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님의 글쓰기, 강 상무가
전하는 생존의 법칙

지난 몇 달 동안 나의 주업무는 창의성에 대해 공부하는 것이었다.
파트장의 지시가 있었다. <창의성의 또 다른 이름 트리즈>라는 책 한 권을 주교재 삼아, 창의적 문제 해결에 대해서 읽고, 정리하고,
세미나를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 모든 과정을 프레지로 다시 총정리하여 강의 자료를 만들었다. 내 모니터에서는 하루 종일 컬러풀한 교안들이
날아다니고, '창의성'이라는 글자가 10분에 한 번 꼴로 대문짝만 하게 튀어나왔다. 빠르게 돌아가는 현장과 맞물려 각종 전자기기와 소프트웨어를
다루는 우리 사무실에서는 그 자체로 굉장히 낯선 풍경이었다. 내 직무 역시 교육이나 기획, 디자인 등과는 동떨어진 엔지니어 쪽이었으니
말이다.
"도대체 너는 일은 안 하고 맨날 뭘 하고
있냐?", "세상에는 두 가지 업무가 있지, 바로 잡일과 JOB일 말이야."등 자리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나에게 한 마디씩 던져댔다. 처음엔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창의성 공부'를 붙잡고 있는 시간이 점차 길어짐에 따라 다른 사람들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파트장이 나를 연구소
밖으로 밀어내려는 건가 싶기도 했다. 때마침 회사는 위기를 외치며 대대적인 조직개편을 앞두고 있었다. 불안했다. 엔지니어로써 자리 잡기에도 바쁜
이때, 내가 이런 걸 하는 게 정말 괜찮나 싶어 파트장에게도 몇 차례 항명을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돌아오는 것은 "그래, 충분하다."라는
답변 대신 계속되는 질문들이었다.
"네가 이 창의성 공부를 왜 해야
하지?"로 시작해서 질문은 점점 안드로메다로 갔다. 어디로 튈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질문의 불씨는 나의 연애 문제로 가기도 하고, 어떨 때는
회사의 미래로, 그리고 또 가끔은 철학적인 분야로 옮겨갔다. 그러면서 그는 생각의 힘, 그리고 질문의 힘을 강조했다. 정신줄을 살짝 놓는
순간이면 나는 파트장에게 탈탈 털리고 있었고, 그에게는 그런 문답의 시간이 하나의 유희인 마냥 즐거워 보였다. 어쩌면 나의 지난 몇 달은 단지
그의 말벗 역할이었을 수도 있겠다. 조금 찜찜하긴 하지만 그런 관점으로만 본다면, 나는 나의 역할을 충분히 해낸 것 같다. 회사 생활... 역시
쉽지가 않다. 상사 한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기가 이렇게 힘들 줄 누가 알았을까?

<회장님의 글쓰기>를 읽었다.
올 상반기에 <대통령의 글쓰기>로 많은 이들의 펜(pen)심을 자극했던 강원국씨의 신간이다. 차기작에 대한 기대가 참 컸는데, 올해가
가기 전에 이렇게 또 한 권의 책을 발표했다. 강연도 많았을 테고, 한동안은 성공작의 후광을 좀 더 누려볼 만도 한데, 역시 근면한
사람은 결과물로 계속해서 존재감을 나타낸다.
<회장님의 글쓰기>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누가 봐도 <대통령의 글쓰기>의 자매품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막상 읽어보면 그 느낌과 내용
측면에서 전작과는 확연히 다른 온도를 감지할 수 있다. 지난 번 <대통령의 글쓰기>에서 중요한 키워드는 '대통령'이 아닌
'글쓰기'였다. 청와대 두 대통령의 이야기를 다루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글쓰기'가 책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이번 <회장님의
글쓰기>에서 무게중심은 '글쓰기'보다는 오히려 '회장님'쪽으로 많이 기울어 있다.
글은 여전히 간결하지만,
웃음기보다는 따끔한 일침이 먼저 날아온다. 마냥 소탈해 보이던 '강씨아저씨'가 셔츠를 받쳐 입자 어느새 '강상무님'이 되었다. 평사원 입장에서
임원은 언제나 커보인다. 게다가 회사의 오너를 최측근에서 모셨다고 한다. 직장에서 그만한 자리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은 절대로 얕볼 수 없다. 뭐가
됐든 이 세계의 생리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회장님의 글쓰기>는 저자 강원국씨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본격 업무
매뉴얼이자 생존 매뉴얼이다
"회사에서
글쓰기는 '출산 수당'과 같은 것이다. '안심하고 키울 수 있는 환경'이 관계다. 그리고 그런 환경을 만들어주는 게 소통이다. 소통을 잘하면
좋은 관계가 만들어지고, 좋은 관계에서는 눈빛과 말 한마디가 장문의 보고서를 대신할 수 있다. 이런 관계에서는 글솜씨가 문제 되지 않는다. 굳이
글을 잘 쓸 필요도 없다. 하물며 글의 기교가 어디에 필요하겠는가." - 105p
누구보다 글쓰기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강원국씨조차 위와 같이 이야기한다. 글이 빛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글솜씨가 아닌 바로 상사와의 '소통'이다. 물론 소통이라고 해서 결코
평등하지 않다는 것도 기본 전제로 한다. 상하의 관계를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순간, 이미 회사에서의 게임은 끝났다고 봐야 한다. 심지어
<회장님의 글쓰기>에서 말하고 있는 상사의 모습은 양성(性)적인 사이코패스이며 때로는 어린애처럼 꽁하기도 하다. 땅콩껍질을 까달라면
당연히 까주는 게 맞다. 회사에서 오래 살아남으려면 내 윗분을 소중히 어르고 달래야 하며, 무조건 그 입맛에 맞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요지이다. 우리의 목표는 참 명확하지만,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한 기술들은 생각보다 까다롭다. <대통령의 글쓰기>에서 글을 쓰는 기술들을 40가지로 나누어 설명했던 것처럼, <회장님의
글쓰기>에서는 회사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술들을 여러 가지로 쪼개어 설명한다.
3장에 걸쳐서 나오는 그 내용들이 굉장히
현실적이다. 실제로 회사생활을 하다 보니 책의 예시들이 더욱 피부에 와 닿는다. 더불어 사무실에서 봤던 여러 장면들이 뇌리를 스쳐간다. 상사의
눈 밖에 벗어나 한직으로 좌천된 어느 과장님부터, 글의 초입에 말했던 우리 파트장, 그리고 그 파트장이 대체 왜 승승장구하며 잘 나가는지, 그가
나에게 가르쳐주는 것들을 나는 과연 똑바로 배워가고 있는지까지 말이다. 많이 반성하게 한다.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겠다는 다짐은 덤이다. 책의
마지막 장이 남아있지만, 딱 3장까지만 읽어도 아쉬움은 없겠다. 참 적절한 시기에 잘 읽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쭙잖은 힐링보다는 채찍 쪽이 역시
내 취향이다.

앞서 3장까지는 쉼 없이 업무가
몰아쳤다면, 마지막 4장부터는 퇴근길 느낌으로 읽을 수 있는 '글쓰기' 부분이 펼쳐진다. 야근이 아니라 다행이다. 앞서
한 차례 언급했던 것과 같이, 강원국씨의 글쓰기 기술은 이미 <대통령의 글쓰기>를 통해 소개된 바 있다. 그러다 보니 <회장님의
글쓰기>에서는 어떠한 기술적인 면보다는, '글쓰기'의 동기부여에 대해, 그리고 '글쓰기'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들
아는 원론적인 이야기들이지만, 그마저도 '강원국'이라는 필터를 거치고 나니 지루할 틈이 없다. '강상무님'에서 다시 '강씨아저씨'로 돌아오신듯한
에피소드들이 많다. 그렇게 긴장을 풀고 읽은 4장에서는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다 못해 날아가는 기적을 보았다.
개인적으로는 특히 술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대통령의 글쓰기>에서는 독자에게 술 먹고는 글 쓰지 마라 하시더니, 정작 이번에는 한 챕터의 제목이 통째로 '술이
없으면 글쓰기도 없고 나도 없다'이다. 아마도 주당인 강원국씨의 기준에서 술을 먹었다고 하는 정도는 일반인과는 조금 다른(??)
모양이다.
"졸저
<대통령의 글쓰기>를 쓰면서 점심때 막걸리를 한 병씩 마셨다. 하루하루 막걸리는 오아시스 샘물과 같았다. 글쓰기 사막을 걷는 내게
생명수였다. 그 시간을 기다리며 오전에 글을 썼다. 오후에는 술기운으로 지치지 않았다." -
344p
실제로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회장님의
글쓰기>를 다 읽었다. 몰입하다보니 한시간씩 서서 읽어도 별로 힘들지도 않았다. 전작에 비하면 내용은 약간 무거웠지만, 이번에도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내 입가에는 만족의 미소가 번졌다. 아마 나를 비롯한 독자들은 이 두 권의 책을 단순한 기술서나 자기 계발서로 기억하지는 않을
것이다. 강원국씨는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갔을 뿐이지만, 이 두 권의 책은 그 자체로 우리가 왜 책을 써야 하는지에 대한 모범 답안이 된다.
앞으로도 강원국씨의 글은 가까이 두고 참고해야겠다. 나도 내 나이 마흔이 넘으면 이런 글을 쓰고 싶다. (원하는 무언가를 글로 남겨두면 그것이
이루어 질 확률이 높아 진다고 한다.)
"나이 마흔이 넘으면 누구나 자기 안에 쓸 거리를 가지고 있다. 얼마나 팔릴
것이냐는 추후 문제다. 책을 내는 것 자체로 의미가 크다. 책은 장대한 자기소개서다." -
342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