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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걸그룹으로 산다는 것은 - 걸그룹 소녀들에게 하이힐 대신 운동화를 준 매니저의 이야기
이학준 지음 / 아우름(Aurum) / 2014년 12월
평점 :
대한민국에서 걸그룹으로
산다는 것은,
노출보다 안쓰러운 아이돌
산업의 민낯

대한민국은 요즘 90년대 가요에 대한 향수로 물들어있다. 무한도전의
토토가가 한바탕 휩쓸고 간지 벌써 몇 주가 흘렀지만, 여전히 각종 음원사이트의 TOP 100 차트에는 터보, S.E.S, 엄정화의 곡들이
한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다. 카페를 가도, 식당을 가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벅찬 감동에 젖어있는 몇몇 3,40대 네티즌들은 이렇게 말한다.
역시 가요는 90년대가 최고였다고. 요즘 가수들은 흥도, 실력도 그저 그렇지만 도대체가 개성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고 말이다. 한술 더 떠
몇몇은 이를 통해 세대의 깊이마저 논의한다. 이러한 의견에 대해 어느 정도는 동의할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많은 부분에서 굉장히 편향적인
시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90년대 가요들이라고
항상 찬양만 받아왔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도 그 시절엔 윗세대의 못마땅한 눈총을 받아왔다. '정신없다. 하나도 못 알아먹겠다. 도무지 따라 부를
수가 없다. 양아치 음악이다.' 등의 비난에 맞서, 문화를 문화 그 자체로 봐달라며 항거하던 90년대 가요의 팬들이다. 그랬던 그들이 이제
'윗세대'의 역할을 자청하고 있다. 레퍼토리 역시 크게 새롭지 않다. 그들은 요즘 가요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정신없다. 무슨 가사인지 이해할
수 없다. 도무지 따라 부를 수가 없다. 벗을 줄만 아는 싸구려 음악이다.' 하고 말이다.
그런데 정말 그 이야기들이 다 맞는
이야기일까? 90년대 가수들과 요즘? 가수들이 그렇게나 역량의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일까? 가수 개개인을 살펴보면 오히려 그런 주장은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 스포츠계가 그러했고 다른 문화 산업들이 그러했듯 개개인의 하드웨어는 확실히 발전하고 있다. 또한 방송과 매체의 발달로
이제는 누구나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오히려 더 어리고 더 잘 다듬어진 상태의 원석들이 넘치는 시대이다. 90년대와 2010년대
가수 중 누가 더 우월한지를 가린다는 것 자체는 사실 큰 의미가 없다. 팔은 안으로 굽게 마련이다. 나와 함께 전성기를 누렸던 가수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리오넬 메시와 마라도나 둘 중 누가 더 훌륭한 축구선수였는가를 묻는 질문과 마찬가지이다.
굳이 비교해야겠다면 가수 개개인이 아니라
시스템을 살펴봐야 한다. 가요계는 속도와 효율성만을 좇아가는 대한민국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대중은 매년 더 강렬하고 자극적인 것을
원한다. 다양한 개성과 장르의 가수들이 90년대 이후 갑자기 씨가 마른 것은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노래 부르고 있다. 단지 돈이 되지 않아
최전선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아이돌, 전자음, 후크송으로 대변되는 2010년대의 가요계는 우리 사회의 '적자생존'이 어떤 의미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90년대 가요는 90년대의 방식으로 소비에 최적화되었던 것이고, 지금의 가요는 지금의 방식으로 소비에 최적화되어가는 것일 뿐이다. 그것이
바로 문화이다. 요즘 가요에 '낭만'이 없다며 혀를 차기 전에 요즘 시대의 '낭만'이 어디로 갔는지를 먼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종사자들에게만
책임을 전가할 문제는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걸그룹으로 산다는
것은>은 이러한 '아이돌 산업'의 민낯을 솔직하게 드러낸 책이다. 저자 이학준 씨와 그의 동료들은 아이돌 그룹의 데뷔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담아내고자 1년 동안 '나인뮤지스'의 매니저 입장으로 기획사 '스타제국'을 드나들었다. 소위 3대 기획사라 불리는 SM, YG, JYP는
아이돌의 신비감을 이유로 제안을 거절했다. 처음부터 그 거절을 예상했던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그것이 다큐멘터리에는 약이 되었다.
나인뮤지스는 데뷔와
동시에 A급이 되어버리는 대형 기획사의 아이돌들과는 출발점이 달랐다. 그녀들은 철저하게 시장의 반응에 따라, 그리고 기획사의 전략에 따라 성패가
갈리는 걸그룹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나인뮤지스와 함께한 저자의 일기장에는 연예계의 '화려함'보다는 '냉정함'이 더 많이 묻어 나왔고, 늘씬한
여자들의 속살을 보고도 '섹시함'보다는 '안쓰러움'이라는 감정이 먼저 복받쳐 올랐다.
인간적인 소녀들이 있기 전에
'나인뮤지스'라는 걸그룹이 있었고, 인간적인 매니저가 있기 전에 '나인뮤지스'라는 걸그룹이 있었다. 모든 것은 철저히 시스템대로 굴러갔다. 다만
시스템의 방향은 언제든 바뀔 수 있었고, 그 방향에 따라 무엇이든 하루아침만에 달라질 수 있었다. 리더가 교체되고, 멤버가 방출되어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모두들 지나간다. 누군가는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언제나 대기하고 있다. 결국은 모두가 '나인뮤지스'의 부품처럼 소비되는
것이다. 나아가 그렇게 조립된 '나인뮤지스'역시 '아이돌 산업'의 부품으로 또 한 차례 소비되고 있었다. 이러한 잔혹한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누구 하나 쉽게 털고 떠나지 못하는 이유. 마치 데자부처럼 낯설지 않았던 그 모습에 책을 읽는 도중 가슴이 짠해지기도 했다.
"재능이 없다면 그저 버텨라. 성실하면 중간은 간다." -
155p
위와 같은 선배의 따듯한 조언에 저자는
?기자 생활 초년을 버텨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같은 조언을 나인뮤지스의 멤버들에게 전해주지는 못했다. 대신 매니저 생활을 마치던 날. 저자는
멤버들에게 마지막 선물로 운동화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하이힐에서
잠시라도 내려와 편히 쉬라고 준비한 거야. 비싼 건 아니지만 너희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어." -
267p
저자는 그녀들에게 '아이돌 산업'이라는
시스템에 맞서 무조건적으로 버티는 삶을 권하는 대신 작은 쉼표를 찍어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마찬가지로 이 책 <대한민국에서 걸그룹으로
산다는 것은>도 그녀들을 위한 두 번째 쉼표가 될 것이다. 다행히도 책이 출간된 지금까지 걸그룹 '나인뮤지스'는 사라지지 않고 가요계에
살아남아있다.
문득 외로웠던 나의 군 시절을 버티게
해줬던 수많은 걸그룹들도 생각이 난다. 소녀시대, 카라, f(x), 다비치, 브라운아이드걸스, 애프터스쿨, 레인보우, 포미닛, 미스에이,
시크릿, 원더걸스, HAM, 브랜뉴 데이 등 대충 생각나는 대로만 적어도 진짜 많다. 그녀들 또한 빛나는 별이 되기 위해 고난의 시간을 견뎌냈을
것이다. 다들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걱정 중 하나가 연예인 걱정이라고 누군가 말을 하던데... 오늘만큼은
주제넘게 걱정을 해본다. 대한민국에서 걸그룹으로 산다는 것은, 결국 대한민국에서 젊은이로 산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