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 2010년 7월 14일  

오늘은 단테의 '신곡'입니다. 제목은 절대자와의 만남. 신곡입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절대자의 만남과 그 여행을 통해 단테가 범상치 않는 인물로 새롭게 태어나는 내용입니다. 

이글을 보면서 새삼 저의 무식함을 깨닫게 되었네요. 단테가 1300년을 전후해서 살다 간 사람이네요. 전 지금까지 1500년대 인물로 알고 있었는데요. 후~. 그리고 베아드리체가 여기도 나오네요. 역시 사람은 많이 읽고 많이 보고 많이 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끼네요. 

단테의 '신곡'은 인간의 영원한 것에 대한 소망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신의 경지이든, 관조적 경지인듯 인간이 꿈꾸는 최고의 경지이겠지요. 단테는 기독교인이었을 감안하면 신의 경지는 아니고 그 아래 단계의 경건한 수도자적인 삶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신곡'은 지옥편, 연옥편, 천국편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저자에 의하면 단테의 이 구분방식 말고 단테가 안내자들과 만나고 헤어지는 지점에 따라 구성을 나눌 수도 있다고 하네요. 베르길리우스가 안내하는 지옥편1~34곡과 연옥편 1~29곡, 베아트리체가 안내하는 연옥편 30곡~천국편 30곡 그리고 베르나르두스가 안내하는 천국편 31~33곡으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대한 기초적 지식이 '신곡'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지옥에서 연옥 그리고 천국으로 이어지는 단테의 여행을 따라가면서 사실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했습니다. 저자의 해석이 그나마 곁들여져 있지 않았다면 이 책에 소개된 몇곡의 시도 다 읽지 못했을 겁니다. 단지, 천국까지 이르는 단계가 단테를 기존의 평범한 인간에서  새로운 경지의 인간으로 성장시키고 있구나 하는 정도의 느낌만 받았네요. 그 과정에 별로 공감을 갖지도 못했구요. 

단테가 기독교인일 거라는  선입견때문에 그런지 단테가 추구한 경지라는 것이 절대자(신)의 테두리 안에서의 성장과 보호에 만족하는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 인간으로서의 치열한 고뇌와 성장을 통해 높은 경지의 수준에 도달하고 이상적인 모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존재, 그 한계에서 성장을 얘기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이것이 무슨 차이가 있는지 잘 모르겠네요. 차이가 있는 것인지, 없는것인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안티고네'에서 쭉 이어지던 이상에 대한 욕망,절대수준에 도달하고자 하는 욕구과 같은 것들에 대한 고민/사상을 접하는 것같았는데 '신곡'편에서는 갑자기 맥이 딱 풀리는 느낌입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봤자 결국 사람은 절재적 존재(신)의 손바닥안이라는 느낌. 그러면 그렇게까지 치열하게 갈구할 필요가 있을까? 그저 성경이 말하는대로 불경이 말하는대로, 코란이 말하는대로 열심히 생활하면 그만이지. 뭘 그리 갈구하고 관조적수준이니 하는 높은 경지를 갈구할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독서하며 그때 그때의 느낌이나 도서내용을 chapter별로 나누어 기록해 볼려고 합니다. 형편없는 글솜씨이지만 저를 성장시킬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이번 내용은 강유원의 '인문고전강의' 중 제 3장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입니다. 

제목은 윤리학이지만 실제 이 책은 철학책입니다. 처음 책 제목을 보았을때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말 박식하고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졌구나 생각했습니다. 철학자가 윤리까지 집필할 정도니깐요. 그런데 제목만 윤리학이네요. 

 이책은 출판을 위한 책은 아니고요. 강의용 노트입니다. 따라서 책의 치밀한 논리구조를 따라 쓴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 형식과 내용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이니 평이하지는 않습니다. 

이책은 올바로 행하는 것과 올바로 아는 것, 이 둘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제대로 행한다는 것은 무엇인자, 그리고 올바로 행하면 무엇이 좋은지. 우리의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지 등을 탐색해보는 책이라고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으 대답은 '좋은 습관'을 길러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앎과 삶을 연결하기 위해서랍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지요.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는 올바로 알면 곧바로 올바로 행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고 하니 스승과는 다른 입장을 갖고 있었네요. 

오늘날 정치학은 통치의 기술을 따져 묻는 사회과학입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을 '인간의 실천적 삶 전체를 통찰하는 총체적 탐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정치학이 추구하는 가장 좋은 것의 구체적인 내용은 행복이라고 합니다. 물론 행복이 무엇인지는 또 다른 사유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chapter를 읽으면서 가장 와닿는 단어는 '실천적 지혜'였습니다.보편적 목표와 그것을 이루는 수단을 숙고하여 일을 제대로 하는 힘이라는 저자의 해석에 공감을 하고요. 실천없는 지식인에 대한 절망감(?)과 지식없는 막무가내 실천자(사이비가 맞겠죠)에 대한 분노를 생각해보면 '실천적 지혜'야 말로 다시 생각해 볼 화두인 것 같습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장의 마지막을 장식한 내용은 현재의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국민이 다시금 새겨봐야 하는 글이라는 생각을 저 나름대로 해보았습니다. 인문고전강의 183페이지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그때 그때 내용이나 느낌을 정리해 나가 볼 생각입니다. 다음은 단테의 신곡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인터넷을 하다 배너광고로 뜨는 도서를 처음 봤을 때에는 그저 무심코 지나갔는데 우연히 책을 상세히 검색하다 정치철학이라는 단어에 주위를 빙빙 돌면서 구입을 고민하다 구매. 

"정의"라는 것을 이렇게 철학적으로 풀어낼 수 도 있구나 하는 점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고 철학자들(철학사상)이 "정의"를 정의하는 내용에 푹 빠져볼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습니다. 

철학적 사고를 머리아프고 복잡한 것으로 치부하기 쉬운데 이책은 "정의"라는 한 단어에 집중하면서 각 사상가들의 논지와 그리고 이어지는 문제제기가 책을 끝까지 읽게 해 준 원동력입니다. 

공리주의적 관점, 자유지상주의 관점, 칸트의 순수이성실천/정언명령, 롤스의 원초적 평등에 기반한 자유주의적 관점,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관점들을 차분하게 펼쳐 나갔고 또 그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러면서 본인의 주장을 고민을 던지듯 자연스럽게 독자들에게 제공합니다,   

이 책을 보면서 개인적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관점에서의 정의에 공감을 많이 했는데 그 뒤에 이어지는 충직의 딜레마에서 여지없이 나의 공감이 깨지는 재미를 맛보기도 했습니다. 결국 "정의"란 이성적 판단만으로는 정의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공동체, 연대의식등 이성에만 호소할 수 없는 비이성적 요소를 무시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정의란 무엇일까요?  전 이책을 읽고나서도 잘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더 궁금해질 뿐입니다. 제가 가지는 도덕적, 정치적 신념(?)이 정말 정의로울까하는 의문도 생기네요.

도서를 읽을 때 저자의 관점에 갇혀 그대로 받아 들이지 말고 저자의 관점을 수 많은 관점중에 하나의 관점으로 다소 관찰자적인 입장에서 받아 들여야 한다는 조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자연습럽게 저자의 주장이 "정의"의 정의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공감을 하면서 읽되 책의 마지막장을 넘긴 이후에는 다소나마 "정의"에 대한 나의 생각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좋은 책을 읽었고 재미난 탐구 주제를 찾은 책이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