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조선희 지음 / 네오픽션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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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다섯 살, 생의 황혼기에 행운은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의사의 운동처방에 따라 이틀에 한 번씩 봉산을 산책 삼아 오르내린다. 지난주, 해발고도 200여 미터의 전망대에 도착해 멍을 때리려고 애 쓰다 내려오면서, 충동적으로 산 복권이 당첨되었다. 아직 아무에게도 당첨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내며 지진 발생 재난문자가 울린다. 딸 이레의 전화 안부다. 세상이 쪼개지는 소리에 눈앞이 아득해지는데 전망대로 다시 오른다. 세상이 파괴되는 소리를 들으며 잠에 빠져든다. 요란한 빗소리에 깨고보니 갈증이 난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비는 계속되고 닷새째 되는 날은 완전히 지친다.

전망대에 나가 서니 물은 거짓말처럼 빠졌지만 내려다본 광경은 엉망이다. 잔해 사이를 신중하게 통과해 큰 도로를 찾아 내려간다. 사람도 차도 보이지 않는다. 지난 며칠간 내린 비가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을 몽땅 쓸어 넣었을까. 까마득한 균열을 향해 외쳐 보지만 아무도 없다. 뭐야, 유일한 생존자인가?

허기를 채우고, 잠을 자고, 열흘째 눈을 떴을 때 이대로 있으면 서서히 죽게 될 것을 예감한다. 이레와 나눴던 소소한 대화와 웃음소리가 바로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까 몹시 불안하고 우울해진다. 내가 알던 진입로는 다 끊겼고, 다른 길도 찾을 수 없다. 이 상황이 바뀌지 않을 테니 아침에 부디 죽어 있기를.

숨이 붙어있는 한, 살아야 한다. 폐허의 잔해 속에서 물건들을 뒤지는 자신이 의연하다고 생각한다. 이마트와 다이소를 돌며 물건들을 카트에 싣고 전망대 화장실로 옮긴다. 나름 꾸며놓으니 보금자리가 만들어졌다.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지 문득 의아해진다. 산에서 주운 소형 라디오는 카세트테이프가 들어간 구형이다.

안에 든 테이프는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였다. 인류 마지막 생존자일지도, 머잖아 죽음을 앞뒀을지도 모르는 내 마음은 눈부신 선율과 가사에 사무치게 담겼다. 더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이 세상에서 이레를 생각한다. 그렇게 3년이 흘러 예순여덟이 된다. 산자락 텃밭은 이제 모두 내 것이고 내 책임이다. 잘해낼 수 있을까.

텃밭에서 뭘 길러 먹어본 적도 없고, 생존에 딱히 적극적으로 임할 것 같지도 않은 나라면..혼자 먹고, 자고, 생존하기가 가능키나 할까. 김치를 찾아 절을 떠올리고 길을 나서는데 손바닥만 한 크기의 먹바퀴벌레 뭐니..손잡이가 달린 바닥문을 열고 김치를 발견한다.

처마 아래 거미줄이 보인다. 거미는 또 얼마나 커졌으려나. 지렁이는 뱀만 하고, 뱀은 새끼 악어만 하다. 이런저런 생명체들이 돌아오고 있다. 2년이 더 지나자 독수리만한 잠자리들이 돌아다닌다. 송충이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툭툭 떨어진다. 지구 멸망후 아마존의 탄생인가.

일흔이 넘은 나이에 아이처럼 산을 돌아본다. 그날의 재난에서 7년을 살게 한 산을 내려와 집을 찾아낸다. 그렇게 매년 산을 오가며 유목 생활을 한다. 일흔네 살이 되어 밭일보다 벌레들을 싸질러 치우는 일에 더 많은 체력을 소모한다. 이제는 여든두 살이다. 이레는 쉰두 살이다. 먹바퀴벌레는 팔뚝만큼 커졌다.

자연인만 찍는 줄 알았더니 아니다. 드디어 고구마밭에서 노바가 등장한다. 여전히 문명인의 삶을 누리고 있는 캠핑카의 주인 노바는 전기과를 졸업하고 태양광 배터리 회사를 다녔다고 한다. 생존 게임에서 유리한 노바의 등장에 삶이 풍족하고 따뜻해진다. 그것도 잠시 안하무인 빌런이 등장한다.

윤주의 등장으로 뭔가 더 재밌어지긴 했다. 생존자가 늘고, 시간은 흐르고, 치아대신 뭔가 다른 것이 생기고..248세가 된 혜령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이레를 만나러가기 위한 선택을 하기까지 200년이 걸린다. 세상은 멸망했지만, 꿈과 희망의 불씨가 남아있는 한 움직이게 한다. 태어나 처음 사본 복권이 당첨될 확률과 당첨되고 지구가 멸망할 확률..그 어떤 것도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하지만 삶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럼 어쩌겠나, 살아갈 이유가 있다면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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