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링크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박세형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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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링크, 세 남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

 

 

 

 

 

  

오프라인 서점에 가는 것을 참 좋아하지만 보통 나의 책 구매는 온라인 서점을 통해 이뤄진다. 직접 가서 만져보고 훑어보는 만큼의 즐거움과 신뢰감을 얻을 수는 없지만, 그런 것들을 다 제쳐두더라도 시간적, 금전적인 장점들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 다달이 쌓여가는 포인트와 독자리뷰들은 보너스. 가끔 출판사의 프로모션 낚시질에 미끼를 덥썩 물어버리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그 정도야 뭐 애교로 봐줄 만하다. 어차피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실제 구매 버튼을 누른 사람은 나니까. 아무튼 이래저래 책들은 쌓여간다. 책을 사지 않는 이유중 대부분은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거나 당장 돈이 없다거나 둘 중 한 가지이지만, 원래 책을 사는 사람에게는 오만가지 이유가 있는 법이다.

 

<볼라뇨 전염병 감염자들의 기록>도 내가 몇 달전에 구매한 책들 중 하나이다. 당시 나는 딱히 '로베르토 볼라뇨'의 팬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그의 책을 한 권이라도 읽어본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또 그마저도 아니었다. 소개 글도 깊이 읽지 않아서, 그냥 "스페인어권의 한 작가가 대단한가 보네?"라는 정도만 파악했을 뿐이다. 이 책을 구입한 이유는 그냥 단 한 가지. 2,666원이라는 매우 저렴한 가격 때문이었다. 나는 인터넷 서점 쇼핑의 마지막으로 이 한 권의 책을 장바구니에 담으면서, 비로소 할인쿠폰이 나오는 금액대를 맞출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이 내 스스로 고른 함정 카드였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책은 '로베르토 볼라뇨'가 직접 쓴 작품이 아니었고, 그를 추종하는 많은 이들이 그를 오마주 하며 바치는 문집이었던 것. 2,666원이라는 가격도 볼라뇨 일생의 대작이라는 <2666>에서 따온 것이다. 그래서 일단은 읽지 않고 넣어둘 수밖에 없었다. '볼라뇨'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추종자들의 오마주를 읽어봐야 내가 무슨 감흥을 느낄 수 있겠나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고 그대로 책을 묵힐 생각을 하니 그건 그대로 또 아까웠다. 

 

나는 <볼라뇨 전염병 감염자들의 기록>을 제대로 읽고 싶어졌다. 그러려면 일단 볼라뇨의 책을 읽어야 할 것인데... 대표작이라는 <2666>은 무려 다섯 권짜리 소설이었고, 그다음으로 꼽는 <야만스러운 탐정들>도 두 권짜리였다. 처음부터 읽기엔 왠지 부담스러울 듯한 분량탓에 일단은 그의 초기작부터 맛보기로 했다. 결국 고른 책은 바로 <아이스링크>다. 볼라뇨의 이름으로 처음 출판된 이 소설이면 충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번에는 서점에 들러 직접 사들고 올라왔다.

 

 

 

 

 

 

 

"지금 우리는 아바나 카페에서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있는데 살인마 잭이 등장할 법한 안개는 예전보다 더욱 짙어졌습니다. <멕시코시티, 부카렐리 가, 이제 살인 사건 차례군> 하고 짐작하시는 분들이 있겠지요... 하지만 전혀 그런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드리기 위해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 12p, 레모 모란 

 

애초에 살인사건이 중요하다고 말한 적도 없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누구인지 밝힌 적도 없다. 심지어 볼라뇨는 레모 모란의 입을 빌려 처음부터 위와 같이 충고하고 있다. 차례에는 <아이스링크>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세 남자의 이름만 반복된다. 하지만 앞서도 말했듯 이것은 살인사건의 진술도, 심문 과정도 아니다. 굳이 정의내려 말하자면 털어놓음 정도라 할 수 있겠다. 

 

우리는 망각의 동물이고, 첫 페이지부터 모든 속뜻을 알아듣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언제나처럼 나는 내 머리가 이끄는 대로 <아이스링크>를 읽기 시작했다. '살인사건이 발생했고, 범인을 추적한다'라는 아주 단순하면서도 명확한 사실은 나를 추리소설 읽기의 영역으로 자연스레 인도해갔다. 그 결과 <아이스링크>를 읽는 내내, 내 머릿속에서는 과연 누가 죽었을지 그리고 누가 죽였을지에 대한 물음표가 그치지 않았고, 그것은 마치 마술사의 트릭이 뭔지 밝혀내고야 말겠다는 의심 많은 관객의 자세와도 같았다.

 

나름의 추리망을 좁혀가며 소설의 종반부에 다다른 순간, 내가 마주한 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반전'이었다. 피해자와 가해자 그 둘 모두 내 추리를 벗어난 인물인 것도 사실이었지만, 볼라뇨의 소설이 선물하는 '반전'은 그런 보통의 추리소설에서 말하는 '반전'이 아니었다. 오히려 주인공인 세 남자만 두고 보면, 소설이 종반부로 치닫게 된다 해서 새롭게 밝혀지는 진실이나 관계 같은 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저 세 남자는 사건의 처음부터 끝까지 한없이 겉돌 뿐이었다. 그들은 마음속에 있는 또 하나의 자아를 억누르는 한편, 그 자아를 강렬히 그리워했다. 그렇다. 사실 볼라뇨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사람들을 둘러싼 사건'이 아닌 '사람의 삶'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아이스링크>가 보여준 진짜 '반전'인 셈이다. 

 

완전히 설계당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살인사건의 진실을 향해 쉼 없이 읽어내려 왔는데, 마지막 순간에서야 내가 놓치고 있던 것들에 대해 알게 되었다. 순간 느껴지는 이 무너져내림이란... '반전'을 꾀한 것은 물론 작가 볼라뇨였지만, 그 '반전'이 100%가 될 수 있도록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것은 결국 나였던 것이다. 이래서 '볼라뇨 전염병'이 창궐한 것일까? <아이스링크>의 마지막 장을 덮음과 동시에, 나는 다시 <아이스링크>의 첫 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세 남자의 목소리 하나하나에 다시 귀를 기울이자, 처음과는 다르게 그들의 진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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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의 글쓰기 - 상사의 마음을 사로잡는 90가지 계책
강원국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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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의 글쓰기, 강 상무가 전하는 생존의 법칙

 

 

 

 

 

 

 

지난 몇 달 동안 나의 주업무는 창의성에 대해 공부하는 것이었다. 파트장의 지시가 있었다. <창의성의 또 다른 이름 트리즈>라는 책 한 권을 주교재 삼아, 창의적 문제 해결에 대해서 읽고, 정리하고, 세미나를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 모든 과정을 프레지로 다시 총정리하여 강의 자료를 만들었다. 내 모니터에서는 하루 종일 컬러풀한 교안들이 날아다니고, '창의성'이라는 글자가 10분에 한 번 꼴로 대문짝만 하게 튀어나왔다. 빠르게 돌아가는 현장과 맞물려 각종 전자기기와 소프트웨어를 다루는 우리 사무실에서는 그 자체로 굉장히 낯선 풍경이었다. 내 직무 역시 교육이나 기획, 디자인 등과는 동떨어진 엔지니어 쪽이었으니 말이다.

 

"도대체 너는 일은 안 하고 맨날 뭘 하고 있냐?", "세상에는 두 가지 업무가 있지, 바로 잡일과 JOB일 말이야."등 자리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나에게 한 마디씩 던져댔다. 처음엔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창의성 공부'를 붙잡고 있는 시간이 점차 길어짐에 따라 다른 사람들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파트장이 나를 연구소 밖으로 밀어내려는 건가 싶기도 했다. 때마침 회사는 위기를 외치며 대대적인 조직개편을 앞두고 있었다. 불안했다. 엔지니어로써 자리 잡기에도 바쁜 이때, 내가 이런 걸 하는 게 정말 괜찮나 싶어 파트장에게도 몇 차례 항명을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돌아오는 것은 "그래, 충분하다."라는 답변 대신 계속되는 질문들이었다.

 

"네가 이 창의성 공부를 왜 해야 하지?"로 시작해서 질문은 점점 안드로메다로 갔다. 어디로 튈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질문의 불씨는 나의 연애 문제로 가기도 하고, 어떨 때는 회사의 미래로, 그리고 또 가끔은 철학적인 분야로 옮겨갔다. 그러면서 그는 생각의 힘, 그리고 질문의 힘을 강조했다. 정신줄을 살짝 놓는 순간이면 나는 파트장에게 탈탈 털리고 있었고, 그에게는 그런 문답의 시간이 하나의 유희인 마냥 즐거워 보였다. 어쩌면 나의 지난 몇 달은 단지 그의 말벗 역할이었을 수도 있겠다. 조금 찜찜하긴 하지만 그런 관점으로만 본다면, 나는 나의 역할을 충분히 해낸 것 같다. 회사 생활... 역시 쉽지가 않다. 상사 한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기가 이렇게 힘들 줄 누가 알았을까?

 

 

 

 

 

 

 

<회장님의 글쓰기>를 읽었다. 올 상반기에 <대통령의 글쓰기>로 많은 이들의 펜(pen)심을 자극했던 강원국씨의 신간이다. 차기작에 대한 기대가 참 컸는데, 올해가 가기 전에 이렇게  또 한 권의 책을 발표했다. 강연도 많았을 테고, 한동안은 성공작의 후광을 좀 더 누려볼 만도 한데, 역시 근면한 사람은 결과물로 계속해서 존재감을 나타낸다.

 

<회장님의 글쓰기>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누가 봐도 <대통령의 글쓰기>의 자매품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막상 읽어보면 그 느낌과 내용 측면에서 전작과는 확연히 다른 온도를 감지할 수 있다. 지난 번 <대통령의 글쓰기>에서 중요한 키워드는 '대통령'이 아닌 '글쓰기'였다. 청와대 두 대통령의 이야기를 다루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글쓰기'가 책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이번 <회장님의 글쓰기>에서 무게중심은 '글쓰기'보다는 오히려 '회장님'쪽으로 많이 기울어 있다.  

 

글은 여전히 간결하지만, 웃음기보다는 따끔한 일침이 먼저 날아온다. 마냥 소탈해 보이던 '강씨아저씨'가 셔츠를 받쳐 입자 어느새 '강상무님'이 되었다. 평사원 입장에서 임원은 언제나 커보인다. 게다가 회사의 오너를 최측근에서 모셨다고 한다. 직장에서 그만한 자리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은 절대로 얕볼 수 없다. 뭐가 됐든 이 세계의 생리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회장님의 글쓰기>는 저자 강원국씨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본격 업무 매뉴얼이자 생존 매뉴얼이다

 

"회사에서 글쓰기는 '출산 수당'과 같은 것이다. '안심하고 키울 수 있는 환경'이 관계다. 그리고 그런 환경을 만들어주는 게 소통이다. 소통을 잘하면 좋은 관계가 만들어지고, 좋은 관계에서는 눈빛과 말 한마디가 장문의 보고서를 대신할 수 있다. 이런 관계에서는 글솜씨가 문제 되지 않는다. 굳이 글을 잘 쓸 필요도 없다. 하물며 글의 기교가 어디에 필요하겠는가." - 105p

 

누구보다 글쓰기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강원국씨조차 위와 같이 이야기한다. 글이 빛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글솜씨가 아닌 바로 상사와의 '소통'이다. 물론 소통이라고 해서 결코 평등하지 않다는 것도 기본 전제로 한다. 상하의 관계를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순간, 이미 회사에서의 게임은 끝났다고 봐야 한다. 심지어 <회장님의 글쓰기>에서 말하고 있는 상사의 모습은 양성(性)적인 사이코패스이며 때로는 어린애처럼 꽁하기도 하다. 땅콩껍질을 까달라면 당연히 까주는 게 맞다. 회사에서 오래 살아남으려면 내 윗분을 소중히 어르고 달래야 하며, 무조건 그 입맛에 맞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요지이다. 우리의 목표는 참 명확하지만,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한 기술들은 생각보다 까다롭다. <대통령의 글쓰기>에서 글을 쓰는 기술들을 40가지로 나누어 설명했던 것처럼, <회장님의 글쓰기>에서는 회사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술들을 여러 가지로 쪼개어 설명한다.

 

3장에 걸쳐서 나오는 그 내용들이 굉장히 현실적이다. 실제로 회사생활을 하다 보니 책의 예시들이 더욱 피부에 와 닿는다. 더불어 사무실에서 봤던 여러 장면들이 뇌리를 스쳐간다. 상사의 눈 밖에 벗어나 한직으로 좌천된 어느 과장님부터, 글의 초입에 말했던 우리 파트장, 그리고 그 파트장이 대체 왜 승승장구하며 잘 나가는지, 그가 나에게 가르쳐주는 것들을 나는 과연 똑바로 배워가고 있는지까지 말이다. 많이 반성하게 한다.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겠다는 다짐은 덤이다. 책의 마지막 장이 남아있지만, 딱 3장까지만 읽어도 아쉬움은 없겠다. 참 적절한 시기에 잘 읽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쭙잖은 힐링보다는 채찍 쪽이 역시 내 취향이다. 

 

 

 

 

 

 

 

앞서 3장까지는 쉼 없이 업무가 몰아쳤다면, 마지막 4장부터는 퇴근길 느낌으로 읽을 수 있는 '글쓰기' 부분이 펼쳐진다. 야근이 아니라 다행이다. 앞서 한 차례 언급했던 것과 같이, 강원국씨의 글쓰기 기술은 이미 <대통령의 글쓰기>를 통해 소개된 바 있다. 그러다 보니 <회장님의 글쓰기>에서는 어떠한 기술적인 면보다는, '글쓰기'의 동기부여에 대해, 그리고 '글쓰기'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들 아는 원론적인 이야기들이지만, 그마저도 '강원국'이라는 필터를 거치고 나니 지루할 틈이 없다. '강상무님'에서 다시 '강씨아저씨'로 돌아오신듯한 에피소드들이 많다. 그렇게 긴장을 풀고 읽은 4장에서는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다 못해 날아가는 기적을 보았다.

 

개인적으로는 특히 술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대통령의 글쓰기>에서는 독자에게 술 먹고는 글 쓰지 마라 하시더니, 정작 이번에는 한 챕터의 제목이 통째로 '술이 없으면 글쓰기도 없고 나도 없다'이다. 아마도 주당인 강원국씨의 기준에서 술을 먹었다고 하는 정도는 일반인과는 조금 다른(??) 모양이다.

 

 "졸저 <대통령의 글쓰기>를 쓰면서 점심때 막걸리를 한 병씩 마셨다. 하루하루 막걸리는 오아시스 샘물과 같았다. 글쓰기 사막을 걷는 내게 생명수였다. 그 시간을 기다리며 오전에 글을 썼다. 오후에는 술기운으로 지치지 않았다." - 344p

 

실제로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회장님의 글쓰기>를 다 읽었다. 몰입하다보니 한시간씩 서서 읽어도 별로 힘들지도 않았다. 전작에 비하면 내용은 약간 무거웠지만, 이번에도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내 입가에는 만족의 미소가 번졌다. 아마 나를 비롯한 독자들은 이 두 권의 책을 단순한 기술서나 자기 계발서로 기억하지는 않을 것이다. 강원국씨는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갔을 뿐이지만, 이 두 권의 책은 그 자체로 우리가 왜 책을 써야 하는지에 대한 모범 답안이 된다. 앞으로도 강원국씨의 글은 가까이 두고 참고해야겠다. 나도 내 나이 마흔이 넘으면 이런 글을 쓰고 싶다. (원하는 무언가를 글로 남겨두면 그것이 이루어 질 확률이 높아 진다고 한다.)

 

"나이 마흔이 넘으면 누구나 자기 안에 쓸 거리를 가지고 있다. 얼마나 팔릴 것이냐는 추후 문제다. 책을 내는 것 자체로 의미가 크다. 책은 장대한 자기소개서다." - 34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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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으로 지은 집 - 가계 부채는 왜 위험한가
아티프 미안 & 아미르 수피 지음, 박기영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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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으로 지은 집, 터질 폭탄은 결국 터지게 되어 있다

 

 

 

 

 

 

 

 

어린 시절 MC 허참씨가 진행하던 '가족오락관'이라는 TV 프로그램을 즐겨 봤다. 남성팀과 여성팀, 두 팀으로 갈라 각종 퀴즈를 푸는 나름 건전한 프로그램이었는데, 그 중 '폭탄 돌리기'라는 코너가 생각이 난다. 제한 시간 내에 퀴즈를 풀어 상대방에게 폭탄을 넘기지 않으면, 자신의 손 위에서 폭탄이 터지는 바로 그런 코너. 폭탄이 언제 터질지 모른다는 데서 오는 스릴감과, 나만 아니면 OK라는 그 짜릿함은 당시 TV를 보던 어린 나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져왔었다. 폭탄이 뻥하고 터지면 같이 깜짝 놀랐고, 놀란 출연자를 보며 배꼽을 잡고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만약에 그 폭탄이 방송용 장치가 아닌, 진짜로 터지는 폭탄이었다면 이야기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한정된 스튜디오안에서, 단지 폭탄이 내 손위에 있지 않다는 사실만으로 안심할 수 있을까? 절대 아니다. 터지면 남성팀이고 여성팀이고 전부 다 무사할 수 없다. 중요한 키워드는 '누구의 손 위에서'가 아니라 폭탄이 '터지냐 마느냐'다. 결국 폭탄 그 자체를 터뜨리지 않기 위해, 혹은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어떤 조치가 필요한 것이다. 두 팀 모두가 합심해야지만 살아남을 수 있는 게임이 되는 것이다.

 

2014년 대한민국. 가족오락관은 종영했지만 여전히 '폭탄 돌리기'는 끝나지 않았다. 정부의 부동산 대책은 시장 떠받치기만 급급하다. 경제는 날로 악화되어 가지만, 오히려 가계들에게 대출을 더 해주겠다며 판으로 들어오라 말한다. 젊은 층의 미래를 담보 삼아 도박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 결과 가계부채는 지난 11월 1060조 원을 돌파하는 등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이제는 폭탄이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97년 외환위기 이후 크나큰 위기가 또다시 찾아오고 있지만, 정부는 여전히 부동산 부자들의 눈치만 보고 있는 답답한 형국이다.

 

 

 

 

 

 

 

 

<빚으로 지은 집>이라는 책의 제목부터 일단 의미심장하다. 절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단순히 지나간 과거의 미국 이야기로만 치부하기에는 비슷한 점들이 너무나도 많다. 어쩌면 몇 년 후, 한국의 경제상황이 이 책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가 될 수도 있을 것만 같다. 

 

책은 전체적인 페이지들을 통해, 그중에서도 특히 '레버드 로스 이론'을 중심으로 하여, 빚이 채무자에게 미치는 엄청난 악효과들을 설명하고 있다. 왜 빚을 지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더 큰 빚을 지게 되는지, 가계부채가 커진 상태에서 맞이하는 부동산 거품의 몰락이 전체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렇다면 우리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타개할 수 있을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미시적인 사례들과 그에 따른 해설이 무척이나 흥미롭다. 또한 후반부에서 글로벌 금융위기의 원인이 단지 은행의 위기 때문이 아닌 가계부채의 악화 때문이었다고 보는 시선도 참신하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않은 이상, 빚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대한민국의 젊은 세대로써 마주하는 빚의 현실적 무서움은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이지만 언제나 두렵게 다가온다. 불평등의 가속화 그리고 그에 따른 전체 경제의 몰락에 맞서, <빚으로 지은 집>에서 내세우는 솔루션은 '책임 분담 모기지'라는 정책이다. 채권자가 채무자를 하방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며, 자본의 이득에 대해서는 주식처럼 공유하자는 것이다. 야수적 충동에 휩싸여 바보같이 대출을 받는 채무자뿐만 아니라, 갚을 능력이 없는 채무자에게까지 무분별하게 대출을 해준 채권자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을 전가하자는 이야기이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해법이 현실적으로 우리 경제 시스템에 적용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굉장히 이상적인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한 푼이나마 더 챙겨보려고 꼼꼼하게 서민의 주머니를 노리는 현 정권, 그리고 그 뒤에서 어떻게든 부동산으로 한방을 노리는 국내 정서가 바뀌지 않는 한은 어림도 없다는 생각이다. 범국민적 합의가 필요하다.

 

어쩌면 이제는 자본주의의 한계가 다가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터질 폭탄은 결국 터지게 되어있다. 결론에 이르러 약간 고개를 갸우뚱하기는 했지만, 가계부채라는 폭탄의 제조과정과 그 위력을 친절하게 알려준 것만으로도 이 책 <빚으로 지은 집>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사놓기만 하고 읽어보지 못한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에 비하면 그 분량도 매우 가볍다. 번역이 훌륭해서인지 책장도 잘 넘어간다. 만약 주변에 빚의 위력을 막연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혹은 아직도 경제는 나 몰라라 하는 친구가 있다면 이 책 <빚으로 지은 집>을 강력 추천한다. 나중에 본인이 살 집이 무슨 재료로 지어졌는지는 알아야 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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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빼빼로가 두려워
박생강 지음 / 열린책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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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빼빼로가 두려워, 위아래 선 긋기 혹은 부스러기

 

 

 

 

 

 

 

이야기가 어디서 어떻게 튀어나올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엊그제 끄적여놨던 메모의 한 귀퉁이에서 나올 수도 있고, 오랜만에 꺼낸 코트 속 안주머니에서 갑자기 꺼내어질 수도 있다. 무언가를 쓰거나, 만들거나 하는 사람들은 항상 긴장해야 한다. 뒤통수를 빡! 하고 후려치는 강렬한 아이디어는 제정신이 들고나면 어느새 곁에서 멀리 떠나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말이다. 그 찰나의 깨달음을 결과물로 끌어올 수 있느냐 마느냐에서 예술가와 일반인의 경계가 갈리기도 한다. 내가 빼빼로 한 봉지를 철근같이 씹어먹으면서 과자의 칼로리 계산이나 빼빼로데이를 비롯한 그 수많은 데이들의 상술을 생각하고 있을 때, 소설가 박생강씨는 빼빼로를 통해 인간 세상을 보았다. 그 막대과자를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무언가 그의 입속에서 번뜩인 모양이다. 번뜩임은 식도를 타고 그의 몸속으로 들어가 철학이 되었고, 머지않아 박생강씨를 숙주로 삼아 <나는 빼빼로가 두려워>라는 소설을 이 세상에 내놓았다.

 

일단 흔하디 흔한 소재의 연애소설이 아니라 참 다행이었다. 제목만 보고 빼빼로데이 즈음해서 나오는 PPL같은 소설일까 걱정했는데, 역시나 괜한 걱정이었다. <나는 빼빼로가 두려워>는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소설이다. 일명 '빼빼로포비아'라 불리는 한 남자의 진실을 추적한다. 뭐지 싶은 순간 스릴러는 SF가 되었다가, 또다시 뭐지 싶은 순간 SF는 얼렁뚱땅 판타지물이 되기도 한다. 장르를 넘나드는 기묘한 모험담 속에서 <나는 빼빼로가 두려워>속 인물들은 각자의 개성들을 턴을 돌아가며 드러낸다. 주인공 김만철이 초코가 묻어있는 베이직한 빼빼로라면, 씁쓸한 민형기의 캐릭터는 아몬드 빼빼로, 스무 살 대학 후배 향기는 마치 딸기맛 빼빼로와도 같은 느낌이다. 

 

 

 

 

 

 

 

"이 시대의 인간은 어쩌면 빼빼로 피플이네. 인간은 태어나기를 딱딱하고 맛없는 존재로 태어났지. 하지만 거기에 자신의 개성이란 달콤한 초콜릿을 묻히지. 타인을 유혹할 수 있는 존재로 특별해지기 위해. 하지만 그 개성의 비율 역시 언제나 적당한 비율, 손에 개똥 같은 초코가 묻어나 불쾌감을 주지 않는 적정선의 비율로 필요하네." - 145~146p

 

소설 속 민형기가 말하듯, 빼빼로라는 과자에는 확실한 경계선이 있다. 자신이 어떤 맛인지를 어필하는 윗부분과, 무슨 맛의 빼빼로이든간에 자신이 어쨌든 빼빼로라는 과자임을 알리는 아랫부분. 대부분의 사람들은 초코가 발라진 윗부분을 좋아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위아래가 모두 초코로 뒤덮여 잡을 부분이 사라지면 곤란해한다. 아랫부분이 있기에 사람들은 빼빼로를 깔끔하게 먹어치울 수 있는 것이다. 간혹 누드 빼빼로는 예외 아니냐고 누가 물을 지도 모르겠는데, 걔는 또 겉과 속으로 두 공간이 갈리니까 알아서 생각하자.

 

<나는 빼빼로가 두려워>에서는 여실히 보여준다. 소설 속에서든, 사회 속에서든 그 위아래로 나뉘는 경계의 선 긋기가 참 중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세상을 혼자 살게 아니라면 100% 온전한 나를 드러내는 것은 패착이다. 그만큼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우리 사회가 제아무리 개성이 강한 인재, 창의성이 뛰어난 인재를 원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사회가 인재를 통제할 수 있도록 하는 기본적인 복종을 원한다. 개인의 향기를 내뿜는 건 복종의 퍼센티지가 정해진 다음이다.

 

그나마 먹는 빼빼로는 윗부분이라도 많아서 다행, 결국 개인과 보편성이라는 위아래의 끊임없는 충돌에서 과반수를 차지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보편성의 쪽이다. 나아가 우리는 우리의 활동 반경 내에서 보편성에 어긋나는 사람들을 만나면, 무척이나 불편함을 느끼고 그들을 다시 보편성의 쪽으로 끌어들이기 바쁘다. 그리고 그것을 어른스러운 행동이라며 자위한다. 물론 어디에 선을 그을지 하는 선택은 개인의 몫이다. 당연히 그 선택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드물기는 하지만 실리칸에게 초대받았던 사람들처럼, 개인의 솔직함이 보상을 받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다시 한 번만 상상해보자. 보편성이라는 빼빼로의 손잡이를 똑 부러뜨리고, 그것을 밟아 가루로 만드는 상상을 말이다. 별 거 아니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희열이 느껴지지 않는가?

 

"그 과자는 일종의 테스터네. 나는 솔직한 인간들이 좋아. 자네가 썼던 다른 스윗스틱에 대한 평가들은 사실 형편없는 미사여구였지. 그건 싸구려 불량 식품과 비슷한 언어야. 그건 능력 있는 어른에게 잘 보이려는 젊은 아르바이트생들의 일반적인 언어이기도 하지. 뭐랄까? 금붕어의 언어라고 해두지. 내가 만난 20대들은 어항 속의 영악한 관상용 금붕어 같았네. 금붕어가 영악해 봤자 어항 속의 금붕어지. 특별할 것은 없지 않나?" - 102~103p

 

빼빼로데이가 지나고 나면, 편의점의 그 많던 빼빼로들은 아무런 의미도 남기지 않는다. 그저 재고물품 중에 몇 박스가 될 뿐이다. 내가 방금 읽은 소설책도 시간이 지나가면 그저 똑같은 한 권의 책이고 종이일 뿐이다. 소설가 박생강씨가 <나는 빼빼로가 두려워>를 통해 실험하고 싶었던 인간다움은 무엇일까? 검은 푸들의 눈동자일까? 외계인이 남긴 갈색 부스러기일까? 과연 이 같은 질문의 유효기간은 또 얼마나 갈 것인가?

 

이야기의 시작은 빼빼로라는 작은 막대과자였다. 이야기가 어디서 어떻게 튀어나올지 우리가 알 수 없었던 것처럼, 이야기의 끝이 독자의 마음 어디에서 어떻게 끝날지도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우리는 계속해서 위아래를 어떻게 구분지을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인간 이후의 인간이 될 것인지? 달콤한 순간에 갇혀있는 스틱으로 남을 것인지? 답은 예 / 아니오로 고르거나 선으로 죽 긋거나 편하실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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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만담 - 스마일 화가와 시크한 고양이의
이목을 지음, 김기연 사진 / 맥스미디어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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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만담, 꺼내어 말할 용기와 그것을 들어줄 여유

 

 

 

 

 

 

이따금 추억팔이를 하고 싶을 때가 있다. 간혹 그런 밤이면 나는 쵸재깅닷컴에 접속한다. 요즘이야 인스타그램이나 페북이나 이런저런 세계적인 SNS들이 진짜 많이 늘었지만, 이천 년대 초중반 한국에서 미니홈피가 누렸던 입지는 독보적이었다. 어린 시절의 추억들과 수많은 일촌들이 그대로 동면하고 있는 곳. 미니홈피에 접속하는 일은 흡사 방 한 귀퉁이에 먼지 쌓인 비밀 박스를 열어보는 것과도 비슷하다. 물론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차이에서 오는 감동의 무게가 조금 다르기는 하다. 하지만 비밀 박스에는 없고, 미니홈피에는 있는 것이 딱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어디서 어떻게 뿜어져 나온 건지 그 출처조차 불분명한 감성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다른 말로 중2병이라고 부른다.

 

관심받고 싶어서, 인간이 가장 감성적인 새벽 2시라서, 혹은 그냥 그대로 미쳐가고 싶어서든 그 어떤 이유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 시절에는 참 여러 가지 이유로 수많은 중2병들이 양산되었다. (지금도 조금 그렇지만)나 역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미니홈피 프로필이며 다이어리며 지금 읽어보면 참으로 기가 차는 글들이 넘쳐난다. 술에 만취된 다음 날 핸드폰 통화목록을 살펴보는 것만큼이나 옛날 글을 다시 읽어보는 일은 많이 두렵다. 그야말로 흑역사들이기 때문이다. 문득 궁금해진다. 그 많던 중2병 환자들은 도대체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그들의 감성은 왜 중3 혹은 고1이 되지 못하고 다 자퇴해버린 걸까? 그러니까 그 글과 사진들은 왜 작성자의 손에 의해 비공개가 되거나 삭제될 처지에 놓인 것인지 말이다.

 

<청춘만담>이라는 에세이를 한 권 선물 받았다. 저자인 김경애씨가 감사하게도 손수 보내주셨다. 책은 자신을 '시크한 고양이 체셔'라는 닉네임으로 말하는 스물여섯 김경애씨와 자신을 '캡틴 스마일'로 불러달라는 50대 화백 이목을씨의 문답으로 이어진다. 보통 질의응답에서 중요한 것은 답변보다도 질문이다. 아무리 훌륭한 자리, 유명인사라도, 질문이 어처구니없다면 답변은 읽을 필요도 없다. 외국 유명인 앉혀놓고 주제와도 상관없는 두유노우싸이? 두유노우김치?를 연발하는 기자들을 생각해보자. 참 암담하지 않던가? 최소한 이 책, <청춘만담>은 그런 우를 범하지는 않는다. 두 사람이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에서 내 머리를 둘로 쪼개는 듯한 깨우침이나 그 어떠한 번뜩임은 없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편안하고 일상적인 주제들로 책장이 넘어간다.

 

<청춘만담>을 쓰면서 저자이자 '시크하고 싶었던 고양이', 김경애씨가 얼마나 많이 자신의 다이어리를 들춰 보았을지 상상이 된다. 청춘의 대표자가 되어 고민을 멘토에게 전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녀도 나름대로 고민이 참 많았을 텐데, 역시나 가장 진솔한 자신의 모습으로 다가가는 방법을 택했나 보다. 사실 내용만 봐서는 이게 어떻게 직장인 스물여섯이야 싶기도 하다. 이 책의 고민들은 지금의 스물여섯 김경애씨보다는 과거의 김경애씨 비중이 더 크지 않았을까? 현실적이라기보다는 굉장히 말랑말랑하고 감각적이다. 그러니까 무언가 기억의 재구성을 거친듯한 에피소드들이 굉장히 많이 추억된다. 출판사 에디터라는 직함답게 유려한 글솜씨가 아니었더라면, 자칫 <청춘만담>도 그저 그런 중2병 SNS의 진일보 정도로 남을 뻔했다는 느낌도 살짝 든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김경애씨의 질문들이 소녀의 감성을 지녔었기에 멘토 이목을씨를 만나 빛을 발하게 되었다고도 생각한다. 소녀감성은 커녕, 또래인 김경애씨의 질문을 그저 어리광, 혹은 오그라듦으로 치부해버리는 나 같은 사람이 멘토였다면 아마 <청춘만담>은 출판될 일조차 없었을 것이다. 이목을씨는 <청춘만담>의 곳곳에 등장하는 자신의 스마일들을 그릴 때처럼,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것들을 '아무렇게' 생각하고 관심을 가진다. 한 분야의 대가가 된다는 것은 출발점이 어디가 되었든 간에 결국 자신의 도착점으로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의 답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겁을 주지도 않는다. 다만 격식 없이 잘 들어주고, 담백하고 쾌활하게 대답한다. 그럼 그걸로 끝이다. 어쩌다 보니 식상한 표현이 되어 버렸지만 진짜로 진정성. 그로 인해 <청춘만담>은 다른 중2병들과는 다르게, 그 자리에서 멈추지 않고 더욱 커나갈 수 있었다.

 

들어줄 여유가 있는 것, 그리고 꺼내어 말할 용기가 있다는 것. 글을 쓰는 젊은이와 그림을 그리는 대가의 문답, 아니 만담 속에서 그러한 점들이 참 부러웠다. 우리가 과거에 썼던, 그리고 지금도 쓰고 있는 중2병 게시물들을 자꾸 비공개하고 삭제할 수밖에 없는 이유. 그 허세롭고 오그라드는 글들마저 진지하게 받아주고, 또 답해줄 그 누군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내 미니홈피에는 중2병에 걸린 채 동면하고 있는 글들이 수십 편이다. 그 글들에 담겨있던 생각들도 언젠가는 이 책 <청춘만담>처럼, 관심을 가져줄 누군가를 만나 깨어나고 자라나길 바라본다. 내 학력은 일단 학사에서 끝났지만, 생각들은 석,박사학위까지 못 가란 법도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세상은 결코 멈추지 않아. 시계는 멈출지언정 시간은 멈추지 않지. (중략) 어쩌면 인생은 나뭇가지 위에 잘 매달려 있는 저 시계처럼 시간에 잘 매달려 있는 것이다." - 28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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