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시대 - 역사상 가장 혁신적인 지혜와 만나다
김용규 지음 / 살림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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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상 과거처럼 모든 지식을 머릿속에 꽉꽉 눌러담을 필요가 없다고 한다. 모든 정보는 네트워크 상에 존재한다. 우리는 네트워크 어딘가에 걸려있는 정보를 필요할 때마다 꺼내다 쓰기만 하면 된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그 모든 것을 가능케 만들었고, 스마트폰은 장소와 시간의 제약을 풀어주었다. 기존의 뇌와 더불어 손 위에서 동작하는 두 번째 뇌를 가지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바야흐로 '정보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고. 그리고 정보화 시대는 인류가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한 드높은 차원으로 세대를 인도해 나갈 것이라고 말이다. 마치 빅뱅과 같다. 매일같이 새로운 정보가 폭발하고 있다. 앞으로는 폭발이 만들어낸 파편들을 누가 먼저 줍느냐, 누가 먼저 재활용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리게 된다. 

파편을 줍는 행위는 유용한 정보를 찾는 능력, 즉 검색 능력을 말한다. 적당한 키워드가 제시된다면 파편을 줍는 행위는 누구나 할 수 있다. 어쩌면 이 작업은 '기존의 뇌' 없이 앞서 말한 '두 번째 뇌'만 가지고도 가능할 수도 있다. 물론 약간의 시간적 차이는 발생할 수 있다. 필요한 정보인지 아닌지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숙련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편을 재활용하는 행위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이 작업은 아직 '두 번째 뇌'만 가지고는 할 수 없다. 주어진 정보를 모아서 창의적으로 재조합해야 한다는 의미이고, 그렇기에 아무나 잘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닌 것이다. 여기에는 작업 의도에 대한 유연한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즉 계산된 프로그래밍에 의해 이루어지는 동일성의 판단이 아닌, 생각에 의해 이루어지는 유사성의 판단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렇기에 '정보의 시대'에도 여전히 ​'기존의 뇌'가 유효하다. 아니 오히려 전보다 더 중요해졌다. '기존의 뇌'를 제대로 활용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두 번째 뇌'의 성능이 제아무리 LTE 급에 옥타코어여도 의미가 없다. '두 번째 뇌'만 맹목적으로 의지해서는 오히려 기계화된 인간이 될 뿐이다. 그런 사람들은 시스템에 쉽게 휩쓸리고 쉽게 순응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 결국 '정보의 시대'의 실체는 다시 돌아온 '생각의 시대'인 것이다.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이자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막상 주변을 둘러보면 의외로 많은 젊은이들이 생각 그 자체를 나 몰라라 하는 느낌이다. 빨라지는 기기의 속도만큼 곰곰이 생각할 시간도 같이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다.

<생각의 시대>의 저자인 김용규 씨가 우려하는 점도 바로 이와 같다. 모든 인간에게는 생각을 익숙게 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 책이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생각의 시대>는 말 그대로 생각에 대한 생각을 서술해 나가는 책이다. 고대 그리스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는 서양 철학사라는 튼튼한 축을 기반으로 촘촘하게 직조해 나간다. 탈레스, 아리스토텔레스, 피타고라스, 플라톤 등 반가운 이름들이 어김없이 나타난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들의 업적을 단순 나열하고 있는 다른 인문서들과 이 책을 비교하고 싶지는 않다. 이 책은 방대한 한 편의 대하드라마처럼 읽히기도 한다. 생각의 구축은 언어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책의 내용처럼, 이미지화, 이야기화가 잘 되어 있는 김용규 씨의 문장은 독자의 개념 구축에 큰 도움을 준다. 읽는 재미마저 쏠쏠하다. 역사서로 보아도, 철학서로 보아도 모두 대단하다. 그야말로 '김용규 스타일'의 총망라인 것이다.

뭔가 아쉬우니 조금만 더 이야기해보자. 그래. 영화는 아니지만 스포일러를 조금 이야기해보는 것이 좋겠다. <생각의 시대>는 크게 두 부분으로 쪼개어 볼 수 있다. 전반부인 1,2부에서는 '생각'이라는 개념이 인류에게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고, 후반부인 3부 '생각의 도구'에서는 '생각'이라는 개념을 이루고 있는 5가지 필수 요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전반부도 무척이나 흥미롭지만 역시나 후반부인 3부가 이 책의 하이라이트를 이룬다. 5가지 필수 요소는 하나씩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메타포라(metaphora) - 은유

아르케(arche) - 원리

로고스(logos) - 문장

아리스모스(arithmos) - 수

레토리케(rhetorike) - 수사  

원어로만 읽어보면 어딘지 낯설다.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각각을 한국어 표현으로 다시 읽어보면 역시 수긍이 간다. 재밌는 것은 '생각'을 이루는 이 5가지 요소들이 모두 '언어'로부터 나왔다는 것이고, 하나의 요소는 완성된 또 다른 요소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서로 다른 사고방식을 구축하게 되는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였다. 'Manner Maketh Man' 이전에 '언어 Maketh Man'이었던 것이다! 이는 자기계발적인 측면뿐 아니라 자녀교육이라는 측면에서도 한 가지 깨우침을 주는 포인트다.(3부에서는 각 장마다 언어를 활용하는 다양한 훈련법을 소개하고 있으니 참고하도록 하자.)

사실 그렇다. 5가지 요소가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리가 추상화하여 의식하지 못 했을 뿐이다. 과거로부터 저자가 끄집어낸 개념이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 속에서도 여전히 필수적인 요소로 사용되고 있던 것들이다. 우리 인간의 시대가 무너지지 않는 한, 앞으로도 5가지 요소들의 가치는 변치 않을 것이다. 영원한 것은 아름다운 것이라고도 하지 않았는가? 다이아몬드 회사가 그렇게 이야기했고, <향연>에서도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러니 더 이상 망설일 필요는 없어 보인다. 바야흐로 다시 <생각의 시대>다. 우리는 오늘도 읽고, 쓰고, 생각해야 한다. 생각 없이 저절로 업그레이드될 수 있는 뇌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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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꿈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안토니오 타부키 지음, 박상진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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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6월 19일 새벽, 조그만 모니터 앞에서 키보드를 두들기며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던 신 씨, 작가이자 창조의 어머니는 꿈을 꾸었다. 그녀가 동경 대학의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고 있는 꿈이었다. 소나기가 종종 내리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 날은 창밖에 비 대신 피가 내렸다. 바닥이 온통 붉고 비릿했다. 다른 학생들은 없었고 피케 티를 걸친 젊은 남자 교수와 그녀 오직 둘 뿐이었다. 교수의 허리춤에는 벨트 대신 칼집이 묶여 있었지만 칼은 온 데 간 데 없었다. 강의는 일본어로 진행됐다. 드문드문 알아듣긴 했지만 정확한 의미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따분하다고 신 씨는 생각했다. 하지만 교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그녀는 미소와 함께 연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성실한 그녀의 태도에 교수도 기분이 우쭐해 보였다. 교수는 그녀에게 수업은 교단에서만 이뤄지는 게 아니라며 따라오라 했다. 우산을 쓰고 있는 수많은 인파를 헤치며 교수와 그녀는 거리를 거닐었다. 교수는 그녀의 걸음 속도를 고려하지 않았고, 미처 나막신을 준비하지 못한 그녀의 발은 붉게 물들었다. 도착한 곳은 어느 깊숙한 골목에 위치한 주택가였다. 인적이 드물었다. 해가 저물 때까지 교수는 아무 말이 없었다. 교수는 어둠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나 긴 침묵이 이어졌을까? 교수가 문득 허름해 보이는 한 주택의 창을 가리켰다. 그녀가 다가가보니 아무렇게나 대충 쳐진 커튼 틈새로 두 남녀가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그녀는 민망함을 감추지 못하고 교수를 돌아봤지만, 교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두 사람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얼굴도 점차 상기됨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게 첫날이었다. 신 씨와 교수는 그날을 기점으로 매일 땅거미가 질 때쯤 이 골목에서 다시 만났고 교대로 창 안쪽을 훔쳐보았다. 

두 남녀는 모두 실로 건강한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몸짓은 격렬하였다. 일터에서 돌아온 남자는 하루의 고단함을 채 씻어내리기도 전에 그녀를 쓰러뜨리고는 했다.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한 달이 금방 지나갔다. 이제 교수는 더 이상 골목에 나타나지 않았다. 소문에 의하면 교수는 사무실 앞에서 자신의 배를 칼로 그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자신의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한 달이 더 흘러갔다. 그러니까 첫날로부터 두 달이 지났을까? 여자는 벌써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고, 남자는 누구보다 그 변화를 기뻐하고 있었다. 물론 관찰자 신 씨에게도 한 가지 변화가 있었다. 그저 격렬하게만 보이던 남녀의 몸짓에서 아름다운 문장들이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드디어 다 됐다. 이제 이 문장들을 옮기기만 하면 된다. 그녀가 급하게 가방을 뒤적여 펜과 공책을 꺼내어든 그 순간. 갑자기 어디선가 그녀를 찾는 전화벨이 울렸다. 알람이었다. 개꿈이었나... 시계는 아침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는 찌뿌둥한 어깨를 두들기며 책상에서 일어나 세수를 하러 갔다. 그리고 그녀가 화장실에서 돌아왔을 때 정말 놀라운 일이 눈앞에 펼쳐졌다. 모니터에는 그녀가 고민 끝에 적지 못 했던 문장들이 너무나 완벽한 형태를 갖춘 채 적혀 있었다. 그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두 사람 다 건강한 육체의 주인들이었다.'하고 말이다.

 

PS, 혹시나 해서 그러는데 위 글의 신 씨는 절대로 신경숙 작가가 아님을 밝혀 둡니다. 저는 그분을 잘 모릅니다.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라는 작품은 읽었지만, 그 외 다른 작품들은 본 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이 감상은 이탈리아 작가 안토니오 타부키의 책 <꿈의 꿈>을 읽고 흉내낸 유치한 글일 뿐입니다. 아무튼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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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 오브 카드
마이클 돕스 지음, 김시현 옮김 / 푸른숲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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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란 무엇인가? 한자의 음과 국어사전에 있는 그대로 풀어쓰면 정치는 다음과 같다고 한다.

정치 政治

나라를 다스리는 일. 국가의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행사하는 활동으로,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상호 간의 이해를 조정하며,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따위의 역할. 

진짜로 저게 맞는 의미인가? 그런가? 내가 인터넷 쇼핑몰에서 늘상 보는 문구인 "모니터에 따라 실제 색상과 다를 수 있습니다." 라든지 아니면 "위 사진은 연출된 이미지로 실제와 다를 수 있습니다."처럼, 명사의 의미가 현실세계로 뛰쳐나오는 경우에도 간혹 실제와는 다른 형태를 보이기도 하나보다. 배송 전까지는 온갖 미사여구와 할인쿠폰, 프로모션을 앞세워 소비자를 유혹하지만, 결제가 끝난 바로 그 시점부터 관계는 역전된다. 택배가 어느 곳에 짱박혀 있든 제품에 무슨 하자가 있든 마음 졸이는 것은 쇼핑몰이 아닌 소비자다. 정치판도 그렇다. 어쩜 이리 빼닮았는지 그들에게 진정 중요한 것도 딱 선거까지. 공약은 보통 과대 광고다. 매니페스토를 제대로 이행하는 정치인들이 몇이나 될런지 모르겠다. 그러니 국민은 늘 진정성을 운운한다. 이들에 비하면 애초부터 난 '이렇게 비싸게 팔 거야'하고 팔아제끼는 장미인애의 '로즈인러브'나 조민아의 '우주여신 베이커리'가 훨씬 떳떳하다. 최소한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판단을 소비자에게 맡길뿐. 제발 사주십사 굽신거리지는 않는 모양이니 말이다.

아무튼 현실로 튀어나온 정치가 그러하다. 선거가 가장 중요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는다. 출판사 스스로 본격 정치스릴러라 일컫는 <하우스 오브 카드>에서도 정책이나 안건을 둘러싼 이야기의 비중은 극히 미미하지만, 정치가 원래 그런 거라니 그러려니 한다. '선거의 여왕'이라 불리던 박근혜 대통령만큼은 아니지만, 나 또한 초중고 시절을 통틀어 8번의 반장과 3번의 부반장 2번의 미화부장을 역임했던 화려한 현실 정치 경험을 가지고 있다. 설사 그런 수준이 아니라 해도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의 독자들이라면 적어도 줄반장이나 하다못해 조별 과제 조장 한 번쯤은 맡아 봤을 것이다. 그렇기에 굳이 허지웅, 마키아벨리, 셰익스피어의 이름을 들먹이면서까지 장르에 대해 부연 설명하지 않았어도 괜찮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동명의 미드는 또 얼마나 소문이 자자한가.

물론 미드의 명성에 비하면 원작인 소설은 조금 심심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야기는 주인공인 FU(프랜시스 어카트)가 총리직에 오르기까지 어떻게 상대들을 무너뜨리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읽다 보면 "상대의 약점을 쥐고 흔드는 것이 과연 윤리적으로 옳은 것인가?" 하는 질문과 "그래서 우리는 FU라는 냉혈한을 단지 악인으로 바라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처세의 매뉴얼처럼 바라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해볼 수도 있기는 하겠지만, 그마저도 너무 순진한 질문이다. 그만큼 사회가 각박하다. 배경이 영국 국회일 뿐. 이미 막장 드라마와 막장 정부, 네거티브에 친숙한 우리에게 <하우스 오브 카드>로부터 오는 이질감은 전혀 없다. 조금 옛날 소설이라 그런가? 영국이라 그런가? 신사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모든 것이 FU의 설계대로 순탄하게만 흘러가는 것도 조금 아쉬웠다. <하우스 오브 카드>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영화 <타짜>의 명대사를 빌려 "쫄리면 뒈지시던가!"다. 하지만 <하우스 오브 카드>와 <타짜>의 온도차는 사뭇 다르다. <타짜>에서 이 대사가 극적인 이유는 타짜가 또 다른 타짜에게 던지는 대사였기 때문이다. 반면 <하우스 오브 카드>에서는 같은 대사를 한 명의 타짜가 다수의 호구들에게 윽박지르고 있다. 호구들은 "예림이 그 패 봐봐." 정도의 대사나 칠 줄 알지. 타짜인 FU 앞에서 모두 다 쫄려서 잽싸게 뒈져버릴 뿐이다. 역시 조금 더 강력한 자극이 필요하다. 그게 아니라면 이곳 대한민국에서는 신문의 정치면이나 여의도를 주제로 하는 팟캐스트에게 명함조차 내밀 수 없을듯하다. 말 그대로 쫄리면 뒈져야 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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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비행 - 생계독서가 금정연 매문기
금정연 지음 / 마티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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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네이버 그리고 오랜만에 다음에서 '후장사실주의자'라는 단어를 검색해봤다. 엊그제는 정지돈의 <건축이냐 혁명이냐>를 읽었으며, 덧붙여 작가와 관련된 몇몇 시시껄렁한 인터뷰도 찾아보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다시 한 번 poptrash의 트위터 타임라인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렇게 해서 얻은 소득이라고는, 후장사실주의자의 후장이 바로 그 '후장'이라고 얼버무리는 정지돈의 인터뷰 답변 하나와 볼라뇨의 <야만스러운 탐정들>속 주인공들이 스스로 '내장사실주의자' 클럽이라는 것을 만들어 돌아다녔다는 이야기 뿐이었다. <야만스러운 탐정들> 1,2권은 몇 달 째 책장 속 가장 눈에 띄는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 읽고는 싶은데 선뜻 손을 못 대고 있는 상황. 같은 처지에 있는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피케티의 <21세기 자본> 역시 읽어야 하는 책이기는 한데, 과연 21세기안에 이 책들을 다 읽는게 가능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렇게 <야만스러운 탐정들>의 겉표지만 익숙했던 나로서는 '내장사실주의자'와 '후장사실주의자'간의 어떠한 연결고리가 있지 않을까 하는 아주 짧은 추측만 가능할 뿐. 그 이상은 가늠할 수 없었다.


도저히 모르겠다. 그놈의 '후장사실주의자'가 뭔지 말이다.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아무것인 것 마냥 달고 다니는 그들 패거리만의 무언가겠거니 하고 넘어가면 될 것을... 지금까지도 이렇게 집착하고 있다. 가끔 보통의 남자들은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일에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서 자신의 끈기와 열정을 다시금 확인하고는 한다. 찌질해보여도 어쩔 수 없다. 무슨 소리냐고? 같은 남자지만 이해할 수 없다고? 그럼 정정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애시당초 <야만스러운 탐정들>을 읽지도 않고 <볼라뇨 전염병 감염자들의 기록>을 펼쳐본 게 화근이었다. 물론 당장 나에게 좋아하는 소설가가 누군지 묻는다면 서슴없이 '볼라뇨'라고 답할 수 있기는 하다. 지난 반 년간 <아이스링크>를 시작으로 <칠레의 밤>, <먼 별>, <부적>, <전화>까지 꾸준히 읽어왔다. 가장 유명한 <야만스러운 탐정들>과 <2666>을 마지막 목표로 삼아 하나씩 읽어나가고 있는 셈이다. 이쯤이면 나와 볼라뇨를 처음 만나게 해준 2,666원의 책 <볼라뇨 전염병 감염자들의 기록>을 볼 자격이 충분하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착각이었다. 수 많은 볼라뇨 감염자들이 늘어놓는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시나 대표작들을 먼저 읽고 오는 편이 나았던 것이다. 감염자들은 나만 쏙 빼고 자기들끼리 아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릴없이 페이지를 왔다 갔다 하던 중 나는 볼라뇨 감염자를 자처하는 또 한 사람의 한국인을 만나게 되었다.


이름은 금정연이라고 한다. 그가 이 책에 남긴 <2012년 7월 10일, 서울 은평구 진흥로 3길>이라는 제목의 글. 이게 서평인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책을 언급하고 있으니 서평이라고 해야 할 듯한 글. 이 글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굳이 쓰지 않아도 되는 줄거리 대신 그는 자신과 <야만스러운 탐정들>을 맴돌았던 이야기를 쓰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한 간증법은 확실히 효과적이었다. 문득 나도 이 사람처럼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태까지는 서평을 남기면서 콕 집어 누구처럼 써봐야지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는데 말이다. 금정연의 글은 내가 막연하게나마 생각해오던 글쓰기의 스타일과 닮아 있었다. 이내 그의 다른 서평들이 궁금해졌다. 필자 소개란에 따르면 그는 인터넷 서점 알라딘의 인문 분야 MD로 일했으며, 다행히도 그의 서평들을 모아 낸 <서서비행>이라는 책이 있다고 한다. 책이 잘 됐는지 어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말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팔고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그를 수식하는 이 표현만큼은 못보고 지나쳤어도 좋았을텐데 그러지 못했다... 그것이 바로 '후장사실주의자'였다


<서서비행>이 경유지인 옥천 HUB를 거쳐 성남 금광동의 한 아파트에 당도하기까지는 총 이틀이 걸렸다. 그리고 도착한 책을 다 읽기까지 다시 또 일주일이 걸렸으니 총 10일 정도의 긴 여정이었던 셈이다. 만족스러웠다. <서서비행>과 함께 한 여행(혹은 실린 글들)은 무척이나 프랜들리했다, (진짜로 그가 후장사실주의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LG트윈스의 오랜 팬이라는 사실은 알게 됐으니까) 그가 책의 줄거리에 대해 구구절절 늘어놓지 않았던 것처럼 나 역시도 여기서 <서서비행>의 내용을 구구절절 늘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차피 책 내용이야 다른 사람들이나 사이트가 세세하게 다 말해주고 있을 테니, 원한다면 여기보다는 그리로 가보는 게 좋겠다. 계속 말하지만 나는 그저 궁금할 따름이다. 진짜로 그래서 이 글도 남기는 것이다. 


그러니 한 가지만 부탁드린다. 혹 후장사실주의자에 대해서 뭐라도 아시는 분 있으시면 댓글로 좀 알려주십사 하고 말이다. 사례는 답글로 두둑하게 드릴테니. 거기에 원한다면 이 책 <서서비행>을 답변자에게 넘겨드릴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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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멍충한 - 기묘한 이야기에 담아낸 인간 본성의 아이러니
한승재 지음 / 열린책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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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래도 멍청이보다는 멍충이가 조금 더 귀엽다. "이런 멍청한 녀석 같으니라고"라고 이야기하면 질책 같지만, "이런 멍충한 녀석 같으니라고"하면 왠지 모르게 자잘한 애정이 뒤따르는 느낌이랄까? 그래서인지 나는 멍충이라는 표현보다는 멍청이라는 표현이 더 좋다. 도긴개긴이지만 멍청이가 보다 더 직설적이고, 더 남성적이니까. 간만에 블로그에 글을 남기면서 이런 얘기나 늘어놓고 있는 내 스스로가 오늘따라 멍청해 보인다. 아무튼 왜 멍충, 멍청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 그것은 간만에 읽은 단편집 <엄청 멍충한>의 이야기를 조금 늘어놔 볼까 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꽤 오랫동안 여기에 글을 남기지 않았었다. 잔인한 4월이라서 혹은 회사에서 이리저리 쓸려 다녀서, 그것도 아니면 제출을 위한 서평의 압박과 그에 따른 반발심에 의해서. 뭐 이 핑계 저 핑계 다 대보지만 결국은 그냥 안 쓴 거다. 책이야 이래저래 꾸준히 읽어왔지만 감상은 한 번 두 번 안 써버릇하니 점차 관성이 붙어갔다. 슬럼프 같은 건가 싶기도 한 시간들은 점점 내 머리속을 엄청 나태한, 엄청 무책임한, 엄청 멍청한 상태로 만들어 갔다. 그나마 한 가지 좋았던 것은 밤 중에 글을 안 쓰니, 헬스장에 아침 운동을 빠지지 않고 나갈 수 있었다는 정도랄까? 4월에 찍은 19회의 헬스장 출석도장은 작년 8월부터 올 3월까지 찍은 출석 도장을 다 합친 것보다 많은 횟수였다. 멍청하면 몸이 고생한다 했다. 물론 여기서는 좋은 뜻이다. 그렇게 4월 말이 되고 연휴가 시작되자 나는 문득 내 하루하루의 시스템이 조금은 달라졌음을 깨닫게 되었다.


때로는 정말로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별 것도 아닌 것 같지만 문득 이 삶의 시스템, 이 사회의 시스템이 어떤 식으로든 다 짜여져 있는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것을 못 보지만, 나를 포함한 극소수의 사람들은 그 시스템의 작동 프로세스를 파악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 만약 이 시스템을 만든 설계자(누군가는 신이라 부르는)가 있다면, 손뼉을 딱 치며 "인간인 네가 어떻게 이걸 알아차리게 된 거지?" 하고 놀라 까무러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 같은 것들 말이다. 맨 인 블랙의 엔딩이 그러했고, 트루먼 쇼의 엔딩도 그런 뉘앙스의 영감을 내게 팍팍 심어 주고는 했었다.


재밌는 것은 한 번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그동안 익숙했던 A 부터 Z까지의 모든 것이 다 의심스러워진다는 것이다. 한승재씨의 단편집 <엄청 멍충한>을 읽으면서도 그랬다. 멍청한의 청, 그 중에서도 '청'의 'ㅓ'를 'ㅜ'로 살짝 돌렸을 뿐인데, 이건 마치 부잣집 안방 금고의 다이얼 키가 제대로 맞아 들어갔을 때의 느낌과도 같았다. 쩌억하고 틈이 갈라지더니 비틀어진 이야기들이 세상 밖으로 뛰쳐나왔다. 도대체 이게 뭔 소리야 싶다가도 뜨악해지고, 뜨악하다가도 뭐야, 겨우 그런 거였나 하는 허무가 온다. 다시금 이야기들을 금고 안으로 밀어 넣고 싶지만 이미 읽혀버린 이야기들은 저마다 한 마리 전서구로 변신하여 나와는 적정 거리를 두고 푸드득거릴 뿐이다. 


살짝 돌아간 그 포인트를 기점으로 모든게 모호하다. 난장판이다. 그래서 언뜻 보면 멍충해 보인다. 현실과 판타지, 과거와 미래, 진화와 퇴화, 자살과 타살처럼 서로 상반되는 것들이 이 책 <엄청 멍충한>에서는 애초부터 쌍둥이였던 것처럼 어우러지고 있다. 공존이 불능한 것들의 공존, 시니컬한 아이러니의 연속. 소설의 설계자 한승재씨가 짜놓은 이 판은 제목과는 달리 그다지 멍충하지 않다. 본업이 건축가, 소설은 어쩌다 보니 출간이라는데. 글쎄... 이마저도 믿지는 못하겠는데.


8개의 단편들이 지나간 뒤 마지막으로 또 다른 건축가 오호근씨의 추천사가 나온다. 한 장 정도 짧은 글의 제목은 '불필요할 수도 있는 독후감'. 그 추천사의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제목만큼은 진짜 크게 와 닿는다. 나 역시도 불필요할 수도 있는 이런 감상 따위를 남기고 있으니 말이다. 연휴의 마지막 밤. 충전은 완료됐으니 살짝 틀어놨던 다이얼을 다시 원상복구해야 할 시간이다. 째깍째깍 돌아가는 이 시스템 속에서, 혼자만 핀트를 풀고 있다가는 엄청 멍청한 녀석 소리를 들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오늘은 더 늦지 않게 잠들 수 있도록 한다. 괜히 의심하지 말고. 이 멍충한 녀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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