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읽기를 권함 - 2004년 2월 이 달의 책 선정 (간행물윤리위원회)
야마무라 오사무 지음, 송태욱 옮김 / 샨티 / 2003년 11월
평점 :
절판


인문학 열풍과 다독이 나름 이슈인? 요즘 시대에(2003년에도) 천천히 읽기를 권하는 책이다. 말하자면 '통독'을 권한다. 너무 빨리 읽어서 보지 못한, 작가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숨은 보석과도 같은 글들은 오직 천천히 읽어야만 보이고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일본의 국민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대표작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 나오는 한 줄이다.

무사태평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속 깊은 곳을 두드려보면 어딘가 슬픈 소리가 난다.

분명히 책을 읽은 사람은 다 이 문장을 읽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문장에서 머물러 고요하지만 쓸쓸한 감정을 느낀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이 책의 저자가 이 한 줄을 언급하기 전에 말이다.

그럼 왜 이 담백하지만 쓸쓸하고 적막한 글을 못 보고(또는 보았지만 아무 느낌이 없이) 지나갈까? 저자는 '빨리' 읽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위의 문장은 '간게쓰' 군이 바이올린을 사기까지,(책에 인용이 되어 있는데 조금 길고 재밌다. 그 부분은 직접 '소세키'의 책으로.) 그리고 사고 나서 막상 켜려고 할 때까지의 이야기가 장장 스물네 쪽이나 이어진 다음 모두가 돌아가버려 적적한 분위기가 떠도는 장면에서 나온다. 작가는 위의 문장과 마찬가지로 간게쓰 군의 엉뚱한 대화도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서 도대체 이 소설을 들고 무엇을 했냐며 한탄을 한다. 역시 답은 빨리 읽었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린다.(아이러니한 건 저자는 자신이 천천히 읽는 지독파라고 한다. 특히 속독파에 비해서라면 더욱 그러하다고 한다) 이어지는 내용은 속독파에 대한 저자의 견해이며 두 명의 다독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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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평론가인 '후쿠다 가즈야'와 그의 저서 <한 달에 백 권 읽고 300매 쓰는 나의 방법>이라는 무시무시한 제목의 책과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다독가이자 평론가인 '다치바나 다카시'와 그의 저서 <내가 읽은 재미있는 책, 엉터리 책 그리고 나의 대량 독서술, 경이의 속독술>이라는 제목만 봐도 거창하고 황송한(저자의 표현이다) 책에 대한 내용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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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치바나 다카시가 써놓은 독서 기술이다. 책은 문장 하나하나를 충실하게 읽는 것이 아니라 책 전체의 구조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우선 그 흐름을 파악한다. 먼저 장 단위로 전체의 큰 흐름을 파악한 다음, 절 단위로 세세한 흐름을 파악해 간다. 속독으로 읽을 때에는 단락 단위로, 단락의 첫 문장만 차례로 읽어나간다. "이런 방법이라면 한 쪽을 읽는 데 1초, 좀 늦더라도 2,3초면 읽을 수 있다. 300쪽 책이라면 300초에서 900초, 그러니까 5분에서 1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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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다치바나 다카시는 모든 책을 속독해야 한다고 쓰지는 않았다. 소설같이 책 전체를 다 읽는 것이 기본인 책은 속독이 불가능하고 속독해서도 안 된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그러한 책은 읽지 않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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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마찬가지로 나로서도 이해하기 어렵다. 도대체 무슨 책을 그렇게나 빠른 속도로 읽지 않으면 안 되는지 모르겠다. 다만 저자는 이러한 다치바나 식, 후쿠다 식의 속독은 스스로 정보를 척척 섭취하고 배설하는 '정보 인간' 이 되려는, 그런 인생을 선택한 사람들에게 유효한 독서술이라고 결론 내린다. 저자가 소개하는 천천히 읽기를 권장하는 작가와 책은 '에밀 파게'의 <독서술>, '엔도 류키치'의 <독서법>, '헨리 밀러'의 <나의 독서>이다.

그러면서 천천히 읽기의 장점으로 자신의 경험담을 말한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책에서 얼마간의 감동을 느꼈을 때는, 그렇지 않아도 천천히 읽은 내가 더욱 천천히 읽고 있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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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와 '너무 빠르다'라는 것의 기준은 명시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작가는 동물들의 살아가는 리듬에 대한 티브이 프로에 나온 생물학자 '모토카와 다쓰오'의 <코끼리의 시간, 쥐의 시간>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생물학자가 메밀국수를 먹는 장면을 찍은 영상을 열여덟 배 빨리 돌리면 코끼리가 본 쥐의 움직임이고, 반대로 열여덟 배 천천히 재생한 움직임은 쥐가 본 코끼리의 움직임이라는 것이다. 굳이 기준에 대한 기준을 찾으라면 이 생물학자의 책이 참고가 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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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또한 독서의 기쁨은 오로지 '통독'에서만 나온다고 말한다. 다독가들의 책 읽기 중 띄엄띄엄 읽고 정보만 취하는 것은 독서가 아니며 읽은 책이라고 말해서도 안 된다고 말하면서 그러한 독서는 '살펴본다' 또는 '참조한다'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행복이란 행복의 예감이다'라는 인용을 하면서 독서도 읽지 않을 동안에 행복을 예감한다고 썼다. 그렇다면 책을 사서 읽기 전에 그 책을 읽는 상상이 독서의 기쁨이라는 것인데 격한 공감이 일어나는 대목이다. 그렇다. 우리는 주말보다 주말을 기다릴 때 더 행복하지 않은가? 여행 가서 보다는 여행 가기 전의 기분은 또 어떠한가?

나아가 독서에는 읽기 시작하는 행복이 있다는 말과 함께 한 권의 책이 시작되는 첫 열 쪽 정도는 책을 읽는 데 아주 중요하다고 말한다. 첫 열 쪽은 특히 정독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야 저자의 어구와 단어 사용 방법, 이야기의 틀 따위를 알게 되니까 더욱 책을 잘 이해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내용은 앞서 소개한 '엔도 류키치'의 <독서법>에 나와있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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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에 새 책을 들고 출근과 퇴근길 그리고 집에서 읽기 시작해서 토요일까지는 다 읽는다. 그리고 일요일에는 가능하면 바깥바람을 쐬고 싶다는 그의 일주일의 루틴이 여유롭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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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빨리 읽어버리는 것은 나에게 책이 가져다주는 모든 행복을 포기하는 일로 보인다. 단 한 가지, 속독을 실천하는 사람들만 맛볼 수 있는 행복이 있을 거라고 추측할 수는 있다. 그것은 양과 속도가 가져다주는 즐거움이다. 이번 달은 서른 권을 읽었다. 쉰 권을 읽었다. 백 권을 읽었다 하고 수첩에 적어 넣는 즐거움 말이다.

p 6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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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의 시대 - 누가 세계를 더 가난하게 만드는가?
장 지글러 지음, 양영란 옮김 / 갈라파고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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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에 이은 같은 맥락의 글이다. 전작이 젊은 세대들에게, 기아의 고통을 알지 못하는 젊은이들에게 기아의 문제를 친절하게 설명하는 책이었다면, 이 책 <탐욕의 시대>는 좀 더 강력하게 기아의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비판과 해결책을 제시하는 책이다.

특히 신자유주의 신념으로 국가를 넘어선 다국적 거대 기업들의 무차별적인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한 잠식을 우려하며 혁명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을 이어받는 깨어있는 민중들의 저항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다국적 거대 기업이 제3세계의 시장을 잠식하는 수법은 마치 마약상이 일반인을 중독자로 만들어 충성고객으로 만드는 과정과 같다. 그들은 남반구의 최빈국들인 아프리카, 아시아, 남아메리카의 나라들에서 유전자 변형 종자를 무상으로 주고 농사를 짓게 한 후 일정 기간이 지나면 무상 지급하던 것을 유상으로 판매한다. 안사면 그만이라고? 씨종자 자체도 그들 다국적 기업들의 소유이므로 농사를 그만두지 않는 이상은 그들에게 매년 로열티를 주어야 하며 씨종자가 없으면 역시 매년 그들에게 비싸게 사야 한다. 그들 다국적 기업들은 지금도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을 모아놓고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상품을 세일즈 한다. '너희들은 녹색혁명도 실패했고 산업혁명도 실패했으니 유전자 혁명만큼은 실패하면 안 된다.'라고. 그렇게 해서 유전자 변형 생물에 대해 시장을 개방한 나라는 '부르키나파소'이다. 이 나라의 '블레즈 캄파오레'대통령은 미국과 거대 다국적기업에 우호적인 대통령이다. 그의 전임자인 '토마스 상카라'는 그렇지 못해서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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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의 '아옌데'를 죽이고 칠레의 모든 자원과 경제주권을 가져간 건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의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국가들과 그들의 첨병인 다국적 거대 기업들이지만 그들의 입맛대로 그들에게 칠레를 바친 건 군부를 비롯한 부패한 관료들과 정치인이다. 비단 칠레만의 일은 아니다 남아메리카 대부분의 나라,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나라들까지 권력과 돈을 가진 부패한 소수는 자신의 뿌리와 양심을 그들에게 팔았다. 그들의 세계화는,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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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위적으로 조작된 희귀재가 지배하는 수치의 제국(이 책의 원제이다), 저자가 보고 느낀 현재 세계의 모습이다. 이러한 세계를 만드는 건 미국을 비롯한 세계화 지상주의자들과 그들의 이익을 위해 꼼꼼하게 세계를 누비는 거대 다국적기업이다. 그들이 원하는 건 영원한 전쟁이다. 그리고 그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부채'와 '기아'이다. 그 두 가지 무기로 민중을 노예화시키고, 그들이 지닌 힘과 자원을 빼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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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존재 이유인 전쟁과 폭력, '전 세계적인 테러와의 전쟁'에 들어가는 비용의 극히 일부만 투자해도 지구상의 기아와 재해를 뿌리뽑는 데 충분할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적인 테러와의 전쟁'의 책임자들은 자신들의 방식대로 테러주의자들을 규정한다. 몇몇 정부(미국, 이스라엘, 러시아 등)들이 테러주의자라고 지목하면 그대로 테러주의자가 된다. 이들은 '사전 예방적인 전쟁'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인류의 평화를 위한 전쟁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 전쟁 이면에는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보는 거대 다국적 기업과 그들과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미국과 같은 북반구의 시장 자유주의 국가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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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여러 가지 통계수치가 꽤 많이 나온다. 남반구에 위치한 최빈국들의 외채, 기아 사망률 등 숫자가 주는 사실은 그리 와닿지는 않는다.(그마저도 13년 전의 수치이다) 아마도 남의 나라, 먼 나라의 일이라고 생각해서 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2006년 기준 62억 명의 인구 중 8억 5,400만 명(6명 중 한 명꼴)이 심각한 영양 결핍이고, 5초마다 10세 미만의 어린이 한 명이 기아로 목숨을 잃고, 4분에 한 명이 비타민 A의 부족으로 시력을 잃는다는 사실은 어쩔 수 없는 자연현상 같은 것이 아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부채'를 무기로 구조적인 폭력과 살인을 하는 북반구의 시장 자유주의자들이 만드는 세계이다.

유엔 식량농업기구에 따르면 현재(2006년) 세계의 농업 생산력으로는 120억 명을 정상적으로 먹일 수 있다. 세계 인구는 62억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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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언급하는 남반구 빈국들의 부채와 기아, 그곳에서 벌어지는 시장 자유주의자들의 경제적 식민지화, 세계 갑부들의 순위에서 상위권을 차지하는 남반구 빈국들의 독재자들, 아시아나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빈민촌의 아이들. 이러한 모든 부조리와 모순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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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대혁명에 가담한 혁명주의자들은 모두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었다. '생쥐스트'는 27세, '바뵈프'는 37세의 나이에 단두대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자크 루'는 혁명 정부가 사형을 선고하자 단검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마라'는 암살당했다.

특정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다른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을 기아에 허덕이게 만들 때, 자유란 한낱 허울뿐인 유령에 불과하다. 부자가 독점을 통해서 동시대인들의 생사여탈권을 장악할 때, 평등이란 한낱 허울 좋은 유령에 불과하다. 혁명의 반동 세력이 나날이 곡식의 가격을 쥐고 흔들어 시민들의 4분의 3이 눈물 없이는 식량을 조달할 수 없을 때 공화국은 한낱 유령에 불과하다.

자크 루

자유란 먹고 살 걱정이 없는 사람들이나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행복해질 권리는 인권 중 가장 으뜸이다. 혁명은 완벽한 행복을 획득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생쥐스트

나는 나를 이루고 있으면서 당신들 앞에서 말을 하는 이 먼지 덩어리를 경멸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처형하여 이 먼지 덩어리의 입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몇 세기가 지난 다음, 아니면 하늘나라에서라도 나한테서 나만의 독자적인 삶을 앗아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보십시오.

생쥐스트 - 1794년 7월 26일(교수형 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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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 (양장본) ㅣ 스티브 잡스
월터 아이작슨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한 사람의 일대기가 전기로 남는다는 것은 그가 남긴 유산이 시간이 흘러도 퇴색되지 않고 찬란하게 빛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잡스가 남긴 유산은 바로 '애플'이라는 기업과 그의 모든 결점을 뛰어넘은 예술적 감각의 '애플' 제품들이다. 하지만 그의 사후부터 현재 진행형인 지금의 상황은 그리 밝지만은 않은 '애플'의 미래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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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기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충성하는 애플의 '스티브 잡스'와 인간적으로 불완전하고, 책임감도 없고, 마약쟁이에, 자기 자신뿐이 모르는, 천재적인 사업성과 예술가적인 기질이 없었다면 그저 그런 실리콘밸리의 괴팍한 한 사람이었을 '스티브 잡스'도 있다. 작가는 삼자 입장에서 최대한 객관적으로 스티브 잡스의 인생을 서술했다. 유년 시절부터 그의 임종 직전까지. 또한 그 자신이기도 한 '애플'의 작품들도 순서대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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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세상에 내보낸 그의 자식과도 같은 애플의 제품들, 그와 동시대에 살았고 여전히 살아있는 실리콘밸리의 천재들, '픽사'의 설립자로 자의든 타의든 애니메이션 영화의 성공에 일조를 하고, 그가 동경해 마지않는 위대한 뮤지션들, 그들과의 교류. - 가장 놀라웠던 것은 '존 바에즈'와의 썸이었고 나는 그 사실이 너무 싫었다 - 그를 위대한 천재로, 나아가 신과 같이 추앙하는 애플의 신도(잡스의 신도)들, 그로 인해 천문학적으로 그가 벌어들인 돈, 이러한 것들이 스티브 잡스를 설명할 수 있는 수식어이며 그의 인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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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 아이작슨'이 스티브 잡스의 전기를 쓰기로 결정하면서 내건 조건은 집필 과정에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해서는 안 되며 사전에 보여 달라고 해서도 안된다고 했다고 한다. 물론 잡스도 그 조건에 동의를 하며 읽어 보지도 않겠다고 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나온 이 전기는 그의 위대한 혁명과도 같은 제품들의 탄생 과정에 관한 일들과 그러한 일에 항상 동반되는 그의 불같은 성격, 추진 과정에서 발생하는 명과 암이 가감 없이 - 판단은 각자의 몫이지만 -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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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스티브 잡스가 적어도 여섯 개 산업 부문에서 혁명과도 같은 일을 해냈다고 한다. 그 여섯 개는 PC와 애니메이션, 음악, 휴대전화, 태블릿 컴퓨팅, 디지털 출판이다. 각각의 분야에서 분명 스티브 잡스는 혁명과도 같은 일을 해냈다. 더구나 그는 이 모든 혁명을 적당한 타협 없이 완벽을 추구하는 열정과 추진력으로 이루어 냈다. 그러한 점이 스티브 잡스의 모든 인간적인 결점을 덮고 - 사실 소비자들과 그의 성격은 상관이 없지만 - 그의 열성적인 지지자들을 포함한 대중들을 혁신적이고 아름다운 제품의 소비자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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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리더십의 기업가이며 위대하고 창의적인 예술가인 스티브 잡스는 이렇게 여러 가지 혁신적인 제품들을 유산으로 남기고 떠났다. 인간적으로 불완전한 한 사람의 일생이며 타의 모범이 될 만한 도덕적인 인물은 아니었지만 세상에 없는 혁신적인 제품에 대한 아이디어, 디자인에 대한 집착, 경제논리보다는 완벽한 제품에 대한 고집과 열정은 '애플'을 혁신의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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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애플'의 미래가 어떨지는 모른다. '애플'에 부정적인 시선은 기업가치를 따지는 그런 전문가적 시선이 아닌 내 사심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애플'은 잡스 시대와는 다른 쪽으로 진화할 수도 있겠지만 확실한 건 '잡스의 애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타협 없는 완벽 추구가 그가 없는 '애플'에서 계속 이어질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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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잡스'가 아닌 예술가 '잡스'의 인생은 찬란하게 빛났고 적어도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애플'도 영원할 것 같았다. 그가 없는 '애플'은 어쩐지 무채색 같다. 그의 빈자리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애플'의 정점에서 그가 떠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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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난 '애플'의 폐쇄가 싫다.

2. 애플은 디자인이다. 그걸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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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7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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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미래를 암울하고 비참한, 희망이 없는 세계로 그린 조지 오웰의 작품이다. 그 역시 병마와 싸우며 암울한 시기에 쓴 소설이라 더욱 어둡고 비관적이다. 하지만 소설 속의 세계는 결코 허구의 세상이 아니다. 작가가 그린 시대도 한참 지났지만, 이 세계는 작가가 예견했거나 또는 전체주의를 경계하고자 하는 의도로 쓴 소설이 현실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정도와 방법의 차이는 있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는 '빅 브라더'가 있고, 자본주의 논리에 의해 좌우되는 모든 선동이 있다. 개개인 각자 생각과 행동은 자신이 정한다고 하지만 결국 그렇게 사고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게 세뇌당해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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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브라이언'이 말하는 중세의 '종교재판'과 20세기 초의 '전체주의' - 독일의 나치, 소련의 공산주의자 - 가 실패작이라고 하는 이유는 소수의 이단자를 처단해도 결국 자신들의 체제를 무너뜨리는 그들의 신념(정신)까지는 말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오세아니아' 즉 우리는 그러한 실수는 저지르지 않는다고 말한다. 즉 거짓 자백이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온 자기반성과 충성심, 궁극적으로는 전체주의 사상에 대한 순수한 사랑이 생기게끔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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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3개의 국가로 나뉘어서 항상 전쟁 중이라는 설정, 유사 이래 인간은 항상 계급사회였다는 그것도 상층계급, 중간계급 그리고 하층계급이라는 3단계의 계급사회가 계속 이름만 바뀌어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설명 - 소설에서는 소수의 지배계층인 '내부당원'과 중간계급에 해당하는 '외부당원' 그리고 하층계급의 '노동자'가 존재한다 - 그리고 전체주의적인 선동과 세뇌로 개인의 사생활과 자유까지 통제하며 서로를 감시하는 심지어는 부모, 자식 간에도 사상범으로 고발하는 국가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 체제 유지 수단으로 사상(비밀) 경찰과 '텔레스크린'이라는 감시용 카메라, '마이크로폰'이라는 도청장치 등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최고는 지배층인 내부 당원들의 사상범 색출 방법이다. 일단 사상범의 싹이 보이면 몇 년이 걸리더라도 면밀하게 감시하고 같은 편인 척 함정을 파고 그와 동조하는 다른 사람까지 잡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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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의 지배계층이 지배하는 사회를 유지하는 방법은 극단적인 선동과 세뇌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국가는 중간계급인 외부 당원들은 철저히 통제하고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게 만든다. 그들이 모여서 체제 전복과 같은 모의를 차단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하층계급인 노동자들은 사생활과 자유를 억압하지 않고 그들만의 즐길 거리를 던져준다. - 마치 정치에 관심 갖지 말라고 5공때 3S를 던져준 29만 원이 전 재산인 대머리가 그랬듯이 - 하지만 '윈스턴'은 그런 하층계급의 노동자들이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 소설의 시대에는 아직 노동자들은 개, 돼지와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윈스턴'도 자신의 시대에는 이루어지지 못하더라도 언젠가는 혁명이 일어날 거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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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지배계층의 다양한 수단들과 정부기관들을 묘사하는데 보도, 연예, 교육 및 예술을 관장하는 '진리부', 전쟁을 관장하는 '평화부',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애정부', 경제 문제를 책임지는 '풍요부'가 그것이다. 하지만 각각의 기관들은 체제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진리부'는 모든 기록의 조작, 교육과 예술도 체제 유지를 위해 과거와의 단절 등 왜곡하고, '평화부'는 전쟁을 계속 진행시켜서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국가에 충성하게끔 선동하며, '애정부'는 사상범들의 고문과 개조, 교육을 담당한다. 그리고 당의 세 가지 슬로건인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은 처음에는 그 의미를 파악하기 힘들었는데 각각 '평화는 전쟁', '예속은 자유', '힘은 무지'로 바꿔서 읽으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개념임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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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층인 내부당원 '오브라이언'이 '윈스턴'을 고문하며 이야기하는 궁극적인 당의 목표에 대한 내용은 실제로 그러한 사회가 된다면 과연 누구를 위한 세상일까 생각해보게 된다. 부모와 자식, 인간과 인간, 남자와 여자 간의 유대를 끊고,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엄마 품에서 빼앗아오고, 성 본능도 오르가슴도 없애고, 출산은 배급 카드를 발급하듯이 일 년에 한 번, 미술, 문학, 과학도 없애고, 이 세상의 모든 쾌락은 다 파괴되는 사회. 소수의 지배계층을 제외하고는 중간계급도 없이 다 노예화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노예들은 자발적으로 생각도 할 수 없는 상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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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보여주는 세계에서는 마지막 남은, 최후까지 지키고 싶은 인간성마저 버리게 만드는 극한의 고문이 있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폭력과 고문,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인 회유와 협박, 그리고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심연의 공포로 마지막 인간성을 내려놓게 만드는 101호까지. 과연 나도 '윈스턴'의 선택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 말고 대신 고통을 당할 사람은 마지막까지 지켜주고 싶던 사람이었다. 마지막까지 지켜주고 싶었던 사람을 버리니 몸은 해방이 되었다. 정신은 이미 세뇌되어 생각이란 게 없어졌고 오로지 우상을 향한 사랑만이 남았다. 이렇게 당을 배신하고 혁명을 꿈꾸었던 인간은 지금도 전에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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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 창의적이건 역발상이건 자유로운 사고로 인한 답이면 좋겠지만 '빅 브라더'가 원하는 답이라서 라면 무섭다. '빅 브라더'는 불멸의 권력이다. 권력은 인간의 육체뿐만이 아닌 정신도 지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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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친일파 - 반일 종족주의 거짓을 파헤친다
호사카 유지 지음 / 봄이아트북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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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일본에서 태어나서 우리나라로 귀화한 '호사카 유지' 교수의 책으로 <반일 종족주의>라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책에 쓰인 거짓 선동을 바로잡으려 쓴 책이다. 귀화라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뿐더러 한국에 대한 대단한 애정이 있었기에 지금까지의 행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책날개에 소개된 저자의 약력을 보아도 한일 관계 연구에 매진하였고 철저하게 팩트와 고증을 바탕으로 진실성 있는 저서들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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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소개했듯이 이 책은 철저하게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에서 주장하는 역사왜곡을 바로잡기 위해서 쓴 책으로 크게 '강제징용', '위안부', '일제 강점의 무효' 세 가지 주제로 쓰여졌다. 그에 앞서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의 정체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하는데 <반일 종족주의>를 집필한 저자들의 대표 '이영훈'과 공동 저자들, 특히 '이우연', '주익종'의 철저하게 일본 우익의 입장을 대변하고 자신들의 주장의 정당성을 위해 진실 및 핵심을 은폐하는 행태를 비판한다. 그리고 세월호 진상 규명이 이미 끝났다고 우기는 이영훈의 사회적 인식에 문제가 있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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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위안부의 증언을 부정하고 판결이 거짓이라고 우기는 이영훈을 보며 그는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개탄한다. 그러면서 <반일 종족주의>의 저자들을 자신이 성병 보균자라는 사실을 숨기고 불특정 다수와 성관계를 가지는 명백한 범죄를 저지르는 재론의 여지가 없는 '악마' 그 자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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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영훈이 주장하는 '위안부'는 자발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스스로 위안부가 되었으며 그것이 물질주의라며 비판하는데 이러한 사고방식은 그 자신이 물질주의, 배금주의 의식에 빠져있는 역사의식 없는 - 또는 역사왜곡에 능한 - 경제학자라는 사실만을 보여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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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징용'은 특히 일본의 탄광으로 연행된 조선인들의 열악한(극도로) 근무와 애국저축, 강제저축, 보통저축을 빼면 수중에 남는 돈은 겨우 용돈 수준의 돈으로 집으로 송금할 돈은 없었다. 그것도 탄광에서 일하는 다른 일본인들의 수준에 미치지 못했고 중간에 그만두면 여러 명목의 강제로 저축한 돈은 찾을 수 없었다. 이마저도 살아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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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수를 광부로 사용한 일본은 결국 조선인, 중국인, 전쟁 포로 등을 전시 동원 체제로 연행해 탄광에 투입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 중국인, 전쟁 포로들은 가장 힘들고 위험한 탄광 갱내 노동에 투입되었고 식사도 제대로 배급받지 못했다. 물론 사망률도 높았고 탈출은 거의 불가능했다. <반일 종족주의>의 저자 이우연 등은 강제징용이 아니었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중요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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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광에 끌려간 조선인의 증언, 일본의 내부 자료 등 일본의 '강제징용'의 증거는 차고 넘친다. 하지만 일본의 극우세력과 <반일 종족주의>의 저자들은 '강제징용이 아니다.' '임금차별은 없었다.' '밤새워 화투도 치고 과음도 하고 위안소에서 월급도 탕진할 만큼 생활이 자유로웠다.'라며 똑같은 목소리로 진실을 은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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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은 '위안부' 관련 문서인 미국의 '위안부' 심문 보고서의 중요 부분을 교묘하게 은폐하고 왜곡하며 '공창제'라는 말을 끌어들여 사기에 속아서 매춘을 강요당한 위안부들을 기생이나 공창이었다고 주장하며 일본군과 조선총독부의 범죄를 가린다. 또한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미군의 포로 심문 보고서의 몇 가지 부분을 짜깁기해서 인용을 한다.

위안부란 일본군에 부속된 직업적 창녀들이다. 그녀들은 남자를 가지고 노는 방법을 알고 있다. 개인별로 독방에서 생활하고 영업하였다. 식사는 위안소의 업주가 제공하였다. 그녀들의 생활은 비교적 사치스러웠다. 식료와 물자를 구입할 수 있는 충분한 돈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녀들의 생활은 좋았다.

110p <신친일파>

위의 글은 미군의 포로 심문 보고서 속 몇 군데에 있는 여러 문장들을 가져와서 마치 한 단락인 것처럼 만든 글이다. 이처럼 이영훈은 일본의 우파들이 그러하듯이 자신의 논리에 필요한 일부분만을 인용하고 짜깁기해서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는데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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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보았던 강제징용에서도 가장 위험한 갱내 작업에 강제징용된 조선인, 중국인, 전쟁 포로가 투입되었듯이, 위안부도 버마와 같이 최전선에 배치된 위안부는 대부분 조선인 위안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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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신친일파)의 저자 호사카 유지는 이영훈 등이 <반일 종족주의>에서 밝힌 그릇된 - 또는 일부러 왜곡한 - '위안부' 논리에 대해서도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먼저 이영훈 등이 인식하고 있는 위안부에 대한 주장은 첫째, 기존의 성매매 업소가 그대로 일본군의 군 위안소로 바뀐 것이라는 주장. 둘째, 빈곤계층의 여성들이 가부장적인 아버지에 의해 기생집으로 팔렸고, 그 연장선상에서 여성들이 일본군 위안부가 되었다는 주장. 셋째, 조선 여성들이 업자들의 감언에 속아 위안부가 되었더라도 그런 일은 흔하게 있던 일이고, 일본 정부나 일본군의 책임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에 저자는 여성들의 취업 사기와 납치 등으로 강제 연행된 것이 위안부이고, 빈곤계층의 여성들뿐만이 아닌 학교 선생님 등 빈곤층이 아닌 사람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는 점, 강제 연행의 책임이 업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닌 그들에게 모집부터 경영까지 맡긴 일본 정부와 일본군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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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 종족주의>의 저자 이영훈 등은 역사의식의 부재, 또는 어떠한 신념 - 경제적인 -에 사로잡혀 그릇된 정보를 주장한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고 무시하고, 그러다 말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은 이제 버려야 한다. 명백하게 일반 성매매 여성과 구별되는 총칼로 위협해서 저지른 매춘이 어찌 같을 수가 있는가? 어떻게 기생이었거나 공창에서 일한 여성이, 철저하게 돈을 벌고 남자를 가지고 놀던 여성이 내가 일본군 위안부였다고 증언할 수 있겠는가? 이영훈은 성매매 여성들과 일본군 '위안부'는 모두 같은 부류라고 우기면서 '위안부'에 대해서만 분노하는 한국인을 '반일 종족주의'라고 말하면서 일본의 '위안부' 문제를 은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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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였던 사람의 증언으로 위안부들의 하루 일과와 미군의 포로 심문 보고서에 나와있는 '이용일 할당표'로 본 휴식일, 그리고 여러 가지 내부 자료들에서 볼 수 있는 위안부 1명당 상대해야 하는 군인들까지 위안부들의 끔찍한 생활은 가히 상상할 수가 없다. 특히 전투에 투입되기 전에는 위안부 1명에게 80여 명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증언까지 있다(그걸 만화로도 그렸다)

그들(일본군 '위안부' 문제 운동가나 연구자들)은 빈곤계층의 여인들에 강요된 매춘의 긴 역사 가운데 1937~1945년의 일본군 위안부제만 도려낸 가운데 일본 국가의 책임을 추궁하였습니다. 그들은 인도주의자도 여성주의자도 아니었습니다. 민족주의자였습니다. 아니 난폭한 종족주의자였습니다.

253p <신친일파>

위와 같이 말하는 이영훈의 논리는 조선의 기생제와 공창제의 연장으로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생겼고, 그 연장선상에 해방 후 한국의 '위안부', 미군 기지촌 여성들이 있다는 논리이다. 그리고 심지어는 다 같은 창녀라는 것이다. 이런 것도 논리인가?

이영훈을 비롯한 <반일 종족주의>의 저자들이 실제로도 이러한 논리가 맞는다고 생각하면 이해력이 심히, 아니 거의 없는 저능아 수준이므로 교수의 또는 연구원의 자격이 없는 것이고, 의도된 역사왜곡이라면 인간의 자격이 없는 것이므로 인격 대우를 해줄 필요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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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말미에도 나오지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라가 힘이 없어 희생된 여성들에 대한 남성들의 가부장적인 태도는 우리나라의 부끄럽고 치욕의 역사이다. 중국에 강제로 바친 공녀가 돌아오자 우리는 '환향녀'라고 부르며 경멸했다. 또한 '위안부'들이 한국에 돌아왔을 때도 우리는 그녀들을 부끄러워했다. 우리가 가장 우리에게 잔인했다. 위안부는 조선인 업자가 모집해서 조선인이 포주였다. 그런 사람들의 후손들이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잘 살고 있다. 부끄러운 일이다. 친일파 청산이 꼭 필요한 일이다. 아울러 신친일파의 싹을 잘라 다시는 이 땅에 기생하지 못하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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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는 독도 분쟁에 대한 사실과 거짓에 대한 글, 일제 강점이 원천적으로 무효인 이유에 대한 글이 수록되어 있으며 <반일 종족주의>에는 소설 <아리랑>의 작가 조정래에 대한 비판, 토지 수탈론, 쌀 수탈론, 육군 및 학도 지원병 문제, 백두산 신화 비판, 쇠말뚝 신화 비판, 고종황제 비판, 친일 청산에 대한 비판이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물론 그 책은 읽을 생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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