엿뉘엿 보이기 시작한다. 때로는 잘 정리된 프로필이나 이력서보다 타임라인 위 몇 줄이 그 사람을 더 기억나게 한다.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그 자체로 여운이 강하기 때문이다. DVD도 보통 편집본보다는 무삭제, 무수정본을 선호하지 않던가? <야망의 시대>, 그 타임라인 위에서 바라본 중국의 모습은 당분간 강한 기억으로 남을듯하다. 덕분에 나도 이제 중국에 대해서 할 말이 조금 늘어났다. 나는 이 글을 마치면서 아이웨이웨이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찾아봤다. 그리고 푸근한 모습으로 누워있는 그의 사진에 좋아요 하나를 눌렀다. 언젠가 내 사진첩에도 그를 비롯한 개척자들의 좋아요가 도착할지도 모를 일이다. <야망의 시대> 그 타임라인은 오늘도 열심히 업데이트 중일 테니 말이다. 물론 댓글은 로그인한 사람만... 아니 현재를 열심히 산 사람들만 달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오늘의 해시태그는 #야망 이다.

 

"어떤 면에서 내가 천광청에게 끌린 이유는 그동안 전향한 군인 린이푸나 그 밖의 많은 사람들에게 끌렸던 이유와 비슷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운명이 정해 준 어떤 길을 자신의 판단에 근거해 거부한 사람들이었다. 가까이서 본 그들은 그들의 지지자나 적들이 상상하는 우상이나 악당이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중국사의 구습을 거부한 자들이었을 뿐이다." - 48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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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스트 Axt 2015.7.8 - 창간호 악스트 Axt
악스트 편집부 엮음 / 은행나무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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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프가 한국 사람이었다면 이런 얼굴이 아니었을까? 프레임에 가려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어깨선을 타고 따라 내려가면 왠지 그의 오른손 위에 손도끼나 장도리 한 자루쯤 쥐어져 있을 것만 같다. 인적 드문 골목길에서 마주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그다지 많은 죄를 짓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마주치면 안 될 것 같다. 일단 휘두르고 볼 기세다.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잡지의 커버를 장식하고 있는 작가 천명관 씨의 표정은 그야말로 하드보일드 했다. 심지어 이 책은 창간호다. 그러니까 이 얼굴이 곧 <Axt>가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첫 표정이라는 것이다.

 

소설을 이야기하는 잡지다. 근래 책을 이야기하는 잡지가 참 많이 나타났지만, 이 정도로 소설과 작가들에게 치중한 잡지가 있었나 싶다. 작가들이 작가들의 책을 리뷰한다. 그러다 중간중간 작가라는 인간 자체를 리뷰하기도 하고 인터뷰하기도 한다. 뒤따르는 소설은 부록이다. 값이 싸다 해서 결코 얇은 책자도 아니다. 무려 260페이지를 광고도 없이 달려간다. 역시 보통 잡지가 아니다. 나오기까지 날을 많이 갈았으리라 싶다. 앞에 실린 리뷰를 읽는 것만으로도 많은 시간이 들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글마다 호불호가 갈렸다. 그만큼 색깔이 뚜렷한 리뷰들이 담겨있었다. (근래 익숙해진 후장사실주의자라는 작자들도 보였다.) 평소 독자가 작가에게 닿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리뷰 작성이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Axt>를 읽어보니 그 생각이 더욱 확실해졌다. 국내 한정이긴 하지만 이 잡지에 소개된 작가들은 자신들을 리뷰한 작가들을 불러내 소주라도 한 잔 사게 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심지어 김태용의 <벌거숭이들>을 리뷰한 정지돈의 글은 제목부터가 <리뷰 급구>다. 책이 나온 지 육 개월인데 리뷰가 하나뿐이라며 디스 아닌 디스를 하기도 한다. 읽다가 나도 모르게 피식했던 부분이다.

 

이를 보이면서 웃고 있던 사이, 드디어 커버의 그 작가 천명관 씨가 나타났다. 인터뷰의 제목은 무려 '육체 소설가의 9라운드'. 나도 자연스레 각을 고쳐잡고 인터뷰를 정독했다. 그리고 알게 됐다. 정말 제목에 걸맞은 거침없는 인터뷰였다. 내가 걱정할 일은 아니지만 그 수위가 상당하다. <Axt>와 천명관 씨가 작정하고 도끼를 휘둘렀다. 대상은 한국 문학계를 주름잡는 '문단 권력'이라는 이름의 선생님들과 그 시스템. 앞서 전반부에 실린 리뷰들이 해당 작가들에게 날아가 닿았다고 한다면, 이 인터뷰는 해당 작자들에게 날아가 찍혔으리라. 잡지 표지 뒷면에 카프카의 문장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를 적어 넣을 수 있었던 자신감 혹은 전투의지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멋있다. 아직까지 천명관 씨의 소설을 꺼내 읽지 않았던 게 아쉬울 따름이다. 다행히 책장 두번째 칸에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가 꽂혀 있다. 이 책은 조만간 스파링하는 기분으로 읽게 될듯하다.

 

<Axt>는 첫 휘두름부터 상당히 묵직했다. 아직 뒤에 딸린 소설들을 다 읽지는 못했지만, 그 앞부분까지만 봐도 이미 증명은 끝이 났다. 개인적으로는 올해 벌써 정기구독하고 있는 잡지와 신문이 있어서 정기구독은 하지 않을 예정이다. (공식적인 슬롯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접속하는 각 서점의 홈페이지에서, <Axt>의 다음 호 소식을 듣는다면 내가 이 책을 지르지 않을 수 있을까? 난 나를 믿지 못하겠다. 다만 <Axt>의 격을 믿을 뿐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레 이런 문장이 나오게 된다. 믿는 <Axt>에 발등 찍힌다?? 그렇다. 찍혀도 좋고, 아파도 좋다. 나는 벌써부터 <Axt>의 다음 호가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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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야상곡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안토니오 타부키 지음, 박상진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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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로라면 정말로 살아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델리에서 먹은 지미 아저씨네 쵸우멘이 문제였는지, 자이살메르에서 먹은 노점상의 쵸우멘이 문제였는지 아무튼 간 쵸우멘이 문제였던 것은 확실했다. 바라나시로 넘어오는 기차에서부터 설사가 시작됐고, 잦아들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온몸에 힘이 풀렸다. '히즈라'라 불리는 여장 남자들이 내 머리를 쓰다듬고 연신 귀엽다 조롱했지만 나는 대꾸조차 할 수 없었고, 야심 차게 사서 입고 다녔던 내 알라딘 바지 밑단에는 점차 정체를 알 수 없는 황갈색 도트들만 늘어가고 있었다. 인도에 온 지 거의 3주차. 여행 막바지에 이르러 첫 물갈이가 시작된 것이다.

바라나시에 도착 후 머물렀던 숙소들의 선택 기준은 오로지 변기였다. 머무를 숙소는 가트 근처로 결정됐다. 조금 걸어 나가면 그 유명한 갠지스강이 보였다. 삶과 죽음이 맞닿는 곳이었다. 인도 사람들은 시신을 화장하여 갠지스 강물에 흘려보내는 일을 매우 신성히 여긴다고 했다. 망자들은 매일 이곳으로 실려왔고, 화장터의 불길은 잦아들지 않았다. 잦아들지 않기는 내 뱃속의 불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음식은 입으로 들어가는 족족 물이 되어 나를 빠져나갔다. 그것들도 아마 갠지스 강으로 흘러들어갔을 것이다. 나는 숙소에서 멀리 나갈 수 없었다. 퀴퀴한 방 안에서 혼자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엽서 따위를 적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진 못 했다. 인도까지 날아와서 설사나 하고 있는 이야기를 굳이 써날린다는 것은 제아무리 친한 친구라 하더라도 원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광활한 나라에서 근 일주일을 화장실에 갇혀 있었다. 변기를 부여잡고 인생 최고의 무력감을 맛봤다.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었고, 건강했던 내가 간절히 그리웠다. 강물처럼 생각들이 흘러갔다. 나를 찾아 나선 최초이자 최후의 여행은 그렇게 마무리되고 있었다.

 

"육체의 감각이 어느 정도 여과되고 나면, 경험은 모호해져서 한껏 더 나은 이미지로 남게 마련이다." - 83p

3년의 시간이 흘러 오늘이 됐다. 기억의 편집술이란 참 대단하다. 그렇게 극한으로 몰렸던 시간들도 지나고 나면 이렇게 추억이 되어 버리니 말이다. 요즘처럼 무더운 밤에는 특히 더 그렇다. 인도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어젯밤 침대 위에서 <인도 야상곡>을 집어 들었던 이유도 그런 꼬리 물기의 연장이었을 것이다. 얼마 전 읽은 <꿈의 꿈>의 여운 때문에라도 당분간은 집어 들고 싶지 않았던 타부키였건만...  단 한 번의 호흡으로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어버렸다. <꿈의 꿈>은 여러 번 끊어 읽을 수 있었지만, <인도 야상곡>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밤이 지나갔다. 장담컨대 나 아닌 누구라도 그러했을 것이다.

나는 인도의 북쪽을 여행했고, <인도 야상곡>은 인도의 남쪽을 배경으로 삼았다. 책에서 마주한 인도는 실제로 마주했던 인도의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인도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두가 속고 또 속인다.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다 해도 이상할 게 없다. 땅은 넓고 사람은 많다. 극심한 빈부의 차가 존재하고, 수많은 종교들은 저마다의 믿음을 과시한다. 모든 것이 혼재한다. 비우러 간다면 채우고 올 것이오, 채우러 간다면 비우게 될 것이다. 인도는 그러한 혼란 속에서 오직 한 사람 나를 마주하게 되는 곳이다.

<인도 야상곡>이 그려내는 열두 번의 밤 또한 존재의 단면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밤 속에서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었다. 모순된 모든 것이 온전하게 존재되는 시간들. 주인공 호스는 이러한 열두 번의 밤 속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사비에르와의 거리를 조금씩 좁혀 나가고 있었다. 책을 읽다 보니 <꿈의 꿈>에서 그랬던 것처럼, 어느 순간 문장과 문장의 틈새로 타부키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아가 마지막 밤에 이르러서는 타부키의 꼬리를 물고 내가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가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은 순간이 찾아왔다. 이는 <꿈의 꿈>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순간이다. 바로 이 시점부터 소설은 이야기의 정체성을 잃어버린다. 아니 오히려 정체성을 잃어버림으로 인해 이 소설만의 정체성을 얻게 되었다고 봐야겠다. 나는 어제 이곳 인도의 밤 속으로 빨려 들어왔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인도 야상곡>의 밤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3년 전 여행에서 느꼈던 그 묘한 느낌을 책을 통해 다시 느끼게 될 줄이야. 정말이지 꿈의 꿈에서도 몰랐다. 대단한 소설이다. 내가 꿈꿔왔던 인도 이야기가 이렇게 떡하니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생각했어요. 정말로요. 당신의 그 사진하고 약간은 닮았어요. 확대는 맥락을 변조하지요. 사물은 멀리서 봐야 해요. 선택된 부분은 신중히 보시기 바랍니다." - 11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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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봄 - 개정판 레이첼 카슨 전집 5
레이첼 카슨 지음, 김은령 옮김, 홍욱희 감수 / 에코리브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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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선택은 물리 1, 물리 2, 생물 1, 생물 2였다. 보통의 고3 이과생들이 평이한 기본 과목(물리 1, 화학 1, 생물 1, 지구과학 1) 3종에 심화과목(앞서 말한 과목들의 2) 1종으로 밸런스를 맞추는 반면. 나는 조금 고되더라도 집중을 택한 셈이다. 게다가 '물리 + 생물'의 조합은 또 어떠한가. '물리 + 지구과학', 혹은 '생물 + 화학'으로 양분되는 이과 수능의 테크트리 속에서 나의 과목 선택은 유독 튈 수밖에 없었다. 의문부호를 들이밀던 친구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혹자는 튀고 싶어서 객기 부린 것이 아니냐고 했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만, 가장 큰 이유는 정말 단순했다. 나는 그저 화학이 싫었다. 공산당보다 더. (지구과학은 당시 반 편성상 선택권 밖의 문제였다.) 스티로폼에 이쑤시개를 꼽아 만들던 유기화합물 구조가 등장하던 순간부터 화학에 대한 나의 기억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고3의 나날들은 쏜살같이 흘렀고 수능이 다가왔다. 결과적으로 나의 선택이 바른 선택이 아니었다는 것은 수능 성적표가 말해줬다.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하는 선택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이때 처음으로 느꼈다. 시스템의 섭리를 거스르는 자는 어떤 최후를 맞는 것인지에 대한 첫 고민은 그렇게 시작됐다. 물론 그 와중에도 화학이 싫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다행히도 대학은 갔다. 운 좋게 2학기 수시 입학에 성공했다. 조건부 합격이었다. 내 기억에 의하면 수능 과목 중 한 과목 이상을 2등급 이상 받아야 들어가는 것이었나 그랬다. 그 해 수능 참패 속에서 나를 살린 것은 수리도 물리 2도 생물 2도 아닌 언어영역 1등급이었다. ​문과 친구들에게는 조금 미안했다.

<침묵의 봄>의 저자 레이첼 카슨이 화학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화학적 방제 작업에 반대 목소리를 키웠다는 사실만으로도 뭔가 동지와 같은 착각이 들었다. 환경분야의 고전으로 유명한 이 책을 읽기에 앞서 느낀 것이 고작 그런 단순한 마음이라니 스스로도 어이가 없지만 일단 그랬다. 1962년에 출간된 <침묵의 봄>은 당시로는 생소했던 살충제의 유해성과, 그로 인한 생태계의 파괴에 대해 고발하고 있다. 그 이름도 유명한 DDT(어찌나 독했으면 프로 레슬링 기술의 이름으로도 차용됐다.) 부터 각종 유기화합물로 만들어진 살충제가 날개돋친 듯 팔려나가던 시점이기에, <침묵의 봄>의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화학업계와 농경 제조업체들에게는 눈엣가시와도 같았다. 진실을 숨기려는 쪽과 고발하려는 쪽, 돈이 되는 쪽과 돈이 되지 않는 쪽의 싸움은 언제나 후자에게 불리하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레이첼 카슨과 <침묵의 봄>이 지금까지 살아남아 많은 이들의 칭송을 받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대단한 일이다.

<침묵의 봄>을 통해 살펴본 그녀의 서술방식은 매우 우직한 편이다. 그녀는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유사한 사례들을 책의 후반부까지 계속 반복해서 늘어놓는다. '검증되지 않은 화합물의 무분별한 살포 → 생태계의 파괴 → 인간에게 돌아오는 피해에 대한 경고'. 이러한 패턴으로 말이다. 달라지는 것은 살충제의 피해를 입는 곳이 어디냐는 것뿐이다. 지금에 와서야 당연하고 단순해 보이지만, 당시로는 무척이나 충격적인 사실들이었을테다. 마치 <PD 수첩>이나 <소비자 고발>같은 프로그램처럼, 당시 대중의 마음을 들쑤셔 놓기에는 충분했다.

책의 말미에 이르러 그녀는 최종 입장을 정리한다. 하나의 큰 시스템인 지구에서 인간은 오만함을 버려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오랜 시간 시행착오를 겪어오며 구축된 생태계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살충제(유기화합물)들은 진지한 검증 없이 생태계를 순식간에 망쳐 놓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좋다. 여기까지는 구구절절 맞는 말 같고 숙연해지는 부분이기는 한데, 뒤이어 제시하는 대안부터는 조금씩 갸우뚱하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화학적 방제보다는 생물학적 방제를 연구해야 한다고 말이다. 화학적으로 곤충을 제거하면 결국 인간에 해가 될 수 있으니, 생물학적으로(방사능으로 만들어낸 불임 개체의 투입이라든지, 천적 개체의 수입이라든지 하는 방식들) 곤충들을 박멸하자는 입장이다. 전자보다는 후자 쪽이 인간에 미치는 피해도 없을뿐더러, 비용이나 효과도 확실하다고 말이다.

아니, 잠깐만... 이것이 정녕 환경 운동계의 대모가 하는 말이 맞단 말인가? 이제까지 계속 오만하지 말자더니, 레이첼 카슨이 말하는 오만은 그저 인간에게 해가 될지 말지를 속단하지 말라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내 생각에 화학적이든, 생물학적이든 결국은 살생이며 인위적 조작이라는 사실에는 다름이 없다. 그 의도 자체가 섬찟한 것이다. 물론 나도 오늘날 수많은 환경을 짓밟고 있기에 편하게 살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게다가 내가 뭐 대단한 환경운동가인 것도 아니다. 그래도 양심이 있다면 말은 똑바로 해야 한다. 이 책에서 겹겹으로 포장하고 있는 것과 다르게, 레이첼 카슨의 주장도 생태계의 입장에서는 최악이 아닐 뿐, 차악이다. 어디까지나 인간 중심적인 사고에서 바라보는 환경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녀와 인류가 이끌어낸 것은 자기합리화라는 이름의 자연보호였다. 마지막 장을 덮고서 다시 본 <침묵의 봄>이라는 제목에서 나는 묵인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시스템의 섭리를 거스르는 인류에게도 언젠가는 최후가 다가올 것이다. 과연 그날이 온다해서 우리는 알기나 할까? 우리가 자연에 무슨 짓을 하고 있던 건지 말이다. 오히려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친환경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데!"라고, 그 증거자료로 <침묵의 봄>을 들이밀면서 말이다.

음... 그건 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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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 법칙
편혜영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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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 점과 또 다른 어느 한 점의 사이를 올곧게 이으면 선이 된다. 달리 말하면 모든 선에는 시작점과 끝점이 존재한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직선이든 곡선이든 모두 마찬가지이다. 그렇기에 뻗어 나가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선은 필연적으로 그 끝을 생각해야 한다. 멈추지 않는 선은 한없이 뻗어나갈 뿐이다. 만약 그 방향이 완전무결하다면 그대로 뻗어나간다 해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선은 진리의 선이 될 것이고, 영원 무결함의 선이 될 것이다. 어쩌면 신의 검지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이 바로 그와 같은 방향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아직 그와 같은 방향으로 뻗어 나가는 선을, 그리고 인간을 본 적이 없다. ​

<선의 법칙>, 그 이야기의 시작에는 두 개의 점이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의 자살을 목도한 윤세오의 점. 그리고 역시 어느 날 갑자기 동생의 사체가 발견됐다는 전화를 받게 된 신하정의 점. 무척이나 무거운 시작이었다. 인간이 그어나갈 수 있는 선의 가장 극단에 있는 점이 바로 죽음 아닐까? 세상을 떠난 본인과 남아있는 가족 모두에게 말이다. 두 주인공은 제각기 죽은 가족의 끝점에서부터, 그 죽음의 시작점을 역추적해 나간다. 윤세오는 한 인간에 대한 복수심으로, 신기정은 외면하고 싶던 동생에 대한 무던함으로 말이다. 그리고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기 위해 시작한 그 과정 속에서 그녀들은 또 다른 선들을 마주하게 된다. ​

인간에 의해 그어졌었던 혹은 그어지고 있는 그 수많은 선들. 어떤 선은 벌써 희미해져가고 있고, 또 어떤 선은 이제 막 그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선과 선이 우연히 마주치는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은 단지 하나의 교점에 불과할 뿐. 애써 의미를 부여해 보아도 그 의미란 오직 자신의 공간 위에서만 유효한 것이었다. 타자의 시선에서 바라본 교점의 의미는 참 부질없다. 김명국의 시선이 그랬던 것처럼, 윤세오와 신기정이 마주했던 순간처럼 말이다. 또 다른 인물인 이수호의 선도, 부이의 선도 모두 그렇게 비춰진다.  ​

편혜영 작가의 심술이었을까? 아니면 정말로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였을까? 다단계, 대부업, 고시원 등 등장인물들이 그려가는 선은 대체로 사회의 어두운 방향을 향해 계속 뻗어가고 있었다. 굳이 내려다 보기는 싫은 그런 곳으로 말이다. 텁텁했다. 책을 덮고 생각해보니 내 지인들의 모습도 소설 속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따금 연락해오는 지인들의 불편한 소식. 내가 알던 그들이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싶은 순간이 있다. 그렇게 불행, 분노, 가난과 같은 단어들이 내 어깨를 타고 올라오려 할 때면 나는 그저 무심함, 담담함으로만 흘려보낼 뿐이었다. 마치 소설의 주인공 신기정처럼, 아니 오히려 그녀는 조금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궁금하긴 했지만 정작 그들의 선이 나의 선과 닿을라치면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거부했으니 말이다. 나는 사회에서 살아남는 법을 그렇게 터득했나 보다. ​

불행은 불쑥 삶 속으로 끼어들지만, 그 끝점을 찍기까지는 많은 진통을 필요로 하는 법이다. 이야기의 말미에 이르러 윤세오와 신기정은 긴 추적의 끝점을 찍는데 성공했다. 그 끝점이 복수의 성공일지, 혹은 완전한 망각일지는 구태여 여기서 이야기하지 않겠다. 다만 그녀들이 얻게 된 결론이 어떻든 그녀들은 끝점을 찍음으로 인해, 다시 새로운 시작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다. 그녀들은 또 다른 방향을 향해 선을 뻗어보려 힘쓰고 있던 것이었다. 마치 파도에 쓸려와 뒤집혀 있던 거북이처럼. 처절하게, 그리고 끈질기게 말이다. ​

우리는 인간이다. 삶의 비확정성 앞에서 힘없고 불완전한 존재다. 그렇기에 계속해서 삶의 방향을 수정해 나갈 수밖에 없다. <선의 법칙>을 통해 편혜영 작가가 말하려 했던 것도 이러한 것들이 아니었을까? 물론 내 추측이 정말 맞는 것인지 틀린 것인지는 당장에 알 수가 없다. 내가 <선의 법칙>의 증명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이 삶을 살아 보는 것뿐이다. 끝점을 찍고 다시 뻗어나가는 그 과정의 반복을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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