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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멍충한 - 기묘한 이야기에 담아낸 인간 본성의 아이러니
한승재 지음 / 열린책들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아무래도 멍청이보다는 멍충이가 조금 더 귀엽다. "이런 멍청한 녀석 같으니라고"라고 이야기하면 질책 같지만, "이런 멍충한 녀석 같으니라고"하면 왠지 모르게 자잘한 애정이 뒤따르는 느낌이랄까? 그래서인지 나는 멍충이라는 표현보다는 멍청이라는 표현이 더 좋다. 도긴개긴이지만 멍청이가 보다 더 직설적이고, 더 남성적이니까. 간만에 블로그에 글을 남기면서 이런 얘기나 늘어놓고 있는 내 스스로가 오늘따라 멍청해 보인다. 아무튼 왜 멍충, 멍청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 그것은 간만에 읽은 단편집 <엄청 멍충한>의 이야기를 조금 늘어놔 볼까 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꽤 오랫동안 여기에 글을 남기지 않았었다. 잔인한 4월이라서 혹은 회사에서 이리저리 쓸려 다녀서, 그것도 아니면 제출을 위한 서평의 압박과 그에 따른 반발심에 의해서. 뭐 이 핑계 저 핑계 다 대보지만 결국은 그냥 안 쓴 거다. 책이야 이래저래 꾸준히 읽어왔지만 감상은 한 번 두 번 안 써버릇하니 점차 관성이 붙어갔다. 슬럼프 같은 건가 싶기도 한 시간들은 점점 내 머리속을 엄청 나태한, 엄청 무책임한, 엄청 멍청한 상태로 만들어 갔다. 그나마 한 가지 좋았던 것은 밤 중에 글을 안 쓰니, 헬스장에 아침 운동을 빠지지 않고 나갈 수 있었다는 정도랄까? 4월에 찍은 19회의 헬스장 출석도장은 작년 8월부터 올 3월까지 찍은 출석 도장을 다 합친 것보다 많은 횟수였다. 멍청하면 몸이 고생한다 했다. 물론 여기서는 좋은 뜻이다. 그렇게 4월 말이 되고 연휴가 시작되자 나는 문득 내 하루하루의 시스템이 조금은 달라졌음을 깨닫게 되었다.
때로는 정말로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별 것도 아닌 것 같지만 문득 이 삶의 시스템, 이 사회의 시스템이 어떤 식으로든 다 짜여져 있는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것을 못 보지만, 나를 포함한 극소수의 사람들은 그 시스템의 작동 프로세스를 파악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 만약 이 시스템을 만든 설계자(누군가는 신이라 부르는)가 있다면, 손뼉을 딱 치며 "인간인 네가 어떻게 이걸 알아차리게 된 거지?" 하고 놀라 까무러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 같은 것들 말이다. 맨 인 블랙의 엔딩이 그러했고, 트루먼 쇼의 엔딩도 그런 뉘앙스의 영감을 내게 팍팍 심어 주고는 했었다.
재밌는 것은 한 번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그동안 익숙했던 A 부터 Z까지의 모든 것이 다 의심스러워진다는 것이다. 한승재씨의 단편집 <엄청 멍충한>을 읽으면서도 그랬다. 멍청한의 청, 그 중에서도 '청'의 'ㅓ'를 'ㅜ'로 살짝 돌렸을 뿐인데, 이건 마치 부잣집 안방 금고의 다이얼 키가 제대로 맞아 들어갔을 때의 느낌과도 같았다. 쩌억하고 틈이 갈라지더니 비틀어진 이야기들이 세상 밖으로 뛰쳐나왔다. 도대체 이게 뭔 소리야 싶다가도 뜨악해지고, 뜨악하다가도 뭐야, 겨우 그런 거였나 하는 허무가 온다. 다시금 이야기들을 금고 안으로 밀어 넣고 싶지만 이미 읽혀버린 이야기들은 저마다 한 마리 전서구로 변신하여 나와는 적정 거리를 두고 푸드득거릴 뿐이다.
살짝 돌아간 그 포인트를 기점으로 모든게 모호하다. 난장판이다. 그래서 언뜻 보면 멍충해 보인다. 현실과 판타지, 과거와 미래, 진화와 퇴화, 자살과 타살처럼 서로 상반되는 것들이 이 책 <엄청 멍충한>에서는 애초부터 쌍둥이였던 것처럼 어우러지고 있다. 공존이 불능한 것들의 공존, 시니컬한 아이러니의 연속. 소설의 설계자 한승재씨가 짜놓은 이 판은 제목과는 달리 그다지 멍충하지 않다. 본업이 건축가, 소설은 어쩌다 보니 출간이라는데. 글쎄... 이마저도 믿지는 못하겠는데.
8개의 단편들이 지나간 뒤 마지막으로 또 다른 건축가 오호근씨의 추천사가 나온다. 한 장 정도 짧은 글의 제목은 '불필요할 수도 있는 독후감'. 그 추천사의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제목만큼은 진짜 크게 와 닿는다. 나 역시도 불필요할 수도 있는 이런 감상 따위를 남기고 있으니 말이다. 연휴의 마지막 밤. 충전은 완료됐으니 살짝 틀어놨던 다이얼을 다시 원상복구해야 할 시간이다. 째깍째깍 돌아가는 이 시스템 속에서, 혼자만 핀트를 풀고 있다가는 엄청 멍청한 녀석 소리를 들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오늘은 더 늦지 않게 잠들 수 있도록 한다. 괜히 의심하지 말고. 이 멍충한 녀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