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위화 지음, 백원담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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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작은 가볍게 읽었다. 우리 현실과 그리 다르지 않은 이념의 편가르기 시절도 그렇고, 농촌 마을과 성안도 같았다. 그저 살기 위해, 하루하루 견디는 고난한 삶도 닮았다. 양반과 같은 대지주들도 같았고, 도박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는 것도 낯설지 않다. 국민당군과 해방군의 전쟁도 우리의 지난날과 같았고, 완장을 차고 군부독재의 '개'가 된 저들의 모습도 그리 오래되지 않은 우리의 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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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 나가면서 점점 먹먹해졌다. 그리고 눈물이 나왔다. 그렇게 어이없이 쉽게 무너지고, 예측할 수없이 운명이 바뀌고, 모든 불행이 한꺼번에 오는지. 젊은 시절 방탕한 삶에 대한 징벌인지 아니면 운명이 그를 끝없이 시험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눈물이 마르고, 분노할 힘조차 없어질 정도로 감당하기도, 거역하기도 어려운 '푸구이' 삶의 이야기가 운명에 순응하며 살아온, 그리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소시민의 슬픔을 절절하게,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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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개인과 그 운명의 우정을 이야기했는데 그렇게 운명과 우정을 나누는 것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서로 미우나 고우나 같이 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순응하고 인내하라는 것인데, 많은 경험과 지혜를 가진 사람도 운명에 대해서는 원망하고 증오하는 미숙한 감정이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내 운명은 내가 만들고 바꾼다'라고 생각하고 실천하는 나의 운명이 운명이라면 내가 운명을 원망하고 증오하는 감정은 소모적이고 의미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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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구이'와 '자전' 그리고 '춘성'과 '룽얼'의 인생은 어떠한가? '푸구이'가 도박을 안 했으면 가산을 탕진하지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렇게 돌아가시지도 않고, 전쟁터에 끌려가지도 않았을까? 그렇다면 '펑샤'는 벙어리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유칭'은 피를 다 뽑히지 않아서 죽지도 않았을까?

'자전'은 '푸구이'에게 돌아오지 않고 친정에 가서 행복하게 살았을까? '춘성'은 '푸구이'와 같이 고향에 갔다면 가난하지만 성실하게 살아서 고위 간부가 되지 않고 자살하지도 않았을까? '룽얼'은 속임수로 '푸구이'의 재산을 가로채지 않았다면 지주가 되지도 않았고 총살당하지도 않았을까? 'if', 'if', '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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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푸구이'가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하지 않았더라도 해방군에게 모든 재산을 압수당하고 소작농으로 전락했을 것이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에는 악덕 지주로 총살을 당했을 수도 있다. 그러면 '룽얼'의 운명도 바뀔 것이고, '춘성'과는 인연이 없을 것이다. '만약에'는 '만약에'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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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슬픔을 견디고 살아간다는 것이 인생이고, 운명과의 우정이다. 꽃길을 걷는 것도 진흙탕을 걷는 것도 운명이고, 한 점 흙으로 돌아가는 길도 같이 동행하는 것이 운명이다. 인생은 운명과 애증의 관계 속에서 고난을 견디고 인내하며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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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생>이 눈물의 넓고 풍부한 의미와 절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믿는다.

한국어판 서문 중에서 p 9

1. '유칭'의 죽음도 '자전'의 죽음도 마음 아팠고 눈물이 날 정도였지만, '펑샤'의 인생은 정말 가슴 먹먹하다. 벙어리로 산 세월도, '얼시'와의 짧은 결혼 생활도, 열두세 살 어린 나이에 남의 집으로 갈 때, 그리고 다시 돌아올 때 모두 마음 아팠다. 그리고 '쿠건'을 낳고 죽은 것까지, '펑샤'의 인생은 어찌 그리 박한지... 내 딸이 생각나서 더욱 마음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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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운명과의 우정, 치열하게 싸우면서 진흙탕도 갈이 뒹굴고 무조건적인 인내나 체념이 아닌 운명을 인정하고 극복해나가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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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시골의사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
프란츠 카프카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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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중, 단편 모음집이다. 익히 <변신>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으나,- 알고 있다고 하나 깊이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 역시 어렵다. 난해하다.

기괴하고 슬프기는 하나 작가가 주는 메시지가 가장 선명하고 잘 읽히는 작품은 역시 <변신>이다. 아버지를 대신해 집안의 경제를 책임지는 아들 '그레고르 잠자'는 실질적인 가장이다. 자신이 아니면 부모와 사랑하는 누이를 경제적으로 돌볼 사람은 없다. 그 사실은 그에게 책임감과 동시에 극심한 부담이다. 그는 5년 동안 아파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힘들어도 회사를 쉬는 경우는 없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역겹고 흉측한 벌레가 되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래도 아들이고 오빠였던 벌레는 차츰 그들에게서 멀어지다 쓸쓸하게 죽는다. 그리고 그 사체는 가정부가 처리한다. '그레고르 잠자'가 계속 집안의 가장 노릇을 했다면 몰랐을 나머지 가족들의 생활력은 활기차고 희망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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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간에도 서로의 이익을 위한 계산적인 행태는 이미 만연되어 있고, 그다지 새삼스럽지도 않다. 다만 드러내어 말하지 않을 뿐. 카프카는 이미 이때부터 그런 사회 - 자본주의 -의 삭막한 비정함을 이 소설 <변신>에서 말했던 것이 아닐지...

내가 가장 사랑하는 가족, 나의 근간이 되는 가정에서 경제적인 면이 사랑의 크기와 밀도를 좌우한다는 점이 심히 슬프다. 마치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로 자기 위안을 삼는 가족들이 차마 말로는 꺼내지 못하는 경제적인 숫자의 증감을 생각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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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의 결말은 당혹스럽고, <시골의사>의 판타지스러움과 난해함은 결말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굴>은 '편집증'의 증상인 심한 걱정과 두려움으로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심리상태를 표현한 것일 수도, 아니면 본인 자신의 심리상태를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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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의 근심>이라는 작품은 '오드라덱(Odradek)'이라는 가상의? 존재에 대한 불안감과 근심을 나타낸 작품이다. 그런데 과연 '오드라덱'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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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양장) - 빅터 프랭클의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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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의학박사, 철학박사, 정신과 의사 등 여러 가지 직함의 유대인인 '빅터 프랭클(Viktor E. Frankl)'의 자전적인 수용소에서의 체험이 1부이고, 2부는 수용소에서 깨달은 인간 본연의 의미, 즉 삶의 의미를 새로운 정신요법인 '로고테라피(Logotherapy)'를 통해 새로운 정신질환의 치료를 고안한 저자의 이론적인 개념을 정리했고, 이어 3부는 1983년 서독에서 열린 제3차 로고테라피 세계대회에서의 발표했던 내용의 요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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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그가 독창적으로 고안해낸 '로고테라피' 얘기에 앞서 수용소에서의 자전적인 체험에 대해서 말하자면, 우선 그도 수용소에서의 인간 이하의 취급과 잔인한 체벌 및 가스실의 집단 학살에 대해서는 자세한 언급은 없다. 이미 여러 가지 매체를 통해, 다른 체험자들의 증언에 의해 나치의 만행과 인간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가 하는 집단 광기와 같은 이야기들은 이미 차고 넘쳐 굳이 재탕, 삼탕 할 필요도 없지만, 그 자신의 기억 속에 다시 상기하고 싶지도 않을 거란 이유도 있을 거라 생각된다. 그러하더라도 그러한 이야기들을 다 빼고서는 수용소의 진실을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저자는 그런 고통과 - 육체적은 물론 심리적인 - 인간 이하 짐승, 그것도 이미 죽어있는 고깃덩어리와 같은 취급에 대해서 담담하게 서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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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장교의 손가락 움직임에 의해 삶과 죽음이 갈리고, 병에 걸리거나 다치기라도 하면 다시 삶과 죽음의 문턱에서 죽음의 길로 간다. 수감자 중에 다른 수감자를 감시하고 나치 대원보다 더 악랄하게 동료 수감자를 가혹하게 괴롭히는 '카포'라는 계급이 있고, - 물론 악랄하거나 가혹하게 수감자를 괴롭히지 못하면 다시 쫓겨난다 - 카포가 되진 못했지만 수용소 생활에 지칠 대로 지쳐 이성과 인성이 없어진 수감자들은 자신이 살기 위해 다른 수감자의 목숨 하나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고, 심지어는 친구도 팔아넘길 수 있는 상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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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 생활에 대해 저자가 얘기하는 수감자의 심리는 첫 번째는 '충격'이고, 두 번째는 '무감각'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단계는 석방되어 자유를 얻은 후에 여러 가지 심리적인 치료를 요하는 개개인의 상태이다. 특히 세 번째 단계는 사람에 따라서 감정이라든가 생각이라는 것을 다시 배워야 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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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단계인 '충격'에 대해서는 자유를 잃어버린 - 특히 육체적인 - 모든 일련의 일들이다. 개인의 소지품을 비롯해서 가족을 포함한 모든 인간관계까지 소멸된다. 정신적인 자유도 육체의 혹독한 시련과 혹사가 누적되면서 대부분의 수감자들은 소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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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단계인 '무감각'은 인간의 마지막 남은 양심도 마비시킨다. 시체를 보는 인간적인 시선은 없다. 그저 나와 관계없는 시체일 뿐, 시체가 남긴 음식이 있으면 가져가고, 자신의 신발보다 좋아 보이면 가져가는 이제는 썩어갈 존재일 뿐이다. 저자도 자신이 먹고 있는 수프에 집중할 뿐, 두 시간 전에 이야기를 나누었던 살아있던 인간은 이미 잊혔다. 아무런 감정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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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수감자들과 다르지 않았던 저자를 일깨운 것은 한 수감자가 이야기 한 아내의 존재이다. 그는 아내를 생각해 냈고 마음속으로 아내와 대화를 나누며 수용소에서의 생활을 아름다움에 비유했다. 인식의 변환 또는 의식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어느 날 저녁 피곤에 지쳐 막사 바닥에 앉아 수프를 먹으며 그와 동료들은 해가 지는 풍경에서 서쪽에 빛나는 구름을 보았고, 짙은 청색에서 핏빛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을 보았다. 그때 누군가가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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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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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그는 이제 무감각한 상태에서 벗어나 그의 정신요법인 '로고테라피 학파'의 이론적인 것을 정립할 수 있었다. 그가 수용소에서 느낀 진리는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즉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은 강제수용소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는 그의 결론이다.

그는 고통과 시련을 극복하는 것이 삶의 중요한 의미라고 말한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믿음이 없이 무너져 가는 수용소의 수감자들의 - 끝을 알 수 없는 일시적 삶의 수감자들 - 끝은 죽음뿐이라고 말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그는 니체의 말을 들어 살아야 할 이유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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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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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고테라피 -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에 이은 정신요법 제3학파라 불린다. 로고스(Logos)는 '의미'를 뜻하는 그리스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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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로고테라피의 기본 개념에서 저자는 기존의 정신분석과 비교해 볼 때, 로고테라피가 덜 회고적이고, 자기 성찰을 덜 요구하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로고테라피에서는 환자가 삶의 의미와 직접 대면하게 하고, 스스로 삶의 의미를 깨치도록 만드는 것이며 이것이 환자의 능력을 향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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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두 번째로 살고 있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지금 당신이 막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 번째 인생에서 이미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p 182 로고테라피의 행동 강령

로고테라피는 가르침도 아니고 설교도 아니다. 도덕적 훈계와 거리가 먼 것처럼 논리적 추론과도 거리가 멀다. 비유를 하자면 로고테라피 치료사가 하는 일은 화가보다는 안과 의사가 하는 일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화가는 자기 눈에 비친 세상의 모습을 우리에게 전하려고 애쓴다. 반면에 안과 의사는 우리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도록 해주려고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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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고테라피에 의하면 삶의 의미를 세 가지 방식으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첫 번째는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두 번째는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서, 세 번째는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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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의 방식이 바로 선이나 진리, 아름다움을 체험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고, 세 번째가 시련을 통해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이 밖에 '초의미', '삶의 일회성', 기법으로서의 '역설의도', '범결정론에 대한 비판' 등을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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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저자가 정의한 정신의학에 대한 글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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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내면에 두 개의 잠재력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그중 어떤 것을 취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그 사람의 의지에 달려 있다.(···)

인간은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을 만든 존재이자 또한 의연하게 가스실로 들어가면서 입으로 주기도문이나 셰마 이스라엘을 외울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p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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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결혼 시키기
앤 패디먼 지음, 정영목 옮김 / 지호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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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 Libris - 그 책의 소장자, 책 소유자의 이름이나 문장을 넣어 책표지 안쪽에 붙이는 장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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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서가, 즉 책을 사랑하는 사람의 책 이야기이다. 총 18편의 에세이로 이루어진 이 책은 저자가 의회 도서관에서 발행하는 잡지 <시빌리제이션>에 쓴 칼럼을 모은 책이다. 책을 보는 것을 넘어서 책을 사랑하고, 수집하고, 보관하고, 책에 대한 모든 애정의 형태를 딱딱한 이론적인 방식으로의 설명이 아닌 생활 속에 그리고 그 자신의 전 생애에 걸친 책 이야기이다. 그녀의 부모와 남편, 아이들까지 동원된 책에 대한 여러 가지 에피소드는 과연 책에, 그 활자들에 이들만큼의 애정을 쏟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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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대하는 태도, 보관하는 법, 독서의 방법, 서재 꾸미기, 책 분류(특히 이 부분은 개인차가 크다), 이러한 것들에 대한 저자와 저자의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과연 책을 읽기만 하는 사람과(물론 많이 읽는 다독가) 책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이(애서가이며 장서가)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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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책 읽기는(책을 대하는 태도 또는 책을 읽을 때 하는 행동들 모두) - 그리고 주변 사람들 대부분 - 그녀가 분류하는 방식으로 하면 육체적인 사랑의 신봉자이다. 반대는 궁정식 사랑이다. 책에 쓰여있는 '책의 말'은 거룩하지만, 그 말을 담고 있는 종이, 천, 판지, 풀, 실, 잉크는 단순한 도구라고 한다. 그래서 원하는 대로, 필요한 대로 책을 다루는 것은 신성 모독이 아니라는 말이며 친근함의 표시라는 것이다. 나 역시 책 자체에 메모도 하고 형광펜으로 칠하고 하는 일련의 일들이 저자의 생각에 어느 정도는 동의를 하는 바이다. 물론 나는 경제적인 여유가 된다면 같은 책을 2권 소유하여 한 권은 마음껏 다루고 한 권은 고이 궁정식으로 예의를 갖추어 보관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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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련의 에피소드를 보면 이들 가족(패디먼 가족)의 책 중독과 활자 중독, 그리고 새로운 단어에 대한 궁극적인 집착은 일반적인 평범한 사람들에겐 부담도 되고 호불호가 많이 갈리겠지만, 다른 어떤 습관이나 행동으로 인한 민폐도 아닌 독서와 책 수집은 바람직한 습관이며 취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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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 와인보다는 헌 책이 - 아마도 희귀 책이겠지만 - 더 소중한 사람, 양 부모 모두 작가이며 오빠도 애서가, 심지어는 남편까지도 책을 사랑하는 작가인 이 여자 작가의 책 사랑이 주변 환경으로 보아 의심할 여지없이 당연한 것이라는 게 나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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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18편의 에세이에 언급된 모든 문인들, 애서가들에 대한 그녀의 깊은 지식 - 물론 나는 거의 모르는 사람이다 -에 찬사를 보내고, 전부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세련된 그녀의 비유, 유머 코드에도 경외감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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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걸리버 여행기 (무삭제 완역본) - 1726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ㅣ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조너선 스위프트 지음, 류경희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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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걸리버 여행기, 그 당시 오리저널 초판본의 표지 디자인과 책에 삽입된 삽화 역시 오리저널이다. 무삭제 완역판은 물론이다.

우리가 어린 시절 읽었던 판타지 동화인 걸리버 여행기는 잊고 - 소인국과 거인국에 간 사실을 제외하면 - 이 책을 읽어야 한다. 물론 걸리버가 여행한 나라들이 지금 시절에도 공상과학이나 판타지적인 요소가 있는 가상의 나라이긴 하지만, 혹시 아는가? 우리가 보는 세상은 티끌과도 같은 아주 작은 일부이며 그마저도 다 보지 못하는 미개한 지구인의 시각일 뿐, 범우주적이고 상상을 초월하는 다른 세상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있다고 믿는다. 사후세계도, 4차원도 믿듯이. 나아가 윤회도 믿음직스러운 세계관이다. 종교관이라기보다는 범우주적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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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가면, 여타 다른 책 소개나 리뷰와 마찬가지로 18세기 영국의 작가인 저자가 느낀 사회 부조리, 이성을 잃은 인간의 추악한 본성, 동물보다 못한 인간의 모든 나쁜 점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자학하는 내용이다. 작가 자신의 모습인듯한 걸리버라는 주인공을 내세운 여행기로서 '릴리펏'이라는 소인국, '브롭딩낵'이라는 거인국, 그리고 '라퓨타'(자력으로 떠 있는 인공의 섬 모양의 나라), '바니발비', '그럽덥드립', '럭낵', '일본'(이 나라는 왜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내용도 거의 없고, 저자가 좋아하는 또는 관심 있는 나라인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 그리고 저자가 가장 강조하는 또는 이상향이라고 생각하는 '휘넘국' 여행기로 이 책은, 이 여행기는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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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릴리펏 여행기 -

첫 번째 여행지로 다음 여행지들과 마찬가지로 불의의 사고 또는 강제로 남겨진 곳에서의 여행지이다. 이곳은 소인국이다. 우리가 익히 알듯이 해변가에서 정신을 잃은 걸리버를 소인국의 병사들이 땅에 결박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어렸을 때 가장 재미있어 한 부분인 상대 국의 전함을 다 묶어서 끌고 가는 내용도 나온다. 이곳, 소인국에서 걸리버를 통해 작가는 그 당시 영국의 당파 싸움, 토리당과 휘그당 간의 싸움을 풍자한다. 또한 다음 여행지인 거인국에서 거인들을 묘사하는 불결함과 고약한 냄새 그리고 온갖 역겨움에 대한 반대급부로 걸리버는 소인들의 아름다움을 - 물론 릴리펏에 있는 동안에는 많이 느끼지는 못했지만 - 적어도 육체적인 겉모습에서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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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건 줄타기와 장대 뛰어넘기 놀이 - 군주의 오락이며 고위 공직자들에게는 군주에게 잘 보이려는 놀이이다 - 로 얻은 실로 허리를 장식하는 정부 고위 관료들의 우스꽝스러운 행태, 바다 건너 강력한 힘을 지닌 적국(프랑스), 계란을 어느 쪽을 깨서 먹어야 하는지에 대한 싸움(종교분쟁), 높은 굽 지지당인 트라멕산당(토리당), 낮은 굽 지지당인 슬라멕산당(휘그당) 등 그 당시 영국의 군주와 정부 고위 공직자들 간의 부조리한 권력 나눔과 국내 당파 싸움, 국제 정세 그리고 유럽에서의 종교 분쟁에 대해 풍자하고 또한 저자가 말하고 싶은 온갖 부조리에 대한 비판과 인간이 권력과 물질로 인해 변하고 파괴되는 것에 대한 우려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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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중간중간에는 저자가 바라는 사회의 법과 관습에 대한 내용들이 있는데 여기 릴리펏에서도 그러한 내용이 있다. 그 내용은 '사기죄'를 '절도죄'보다 더 중죄로 생각해서, 반드시 사형으로 다스렸다는 내용과 공직에 적임자를 뽑을 때는 능력보다는 '도덕성'을 우선시한다는 내용 등이 있다. 하지만 이곳 '릴리펏'에서도 이러한 법과 관습은 예전의 본래의 제도일 뿐 지금은 온갖 부정부패와 파당과 당파싸움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부끄러운 나라가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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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롭딩낵 여행기 -

다시 나간 바다에서 물을 구하려 들렸던 섬에 고립된 걸리버는 거인국의 마스코트가 된다. 앞서 소인국에서 말했듯이 상대적으로 소인이 되어버린("비교를 통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것도 크거나 작다고 말할 수 없다"라는 철학자의 말이 인용되었다) 걸리버의 시각에서 본 인간의 더럽고 징그러운 피부와 냄새나는 몸, 종양 덩어리의 기괴한 모습과 옷 위를 기어다니는 '이'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 실제로 '이'를 몇만 배? 크게 한다면 얼마나 징그럽고 위협적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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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펏에서의 풍자는 이곳, 거인국 왕과의 대화를 통한 내용에 비하면 아주 얌전한 내용으로 애교 수준의 비교 및 풍자이다. 거인국 왕이 걸리버에게 들은 영국과 유럽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과 역사에 대한 비판은 너무 지독해서 같은 인간으로 연대책임을 져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 책임을 질 수 있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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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내용은,

1. 한 귀족 가문이 멸망하면 상원은 어떤 식으로 충원되는지, 그런 승진의 원인이 군주의 기분 상태나 왕실의 귀부인이나 총리대신에게 바치는 뇌물은 아닌지, 또는 대중들의 이익에 반하거나 정당을 강화시키려는 음모는 아닌지.

2. 성직자들은 종교 문제에 대한 그들의 지식과 신성한 생활 태도 때문에 계속 승진하는 것인지, 그들이 일반 성직자였을 때 시류에 영합하던 자들은 아닌지, 또 어떤 귀족에게 예속된 비굴한 예배당 목사로서 상원에 진출한 것은 아닌지.

3. 하원 의원을 선출하는 데 어떠한 방법이 사용되는지, 돈 많은 이방인이 유권자들을 매수해서 선출되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의원이 된 다음에는 지불한 비용과 노고를 되찾겠다는 생각에 부패한 대신들과 공모하여 공익을 희생시키는 것은 아닌지.

4. 기타 사법부에 대한 비판과 재정 관리에 대한 내용. 엄청나게 비용이 많이 드는 대규모 전쟁을 비판한다. 독재 또는 약한 정부에 견해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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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거인국의 왕은 역사적인 사건들에 대한 걸리버의 설명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그 역사가 음모, 반란, 살인, 대량 학살, 혁명, 추방의 집합물에 불과하며 탐욕, 파당, 위선, 배신, 잔인, 분노, 광기, 증오, 질투, 정욕, 악의, 야망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최악의 결과라고 말하며 이렇게 결론 내린다. "너의 나라 사람들은 자연이 이 세상을 기어 다니게 허락해 준 벌레들 중에서 가장 악독한 해충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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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지독한 독설이다. 저자의 약력대로 당파 싸움에 밀려 한직으로 물러난 저자의 분노와 자조가 이러한 독설을, 자신을 포함한 인간의 추악한 권력욕에 대한 자학과 함께 어우러져 쓴 여행기라 생각된다.

 

 

- 라퓨타, 바니발비, 그럽덥드립, 럭낵, 일본 여행기 -

세 번째 여행은 해적들에게 잡혀서 죽음을 모면하고 내버려진 섬에서의 이야기이다. 이 여행기에는 여러 나라가 나오는데 각각의 나라에서도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작가의 해학과 풍자가 가득하다. 일본 여행기는 아무리 봐도 왜 끼워져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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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나라인 '라퓨타'(하늘을 나는 섬) 사람들에 대한 비판은 과학, 수학, 음악만을 중요시하는 비실용적인 것에 대한 작가의 비판이다. 윤리와 인간의 이성과 같은 철학적인 사상에 대한 작가의 우월주의가 아닌가 싶다. 아울러 라퓨타와 제2 도시인 '린달리노' - 'lin'이 두 번(double) 들어가서 'double' 'lin', 즉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을 암시 - 이야기는 앞서 주석대로 영국과 아일랜드의 갈등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렇듯 철자를 바꿔서 당국의 검열을 피해 가며 여행기를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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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니발비'의 대학술원(연구실)에서는 실제로 동시대 과학자들이 실행했거나 제안했던 실험과 계획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재미있는 점은 정치학 연구를 하는 연구원들을 묘사하는 스위프트의 풍자이다. 학자들이 군주에게 제시할 여러 가지 허황된 제안들 중에는 총신을 뽑을 때 지혜, 능력, 도덕성을 근거로 하라고 설득한다든지, 백성들의 이익을 염두에 두라고 대신들에게 가르친다는 제안, 또한 훌륭한 공적과 위대한 능력, 탁월한 봉사에 정당한 보상을 해야 하고, 공직자를 임명할 때 그 자리에 적임자를 선출하는 것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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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사 혹은 마법사의 섬인 '그럽덥드립'의 에피소드는 스위프트의 역사관을 보여주고, '럭낵'이라는 나라에서는 '스트럴드브럭(불로장생인)'에 대한 환상을 깬다. 아울러 노년의 사람들에게 있는 불가피한 특성인 '탐욕'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들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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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넘국(마인국) 여행기 -

말이 세상의 지배자인 세상. 그렇지만 자연을 파괴하고 종족 간에 대규모 전쟁을 일으키고 온갖 부정과 부패, 거짓말, 탐욕의 세상이 아닌 이상적인 세상. 그런 이상향을 그린다. 이곳에서 인간은 '야후'라 불리는 미개하고 잔인한, 구역질 나는 이성으로 길들여지지 않는 동물이다.

스위프트는 '휘넘'의 세상은 유토피아적이며 모든 상상을 동원해도 더 이상 완벽한 곳은 없는 곳으로 묘사하며, 그 세상에 사는 '야후'라는 인간에 대한 묘사는 잔인할 정도로 냉정하게 묘사한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나쁜 것과 더러운 것으로.

그의 견해는 아마도 인간이라는 '야후'는 어떠한 것으로도 교화될 수 없으며 '이성'은 이미 모든 물질적인 것과 타락한 인성으로 인해 아주 소수의? - 이것도 아닌 nothing 인가? - 인간만이 가지고 있으며 그마저도 타락한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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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실제 작가는 이 이야기를 풍자적인 여행기로 썼지만 일부 내용은 그가 바라는 인간에 대한 희망과 경고가 아닐까 한다. 아주 작은 권력에 대한 싸움. - 한 나라의 권력 또는 세계적인 지도자도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보잘것없다 - 비교 대상이 있을 때 과연 나는 소인인가? 거인인가? 겉모습이 아닌 내면의 나는 소인인가? 거인인가? 과연 인간이 만물의 영장인가?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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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풍자로만 그치는 것이겠지만(아마도) 휘넘의 세상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18세기에서 현재 21세기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일생에 비하면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지만 인류의 역사와 다른 생물체들의 역사를 비교해 볼 때는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다. 그리고 이미 많은 자연 현상들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류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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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짧은 시간 동안 '인간'은 사소하고 의미 없는 싸움을 멈추고 '논쟁', '다툼', '거짓말'이 없는 세상을 만들려는 노력이라도 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우선 가까운 곳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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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적이고 야비하고 불결한 야후 따위가, 이성적이고 고결한 휘넘(말)을 지배한다니, 어처구니없는 소리다. 자네는 야후가 아니라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성적인 동물을 다스리는 데는 이성만 있으면 충분한데, 인간들은 정부니 법이니 온갖 제도가 있어도 다툼이 끊이지 않으니 어찌 이성을 갖췄다고 말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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