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걸그룹으로 산다는 것은 - 걸그룹 소녀들에게 하이힐 대신 운동화를 준 매니저의 이야기
이학준 지음 / 아우름(Aurum)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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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걸그룹으로 산다는 것은,

노출보다 안쓰러운 아이돌 산업의 민낯

 

 

 

 

 

 

 

대한민국은 요즘 90년대 가요에 대한 향수로 물들어있다. 무한도전의 토토가가 한바탕 휩쓸고 간지 벌써 몇 주가 흘렀지만, 여전히 각종 음원사이트의 TOP 100 차트에는 터보, S.E.S, 엄정화의 곡들이 한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다. 카페를 가도, 식당을 가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벅찬 감동에 젖어있는 몇몇 3,40대 네티즌들은 이렇게 말한다. 역시 가요는 90년대가 최고였다고. 요즘 가수들은 흥도, 실력도 그저 그렇지만 도대체가 개성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고 말이다. 한술 더 떠 몇몇은 이를 통해 세대의 깊이마저 논의한다. 이러한 의견에 대해 어느 정도는 동의할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많은 부분에서 굉장히 편향적인 시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90년대 가요들이라고 항상 찬양만 받아왔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도 그 시절엔 윗세대의 못마땅한 눈총을 받아왔다. '정신없다. 하나도 못 알아먹겠다. 도무지 따라 부를 수가 없다. 양아치 음악이다.' 등의 비난에 맞서, 문화를 문화 그 자체로 봐달라며 항거하던 90년대 가요의 팬들이다. 그랬던 그들이 이제 '윗세대'의 역할을 자청하고 있다. 레퍼토리 역시 크게 새롭지 않다. 그들은 요즘 가요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정신없다. 무슨 가사인지 이해할 수 없다. 도무지 따라 부를 수가 없다. 벗을 줄만 아는 싸구려 음악이다.' 하고 말이다.

 

그런데 정말 그 이야기들이 다 맞는 이야기일까? 90년대 가수들과 요즘? 가수들이 그렇게나 역량의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일까? 가수 개개인을 살펴보면 오히려 그런 주장은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 스포츠계가 그러했고 다른 문화 산업들이 그러했듯 개개인의 하드웨어는 확실히 발전하고 있다. 또한 방송과 매체의 발달로 이제는 누구나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오히려 더 어리고 더 잘 다듬어진 상태의 원석들이 넘치는 시대이다. 90년대와 2010년대 가수 중 누가 더 우월한지를 가린다는 것 자체는 사실 큰 의미가 없다. 팔은 안으로 굽게 마련이다. 나와 함께 전성기를 누렸던 가수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리오넬 메시와 마라도나 둘 중 누가 더 훌륭한 축구선수였는가를 묻는 질문과 마찬가지이다.

 

굳이 비교해야겠다면 가수 개개인이 아니라 시스템을 살펴봐야 한다. 가요계는 속도와 효율성만을 좇아가는 대한민국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대중은 매년 더 강렬하고 자극적인 것을 원한다. 다양한 개성과 장르의 가수들이 90년대 이후 갑자기 씨가 마른 것은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노래 부르고 있다. 단지 돈이 되지 않아 최전선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아이돌, 전자음, 후크송으로 대변되는 2010년대의 가요계는 우리 사회의 '적자생존'이 어떤 의미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90년대 가요는 90년대의 방식으로 소비에 최적화되었던 것이고, 지금의 가요는 지금의 방식으로 소비에 최적화되어가는 것일 뿐이다. 그것이 바로 문화이다. 요즘 가요에 '낭만'이 없다며 혀를 차기 전에 요즘 시대의 '낭만'이 어디로 갔는지를 먼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종사자들에게만 책임을 전가할 문제는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걸그룹으로 산다는 것은>은 이러한 '아이돌 산업'의 민낯을 솔직하게 드러낸 책이다. 저자 이학준 씨와 그의 동료들은 아이돌 그룹의 데뷔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담아내고자 1년 동안 '나인뮤지스'의 매니저 입장으로 기획사 '스타제국'을 드나들었다. 소위 3대 기획사라 불리는 SM, YG, JYP는 아이돌의 신비감을 이유로 제안을 거절했다. 처음부터 그 거절을 예상했던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그것이 다큐멘터리에는 약이 되었다. 나인뮤지스는 데뷔와 동시에 A급이 되어버리는 대형 기획사의 아이돌들과는 출발점이 달랐다. 그녀들은 철저하게 시장의 반응에 따라, 그리고 기획사의 전략에 따라 성패가 갈리는 걸그룹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나인뮤지스와 함께한 저자의 일기장에는 연예계의 '화려함'보다는 '냉정함'이 더 많이 묻어 나왔고, 늘씬한 여자들의 속살을 보고도 '섹시함'보다는 '안쓰러움'이라는 감정이 먼저 복받쳐 올랐다.

 

인간적인 소녀들이 있기 전에 '나인뮤지스'라는 걸그룹이 있었고, 인간적인 매니저가 있기 전에 '나인뮤지스'라는 걸그룹이 있었다. 모든 것은 철저히 시스템대로 굴러갔다. 다만 시스템의 방향은 언제든 바뀔 수 있었고, 그 방향에 따라 무엇이든 하루아침만에 달라질 수 있었다. 리더가 교체되고, 멤버가 방출되어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모두들 지나간다. 누군가는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언제나 대기하고 있다. 결국은 모두가 '나인뮤지스'의 부품처럼 소비되는 것이다. 나아가 그렇게 조립된 '나인뮤지스'역시 '아이돌 산업'의 부품으로 또 한 차례 소비되고 있었다. 이러한 잔혹한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누구 하나 쉽게 털고 떠나지 못하는 이유. 마치 데자부처럼 낯설지 않았던 그 모습에 책을 읽는 도중 가슴이 짠해지기도 했다.

 

"재능이 없다면 그저 버텨라. 성실하면 중간은 간다." - 155p

 

위와 같은 선배의 따듯한 조언에 저자는 ?기자 생활 초년을 버텨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같은 조언을 나인뮤지스의 멤버들에게 전해주지는 못했다. 대신 매니저 생활을 마치던 날. 저자는 멤버들에게 마지막 선물로 운동화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하이힐에서 잠시라도 내려와 편히 쉬라고 준비한 거야. 비싼 건 아니지만 너희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어." - 267p

 

저자는 그녀들에게 '아이돌 산업'이라는 시스템에 맞서 무조건적으로 버티는 삶을 권하는 대신 작은 쉼표를 찍어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마찬가지로 이 책 <대한민국에서 걸그룹으로 산다는 것은>도 그녀들을 위한 두 번째 쉼표가 될 것이다. 다행히도 책이 출간된 지금까지 걸그룹 '나인뮤지스'는 사라지지 않고 가요계에 살아남아있다.

 

문득 외로웠던 나의 군 시절을 버티게 해줬던 수많은 걸그룹들도 생각이 난다. 소녀시대, 카라, f(x), 다비치, 브라운아이드걸스, 애프터스쿨, 레인보우, 포미닛, 미스에이, 시크릿, 원더걸스, HAM, 브랜뉴 데이 등 대충 생각나는 대로만 적어도 진짜 많다. 그녀들 또한 빛나는 별이 되기 위해 고난의 시간을 견뎌냈을 것이다. 다들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걱정 중 하나가 연예인 걱정이라고 누군가 말을 하던데... 오늘만큼은 주제넘게 걱정을 해본다. 대한민국에서 걸그룹으로 산다는 것은, 결국 대한민국에서 젊은이로 산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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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의 사생활 - 관계, 기억, 그리고 나를 만드는 시간
데이비드 랜들 지음, 이충호 옮김 / 해나무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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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의 사생활, 잠 못 드는 밤 읽기 좋은 잠 이야기

 

 

 

 

 

 

별일이 없는 경우에는 밤 12시에 침대에 눕는다. 취침 전 마지막으로 스마트폰을 꼼지락거려보다가, 마지막 노래를 선곡하고서는 2,3번 정도 반복 재생을 하다 보면 어느새 잠이 든다. 이따금 어떤 곡, 어떤 가수에게 꽂히는 날은 앨범 단위의 재생까지 가는 경우도 부지기수이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는 시간은 새벽 5시 30분. 알람몬 어플을 연타하며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하루에 보통 4, 5시간 정도 꿈을 꾼다. 서울로 회사를 다니고부터는 계속해서 이런 패턴이다. 지금은 익숙하지만 처음 출근시간 8시를 맞추기란 생각보다 힘겨운 일이었다.

 

언젠가부터 지하철에서 꾸벅꾸벅 조는 일이 잦아졌다. 회사에서 새로운 이론들을 공부해도 습득 속도가 이전 같지가 않다. 점점 능률이 떨어지는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다 나이를 먹은 탓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수많은 형님, 누님들에게 면목이 없다. 그렇다. 이건 나이 탓이라기보다도 단순히 잠이 부족해서 생기는 문제이다. 그 누구도 지금의 나정도로 잠을 자서는 100%가 될 수 없다. 일반적으로 최상의 컨디션을 누리려면 8시간 정도는 푹 잠을 자줘야 한다. 보직의 특성상 하루에 12시간 정도 잠을 잤던 군인시절 나는 내 생애 가장 똘망똘망했었고, 못해도 하루에 8시간 이상씩 꼬박 잤던 대학시절에는 숙취가 아니고서야 절대 무기력하지 않았다.

 

핫식스를 사러 갈지, 박카스를 사러 갈지 고민하다가 그냥 이 책 <잠의 사생활>을 주문했다. 얼마 전 블로그 이웃인 양반님의 포스팅을 통해 눈여겨 본 적 있는 책이었다. 목마른 놈이 결국 우물을 파게 된다. 새해에는 좀 더 잠다운 잠을 한 번 자보고자 1월의 개인 독서 주제를 '잠'으로 삼게 되었다. 머리맡에서 잠에 대해 읽다 보면 잠에 대한 필요성이 조금 더 와 닿을까 싶어서 그랬다. 그리고 기왕 주문하는 김에 <24/7 잠의 종말>도 한 권 슬쩍 끼워 넣었다. 이 책도 머지않아 읽고 나면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할 생각이다. 오래간만에 인트로가 긴 이번 감상은 데이비드 랜들의 책 <잠의 사생활>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는 잠에 대한 궁금함으로 <잠의 사생활>을 구매했을 뿐인데, 저자 데이비드 랜들은 잠에 대한 궁금함으로 <잠의 사생활>이라는 책을 탄생시켜 버렸다. 그는 잠에 관한 어떠한 학위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이 아저씨가 평소에 잠에 관한 어떠한 업무를 도맡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흔히 말하는 잠에 관한 '권위자'는 아닌 셈이다. 다만 데이비드에게 남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현직 기자라는 사실과 간헐적으로 몽유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 (모든 기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는 깨어있는 시간에도 발로 뛰었고, 자고 있는 시간에도 발로 뛰었다. 그리고 그 뜀박질은 그가 잠에 대한 이야기를 수집하게 된 계기이자 원동력이 되었다.

 

"나는 만약 또 잠결에 걸어 다니다가 뭔가에 부딪혀 크게 다치면 어떻게 하나 하고 혼란에 빠져 고민하다가 결국 어떤 계획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만약 의사가 잠에 대해 더 자세히 말해줄 수 없다면, 내가 직접 나서서 해결책을 찾아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내 인생의 3분의 1이 제대로 조사도 설명도 되지 않은 채 지나가고 있었는데, 그러면서도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 19p

 

저자의 이력과 탄생 비화에서 감이 오듯 이 책 <잠의 사생활>이 체계적이고 엄격한 학술서는 아니다. 읽다 보면 편하게 잠에 들 수 있는 노하우를 참고할 수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잠의 사생활>을 잠의 '매뉴얼'로 보기에도 조금은 무리가 있다. 오히려 그보다는 참 잘 만들어진 한 권의 잡지처럼 느껴진다. 의학, 언론, 법, 군, 스포츠, 역사 등등 잠과 관련해서 다방면으로 읽을거리가 참 많다. 이게 정말 한 사람이 다 조사한 게 맞나 싶을 정도. 뿐만 아니라 대중들이 어떤 주제에 솔깃할지 그 맥을 짚고 편집하는 능력도 출중하다.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읽었던 몇 가지 챕터의 주제를 예시로 들자면 다음과 같다.

 

2. 사라진 두 번째 잠

: 인공조명이 나타나기 전까지 원래 인간의 잠은 두 번으로 나뉘었다. 빛이 수면에 끼치는 영향은 얼마나 대단한가?

 

3. 침대를 따로 쓰는 게 좋을까?

: 사랑하는 사람과 한 침대를 쓰는 것은 섹스에는 좋지만, 그 밖의 점에서는 좋지 않다는 말은 사실일까? 부부는 트윈 베드를 써야 할까?

 

5. 꿈의 의미

: 꿈의 영역은 프로이트가 말했던 대로 욕망의 상징적인 일부분일까?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꿈을 제어할 수 있을까?

 

7. 'Z'무기

: 부족한 잠은 전쟁의 역사에서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가? 언젠가 혈중 알코올 농도처럼 인체의 피로도를 수치화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8. 잠결에 저지른 살인

: 몽유병 상태에서 저지른 살인에 대한 판결은 유죄인가? 무죄인가? 아니면 새로운 잣대가 필요한가?

 

아이러니하게도 애당초 독서의 목적이었던 '잠에 대한 필요성 일깨우기'와 관련된 챕터들은 내 기억 속에서, 아니 인기투표에서 아래 순위로 밀려났다. 굳이 <잠의 사생활>을 통해 읽어보지 않았어도, 다 알고 있었을 법한 착한 내용들이 주를 이뤘다. 결론은 잠을 충분히 자는게 좋다는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대신 위 순위를 차지한 챕터들로는 잠에 대해 우리가 잘 몰랐던 이야기들, 그리고 사회적인 관점에서 논쟁이 될 법한 이야기들이 주를 이뤘다. 아무래도 가까운 미래의 잠에 대한 화두를 던져주는 점들이 좋았다. 일찍 잠에 들까 하고 <잠의 사생활>을 펼쳤다가 오히려 챕터 속 주제에 대한 공상을 멈추지 못해 늦잠에 들었던 날도 있었다.

 

<잠의 사생활>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자연적으로 설계되었던 잠의 방식을 계속해서 리모델링해가고 있다고 한다. 다만 현재까지는 그 모델링의 방향이 생물학적 인간에게 최적화되기보다는, 사회적 시스템에 최적화되고 있으며, 그에 따른 부작용들이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이다. 계속해서 잠만 줄여나가는 것은 결코 효율적인 답이 될 수 없다. 그렇다. 누군가는 항상 깨어있으라 이야기했지만, 실질적으로 항상 깨어있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불안해하지 않고 잘 자고 싶다. 이것은 곧 스스로를 잘 제어하고 싶다는 이야기가 된다. 나는 <잠의 사생활>을 통해 그 완벽한 해법을 찾지는 못했지만, 완벽한 해법보다 더 흥미로운 질문들을 머리속에 담아 간다.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라는 코나의 노래 제목처럼, 어쩌면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소중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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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 잠의 종말
조너선 크레리 지음, 김성호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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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 잠의 종말, 도시가 잠들지 않는 이유

 

 

 

 

 

 

처음 스마트폰을 구입했을 때가 기억난다. 중고로 공기계를 구입했었던 쿼티식 스마트폰 옵티머스 큐. 나도 드디어 문자 대신 '카톡'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3G나 와이파이 망만 있으면 따로 문자 비용이 들지도 않고,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를 가늠하게 해주는 숫자 '1'은 그 자체로 신세계였다. 그로부터 약 4년의 시간이 흘렀다. 카톡으로 시작해 밴드, 라인,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등 수많은 메신저, SNS 어플들이 이제는 일상이 되었다. 스마트폰 없는 사람을 주위에서 찾아보기 무척이나 어려운 시대. 스마트폰을 꺼두면 나보다 주위 사람들이 더 불편해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사적이고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나누던 게 목적이었던 카톡은 한 단계 더 진화했다. 이렇게 업무적으로 사용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퇴근 시간 이후에도, 주말에도 회사의 단체 카톡방, 밴드 채팅창은 쉬는 시간이 없다. 정말 24/7이다. 항상 즉각적인 답변을 요구한다. 숫자'1'이 사라졌으니 잡아뗄 수도 없다. 그래, 윗분들은 참 편해서 좋겠다. 기술의 발달이 가져온 게 나의 편의인 줄로만 알았는데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그만큼 쉼 없는 감시와 검열이 우리를 날로 옥죄여 오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모든 것들이 기계화되고 상품화되어가는 오늘날, 인간을 인간답게 지속해줄 마지막 보루는 바로 잠뿐이다. 지금까지 잠듦과 깨어남의 주기적인 리듬은 자본주의도 쉽게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적인 부분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마지막 보루마저 종말을 앞두고 있다. '24/7'은 24시간 주 7일간 쉼 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의미한다. 자본주의는 전 세계적 네트워크와 방대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드디어 '24/7' 시장을 이루어냈다. 언제 어디서나 시장에 접근하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제는 그 다음 단계를 계속해서 시도하고 있다. 바로 '24/7'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24/7'형 인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책 <24/7 잠의 종말>의 도입부에서는 7일간 잠에 들지 않고 비행이 가능한 흰정수리북미멧새를 연구하는 군사 학자들과, 인공위성으로 태양광선을 반사시켜 도시의 밤을 없애려 했었던 러시아의 한 컨소시엄을 그 예시로 든다.

 

잠은 소진된 에너지를 재생시키고, 주기적인 삶의 균형을 유지해줌으로써 인간을 인간답게 해준다. 하지만 잠들어 있는 시간은 인간이 가장 취약한 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산업화 이전 국가의 역할 중, 잠들어 있는 국민의 안위를 보장해 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역할이었다. 맘편히 잠들 수 있는 국민만이 다음 날 더욱 강한 생산성을 만들어 내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오늘날 그 생산성은 기계가 대체한다. 돈이 돈을 버는 시대에, 단순노동력보다 중요한 것도 돈이 되었다. 더 이상 국가와 사회는 국민의 잠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24/7 쉬지 않고 돌아가는 기계에 맞서 버티기를 종용한다. 밤시간의 취약함을 징징거리는 자들은 도태될 뿐이다. 국민이 잠들지 않을 때 국가는 돈을 번다. 심지어는 교묘하게 국민의 잠을 악용하기까지 한다.

 

 

 

 

 

 

그러니 모두가 깨어 있으라 말한다. 게다가 자본주의 아래 TV나 통신등을 위시한 기술의 발전은 점점 더 그 주기가 짧아지고 있다. 미처 완전히 적응하기 전에 또 새로운 기술이 나타난다. 충분한 시간을 주지 않는다. 자본의 권력과 통제라는 핵심적인 관계는 그대로 둔 채 계속해서 새것만을 촉진하는 형태이다. 짧은 주기에 적응하지 못한 자들은 사회의 이름으로 도태시킨다. 부적응에 대한 불안함은 만성적인 것이 되어간다. 더 편해지고 더 효율적인 기술. 자본주의는 그러한 기술의 발전을 통해 수많은 피지배층을 비슷하고 밋밋하게 만들어 간다. 이것이 혁신이다. 인간다운 인간으로 남을 수 있는 자들은 오로지 권력의 최상위층일 뿐이다. 정말이지 윗분들은 참 편해서 좋겠다.

 

<24/7 잠의 종말>의 저자인 조너선 크레리의 눈에는 위와 같이 잠의 종말이 자꾸 아른거렸던 모양이다. 얼마 전에 읽었던 <잠의 사생활>이 잠 그 현상 자체에 대한 호기심 탐구였다면, 이 책 <24/7 잠의 종말>은 자본주의와 기술의 발달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보고이다. 책에서는 일명 '테크노 자본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200페이지 정도로 분량 자체는 그리 많지 않지만, 한 줄 한 줄의 문장이 무척 깊고 무겁다. 또한 예술사를 전공한 저자의 이력답게 여러 가지 영화나 문학 작품, 학자들의 견해를 이용하여 저자의 주장과 시선을 여러 번 되풀이한다. 책에 등장하는 작품들을 접해본 경험이 있다면 한층 더 의미 있게 다가올 거라 생각한다. 내 경우에는 아쉽게도 단 한 편도 없었다. 필립 K라도 읽어봤다면 좋았을 것을..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몇몇 분들이 지적하셨던 것처럼 번역된 문장의 부자연스러운 호흡이 옥에 티가 됐다. 원문 자체가 심도 있기도 했겠지만, 계속해서 길어지고 또 난해하게 번역된, 마치 번역을 위해 번역된 듯한 문장은 많이 거슬린다. 책에 북마크가 많이 된 것은 곱씹고 넘어갈 부분이 많아서도 그랬지만, 집어놓지 않으면 당최 흐름을 따라갈 수 없었기에 그랬던 이유도 있다.

 

끝으로, 저자도, 역자도 <24/7 잠의 종말>의 말미에서 모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잠을 통해 깨어나야 한다는 것을, 우리를 옥죄여 오는 자본주의의 압력에 항거하기 위해서는 먼저 개인의 잠을 지켜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24/7. 기술도 좋고 시장도 좋지만 인간적인 인간이 없으면 그것은 과연 어떤 의미가 된다는 말인가? 항거에 동참하는 의미로 일요일인 오늘은 하루 종일 원 없이 잠들어 있었다. 허리가 다 뻐근하다. 그리고 혹시라도 책상에 앉아 꾸벅 조는 나의 모습을 본다면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나는 단순히 졸고 있는 게 아니라, 인류를 위해 자본주의에 맞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중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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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주식회사
사이먼 리치 지음, 이윤진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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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주식회사, 깃털처럼 가벼운 소설판 SNL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무척이나 좋아했었던 시절이 있다. <아버지들의 아버지>로 그의 책을 처음 접했고, 뒤이어 <나무>, <빠삐용>, <신>등 여러 가지 작품들을 거쳐가며 그가 만든 세계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거대한 틀 밖에서 틀 안의 인류를 관찰하는 그의 상상력을 따라가다 보면 때로는 심각한 미간이 되기도 했고, 때로는 피식거리는 입가가 되기도 했다. 가끔은 진부하기도 했지만 늘 그럴싸한 주인공들의 모험담은 언제나 기대만큼의 값은 했었다.

사이먼 리치의 <천국 주식회사>를 읽는 내내 나는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떠올랐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그의 작품들 중 <천사들의 제국>과 <신>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아둥바둥 살아가는 인간들을 저 멀리서 바라보는 절대자들의 시선. 신 혹은 천사라고들 하지만 더없이 인간적인 캐릭터들. 게다가 그들의 좌충우돌로 인해 종말의 위기를 맞는 지구까지. 정말 많은 요소들에서 그 둘은 닮아 있었다. 하지만 닮았다고 해서 이야기의 깊이마저 모두 같은 것은 아니었다. 닮긴 했는데 어딘지 억울하게 닮았다. SNL 작가라는 사이먼 리치의 이력답게, 그의 소설마저 딱 SNL 정도의 가벼움이었다. <천국 주식회사>는 <천사들의 제국>, <신>의 SNL 버전이라 이야기해도 어울릴듯싶다.

일단 내용이 가볍고 그다지 어렵지 않아 책장은 잘 넘어간다. '무겁고 의식 있는 소설만이 좋은 소설은 아니다'라는 의견에는 나 역시 동의한다. 읽는 즐거움 자체로도 소설은 본연의 의무를 다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는 SNL이 아닌 텍스트로 읽는 SNL은 느낌표보다는 물음표가, 'ㅎㅎㅎ'보다는 '...'이었다. 어떤 교훈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갈등이나 재미 역시 충분히 살리지 못했다는 생각이다. 빵 터지는 부분이 없었다. 소설 속 사이먼 리치의 코미디 방식은 비유적인 언어나 상황적인 아이러니보다는, 슬랩스틱이나 시각적인 부분에 많이 기대고 있다. 그 장면을 상상으로만 떠올려서 빵 터지기엔 내 창의성이 그리 뛰어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새삼 코미디언들의 위대함이 느껴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소설보다는 콩트나 시트콤으로 만났어야 할 이야기이다.

그냥 '단순하게 킬링타임으로 받아들이는 게 어때?'하고 묻는다면 뭐랄까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읽기라는 행위는 우리에게 생각보다 훨씬 많은 생각과 시간을 소모하게 한다는 것을. 그러니까 멍 때리며 보기는 쉬워도, 멍 때리며 읽기란 참 힘든 것임을 말이다. 만약 정말로 지구 종말이 다가오고,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게 된다면 개인적으로는 <천국 주식회사>를 읽기보다는 다시 한 번 베르베르의 책들을 읽기를 추천한다. 아니면 유튜브로 SNL을 찾아보는 쪽이 조금이나마 더 좋은 선택이 될 듯싶다. ​ 기적은 그리 쉽게, 그리고 그리 진부하게 일어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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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별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권미선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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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별, 너와 나의 거리를 가늠하다

 

 

 

 

 

 

토요일 저녁 하늘에는 초승달이 있었다. 그리 늦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달의 궤적은 빠르게 이동했다. 맥주집 테라스에서 감자튀김에 겨우 두 번째 잔을 비워냈을 뿐인데, 초승달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누군가에 대해서 이제는 좀 알 것 같다고 자신했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그 누군가는 친구이기도, 연인이기도 어쩌면 작가나 유명인사, 가족, 직장동료여도 상관없다. 먼 발치에서 출발한 객관적 물음표는 점차 그 대상에게 가까워지면서 주관적 느낌표로 변해갔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느낌표가 대상에 닿는 순간에야 나는 깨닫는다. 그 앎은 자신감이 아닌 자만감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오히려 객관적 물음표 시절보다 못한 앎이었다는 것도. 

 

볼라뇨의 소설, <먼 별>의 표지를 떨어내자 초승달이 떠있었다. <아이스링크>에 이어서는 두 번째로 보는 초승달이었다. 겨우 한 작품을 읽고 나서 나는 볼라뇨에 대한 아는 체를 했었지만, 앞서 말했듯 역시 자만이었다. <먼 별>은 <아이스링크>와는 닮은 듯 또 달랐다. 세 남자의 목소리보다는 어딘지 더 담담했던 '아르투로 벨라노'의 회상과 시선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내가 카를로스 비더를 처음으로 만난 것은 살바도르 아옌데가 칠레의 대통령이었던 1971년이나 1972년 무렵이었다." - 11p

 

 

 

 

 

 

개인적으로 칠레의 역사에 대해서는 깊게 공부한 적이 없어 잘 몰랐다. <먼 별>에서도 그 시절에 대한 묘사를 구구절절하게 하지는 않았다. 그저 '쿠데타', '숨어 있는 사람', '숨을 사람'이라는 단어들로 시대의 색채를 짐작했고. 칠레에서 떠날 수밖에 없었던 시인들과 군인들은 그 짐작에 대한 확신을 주었다. 책의 겉표지처럼 시대는 뿌옇고 어두웠다. 그래서였을까? 소설 속 주인공인 '아르투로 벨라노'에게는 그가 그렇게 알고 싶어 했던 '카를로스 비더'의 진실이 명확하게 보이지 않았다. 추적할 단서라고는 오로지 '비더'가 별처럼 빛났던 순간들뿐. 그 빛을 따라가 보아도 이미 진짜 '비더'는 그곳을 떠난 지 오래였다.


이는 '벨라노'와 같은 시대를 살아갔던 혹은 시작했던, <먼 별>속 다른 시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대에 맞서 투쟁했거나 혹은 예술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위해 살았거나, 모두가 저마다의 빛을 잠깐씩 발하고는 사라질 뿐이다. 옛 동료들의 반짝임 속에 오히려 빛나지 않았던 '벨라노'의 평범함이 내 눈에는 편안했다. 원래 같은 밝기로는 그 빛을 가늠할 수가 없게 마련이다. 역사 속 철저한 주변인들, 어두운 밤을 올려봐야만 했던 수많은 시민들의 눈을 '벨라노'는 대표한다. 덕분에 나는 '벨라노'와 '카를로스 비더'와의 거리, '벨라노'와 70년대 칠레와의 거리, '벨라노'와 '문학'과의 거리 등, <먼 별>을 통해 수많은 거리들을 상대적으로 가늠해 볼 수 있었다.


 

 

"재판은 결코 열리지 않는다. 아주 오래전에 자취를 감춰 갈수록 기억이 희미해지는 연쇄 살인범이라는 인물에게 관심을 기울이기에는 국내 문제들이 너무 산재해 있다. 칠레는 그를 잊는다." - 151p

 

 

 

 

시간이 지나면 초승달은 내려가고, 다시 해가 떠오르게 된다. 영원하고 절대적인 시대는 없다. 권력의 축은 결국 움직이게 된다. 결말에 이르러 <먼 별>은 시대가 빚어낸 개인의 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여지를 준다. 바뀐 시대의 국가는 직접 나서서 심판하지 않았다.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내비쳤을 뿐, 결국 심판을 내렸던 것은 국가가 아닌 어느 개인이었다. (소설 속에서는 의문의 누군가) 그렇다면 그 죄는 과연 여전히 유효하다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비더'를 심판하려 했던 자는 그 자체로 정의로웠다 할 수 있을까? '루이스 타글레'와 '카를로스 비더'는 동일한 개인인가? 

 

이와 같이 볼라뇨의 소설, <먼 별>은 시대를 거쳐간 개인을 '문학적'으로, '정치적'으로 분리하고 또다시 이어붙이는 일련의 작업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좋든 싫든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어떠한 방식으로든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 삶은 믿는 대로 사는 것이다. 어차피 빛을 따라간 곳에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그 빛의 과거일 뿐이니까. 평생토록 붙어있지 않는 한, 별은 멀리서도 가까이서도 그 진실을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가늠하고 또 가늠해야 한다. 너와 나의 거리도, 나와 이 시대의 거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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